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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나라의 운명이 내 손 안에 있소이다
누구의 의견이 옳을까?
최명길과 김상헌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남한산성>을 관람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역사에는 수많은 결정과 무수한 결단이 있었고 그 이상의 고민이 전제(前提)했다. 그 결과가 바로 현재다. (2017.09.28)
*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세의 침략에 맞서 조정의 의견이 좌우 둘로 갈리어 혼란을 더욱 가중하는 조선 시대 배경의 시대극은 낯설지 않다. 백성의 안전은 나 몰라라, 옥체를 보존하시옵소서, 임금을 살린다는 핑계로 제 목숨을 구하려는 간신들. 충신들은 그에 맞서, 민심의 이반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사옵니다. 백성을 굽어살펴 주시옵소서, 읍소하며 나라의 근간이 무너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등 겉보기에는 조선을 침략한 외세에 버티어 겨룬 전쟁 같아도 속내는 자중지란, 집안싸움에 불과하였다.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황동혁(<도가니>(2011) <마이 파더>(2007)) 감독의 <남한산성>은 나라의 운명을 두고 부딪혔던 두 충신의 논쟁으로 내분(?)의 형세를 살핀다. 충신과 간신의 대립은 소략하고 대신 국가와 백성을 우선하는 마음은 같지만, 그 방식에서 차이를 보이는 두 명의 충성스러운 신하가 중심에 서는 것이다.
때는 1636년 인조 14년 병자호란, 중국의 주도권을 두고 명(明)과 겨루기가 한창인 청(淸)은 조선을 침략해 자신들을 섬기라고 강제한다. 워낙 대군인지라 변변히 맞서지도 못하고 조선의 임금과 조정은 남한산성으로 급히 몸을 피한다. 목을 옥죄듯 사방에서 포위해 들어오는 청의 대군과 사정없이 몰아치는 눈발과 갈수록 줄어드는 식량 탓에 남한산성에 갇힌 이들은 고립무원의 꼴이 되고 만다.
인조(박해일)는 이 난국을 타개하고저 이조판서 최명길(이병헌)을 사신으로 보내 회유책을 제시한다. 하지만 청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력시위는 하되 굳이 급하게 공격할 생각이 없다. 실은 느긋하다. 조선이 내부에서 먼저 무너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서다. 과연, 청의 예상대로 남한산성의 조정은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난맥이다. 저 혼자 살겠다고 충신의 목을 자르라 이간질하는 간신배는 제쳐두자. 밝힌바 이 영화의 목적은 다른 데 있다.
최명길은 일단은 청을 섬기고 훗날을 도모하자며 화친을 제안한다. 이보시오 이판! 목소리를 높이는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은 치욕스럽게 목숨을 구걸하느니 끝까지 맞서 싸워 대의를 지키자며 척화를 주장하다.
누구의 의견이 옳을까? 모르겠다. 일명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하여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인 인조가 청의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린 결과로 조선 왕조가 이후 300년 가까이 더 유지된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김상헌의 의견을 받아들였다면 어땠을까? 청에게 힘에서 밀리는 조선은 더는 나라로서 명맥을 유지할 수 없었을까? 아니면 극적으로 승리해 사가들은 병자호란을 치욕 대신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했을까? 이 또한 모르겠다.
최명길과 김상헌을 두고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남한산성>을 관람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다. 역사에는 수많은 결정과 무수한 결단이 있었고 그 이상의 고민이 전제(前提)했다. 그 결과가 바로 현재다. 역사는 그처럼 단순하지 않다. 흔히 역사, 그중에서도 정사를 두고 승자와 강자의 것이라고 얘기를 한다. 그렇지만 기저에는 우리가 쉬이 상상할 수 없는 변수의 디테일이 존재한다. 그건 인물일 수도, 상황일 수도, 또 다른 무엇일 수도 있는데 <남한산성>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청나라 역관 정명수(조우진)를 들 수 있겠다.
그는 본디 조선인이었으나 청나라에 가서 관직에 오른 인물이다. 왜? 최명길과 함께 사신의 자격으로 청의 진지에 파견된 간사한 신하 하나는 행여 제 목숨이 날아갈까 간곡히 하소연하듯 이런 뉘앙스로 묻는다. 조선인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건가? 천민 출신이란 이유로 천대받았던 기억을 가슴 깊이 간직한 정명수는 조선을 향한 응어리를 풀 생각이 없다. 사신으로 간 이 천하의 간신 놈은 어이없어 하지만, 최명길은 천근만근 하는 과제 하나를 어깨에 더 얹은 듯 표정이 무겁기 짝이 없다.
그런 조선 백성의 이탈을 막고자 하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애민정신은 누구 하나 다른 바가 없었다. 청에 대항하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 이 둘은 의견이 서로 사맛디 아니 한다고 하여 누구 하나 배척하거나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는 경우가 없었다. 부딪히는 속에서도 이 둘은 서로의 말을 존중하며 이해했고 결과적으로 조선이 더 나은 길로 나아가기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았다.
불과 물이 맞부딪히는 양상으로 김상헌과 최명길의 대립을 중심에 놓고 있으면서도 <남한산성>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이 둘이 등장하는 장면과는 관계가 없다. 인조가 치욕스럽게 청의 황제 아래에서 무릎을 꿇은 이후의 시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김상헌의 신뢰를 얻어 근왕병을 모으기 위한 격서를 전달하는 중책을 맡은 대장장이 출신의 서날쇠(고수)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결말부다. 조선이 청을 섬기는 나라가 되었거나 말거나 서날쇠는 불에 달군 쇠붙이를 사정없이 망치로 두드리며 대장장이의 본업에 열중한다.
역사는 그런 장삼이사의 일상이 모이고 모여 이뤄진 상태다. 이는 현재진행형이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성질이 있다. 그러니까, 과거는 현재의 해답이면서 미래를 비추는 거울이다. 특정 역사는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사적 상황은 반복되기 마련이다. 김훈 작가가 <남한산성>의 영화화를 두고 한 말이 인상적이라 여기에 남긴다. “주화와 척화에 대한 논쟁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 후에 역사를 역동적으로 전개해 나가는 힘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남한산성>이 다루는 나라의 운명은 과거의 것인가, 현재의 것인가, 아니면 미래의 것인가. 중요한 건 역사는 결코 어딘가에 갇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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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해 글을 쓰고 말을 한다. 요즘에는 동생 허남준이 거기에 대해 그림도 그려준다. 영화를 영화에만 머물게 하지 않으려고 다양한 시선으로 접근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