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신예희의 프리랜서 생존기
프리랜서의 소심함에 대하여
거울 앞에서 묻는다. 너 대체 몇 살이냐.
이럴 때, 나는 글을 쓴다. 워드 프로그램의 새 문서 파일을 열고, 허공에 하소연하듯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쓴다. 와, 나 미치겠네. 이거 어떡해? 잘할 수 있을까? 처음엔 두서없지만, 조금씩 정리가 된다. (2017.09.05)
누가 뭐래도 나는 나의 길을 간다!
라고 당당하게 외치고 싶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 인생 혼자야,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사는 거야, 라고 호기롭게 말하면서도 속으론 꽤나 남의 눈치를 본다. 사랑받고 싶어서, 미움받기 싫어서, 잘 하고 있다 인정받고 싶어서.
연차가 쌓이는 사이 눈도 한껏 높아졌다. 그동안 어디서 좋다는 건 잔뜩 봐가지고, 이젠 뭐가 멋지고 근사한 것인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걸 만들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 내 안에 뭔가 괜찮은 게 있긴 한데 손이 따라주지 않는다. 와, 미치고 팔짝 뛰겠네! 아예 아무것도 모르면 무작정 뛰어들겠지만 뭘 좀 알고 나서부턴 용기가 훅훅 줄어든다. 시작도 하기 전에 '이건 안 되겠는데? 답이 안 나오는데?'라는 생각부터 든다. 지금까지 잘한다는 소리 들으면서 일했는데, 내가 그래도 나름 '작가님'인데, 제대로 못하면 뭔 망신이야? 얼마나 쪽팔리겠어? 두렵다. 겁난다. 그냥 하지 말까?
제대로 하고 싶은 욕심은 있는데 완벽하게 해낼 자신이 없으니 불안하다. Fear eats the soul. 불안은 영혼을 냠냠 잠식한다. 천 리 길도 한걸음부터고 시작이 반이라는데, 그놈의 첫발이 떨어지질 않는다. 나 원래 이러지 않았는데 왜지? 일을 할 때는 누구보다 내가 가장 즐거워야 하는데, 내 일이 내 마음에 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즐겁지도 성에 차지도 않는다. 하지만 마감을 피할 수는 없다. 심판의 날이 되면 경건하게 작업물을 넘긴다. 그리고 계속 불안해하고, 계속 민망해한다. 아, 진짜 별로야. 나를 뭐로 볼까? 담당자 고막에 대고 열심히 변명하고 싶다. 사실 제가 다른 일은 진짜 잘하거든요? 이 일만 좀 헤매는 거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 잠시 수학 과외를 받았다. 학교 수업을 알아들어 먹을 수 없으니 과외 수업도 마찬가지. 저에게 수학이란 참으로 벅찬 학문이니 선생님께서 좀 도와주지 않으시렵니까의 자세로 함께 차근차근 공부했으면 좋았겠지만, 중학생이잖습니까. 그보다는 쪽팔림이 훨씬 컸죠. '수학 진짜 싫다고요! 그치만 영어는 잘한다고요!'라며 바보가 아니라는 변명만 열심히 했더랬는데.... 뭐,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하지만 문제는 내 안의 중학생이 여전히 틈만 나면 톡 튀어나온다는 것.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업체 담당자와 머리를 맞대고 함께 상의해야 할 텐데 그저 방어하기 급하다. 열등감을 숨기려는 것이다. 하지만 열등감은 숨길수록 오히려 더 뚜렷이 드러난다.
하여간 이 일을 당장 어떻게 해야 하지?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고 할까? 하지만 이 시점에서 그런 소릴 어떻게 해? 욕을 바가지로 먹을 텐데? 이런 생각이 쌓이기 시작하면 일 담당자와 연락을 취하는 게 부담스러워진다. 내 쪽에선 잔뜩 숨을 죽인 채 연락을 하지 않다가 휴대폰에 담당자 이름이 둥실 떠오르면 한숨을 오백 번쯤 쉬고 나서 전화를 받는다(내 폐활량은 꽤 괜찮은 편이다). 그러다 상황이 점점 묘하게 변한다. 연락이 부담스럽다에서 연락이 싫다로, 연락이 싫다에서 그 사람 싫어로 바뀐다. 이 과정에서 내가 나에게 정당성을 무척 열심히 부여해준다. 요만큼의 죄책감도 없이 담당자를 맘 편히 미워하게 된다. 나는 죄가 없어, 그 사람이 나빠. 아, 진짜 별로야!
여러분, 나이를 먹으면 우아하고 차분해지며 인생을 너그러이 관조하게 된다는 소리는 신화에 가깝습니다. 대학 가면 살 빠진다는 소리와 동급이죠. 관조는 개뿔, 저를 보세요. 이러고 있습니다.
이 찌질하기 그지없는 감정을 어떻게 눈 크게 뜨고 마주하며, 어떻게 다독이고 관리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수준이 드러난다.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성장할 수 있을지, 가능성도 드러난다. 일은 일일 뿐이다. 그 안에 나를 너무 담아버리면 깨질 때마다 눈물 나고 까일 때마다 상처받는다. 내가 그렇게 별로냐며 징징거리게 된다. 내 일이 아니라.
나는 문득, 이게 참으로 민망하고 부끄러운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수학 과외를 받던 중학생 시절보다 더 오래 전에. 단지 인정하기 싫어서 입으로만 쨍알거리고 있었을 뿐이다. 왜냐, 내 탓보다 남 탓이 오천만 배쯤 편하니까. 내 안 구석구석까지 불안함이 잔뜩 배어 있다.
창작자란 없던 것을 짠 하고 만들어내는 직업이라, 일단 짠 하고 난 후엔 곧 조마조마해진다. 내가 만든 것에 완전한 확신을 하고 싶지만, 좀체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니 타인의 인정은 물론, 응원과 격려까지 바라게 되는 것이다. 불안하게, 외롭게 작업한 시간을 감정적으로 보상받고 싶어서겠지. 말하자면, 내 멋에 겨운 글을 블로그에 써 놓고선 목을 쭉 빼고 댓글이 달리기를 기다리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리고 이왕이면 호의적인 댓글만 가득하기를 바란다. 거울을 보며 너 대체 몇 살이냐 묻고 싶을 정도로 유치하구만.
그것밖에 안 되는 인간인지라, 일에 대한 비판과 지적은 종종 따끔따끔을 넘어 쿡쿡 쑤시는 고통으로 다가온다. 일을 의뢰한 곳(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돈을 주는 곳)에서 피드백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이 모양이다. 혼자 입 꾹 다물고 일하는 사이 경주마처럼 잔뜩 좁아진 시야를 넓힐 기회인데도 이 모양이다. 귀 기울여 듣고 유효한 조언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한데도 이 모양이다.
문제는 이거다. 일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곧 나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는 것. 그래서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잔뜩 방어부터 하게 된다는 것. 생산적인 논의 대신 울컥, 화끈, 민망해져버린다. 시간이 부족해서요, 이런 작업은 처음이라서요, 저도 한다고 한 건데요, 라며 변명부터 시작한다. 다시 한번 거울 앞에서 묻는다. 너 대체 몇 살이냐.
고칠 것은 고치면 된다. 아무래도 아니다 싶으면 일을 그만두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 대신 '앗, 이 사람 방금 정색했어. 인상 썼어. 나를 싫어하나 봐!'라고 생각한다. 때론 카톡 메시지를 주고받다가도 동공이 흔들린다. 이모티콘을 쓰지 않았어, 화가 났나 봐. 문장 끝에 마침표를 찍었어, 열 받았나 봐. 문장이 너무 짧아, 역시 날 싫어해. 그래서 내가 한 작업도 싫은가 봐. 아아... 이쯤 되면 망상인데....
이럴 때, 나는 글을 쓴다. 워드 프로그램의 새 문서 파일을 열고, 허공에 하소연하듯 생각나는 대로 아무렇게나 쓴다. 와, 나 미치겠네. 이거 어떡해? 잘할 수 있을까? 처음엔 두서없지만, 조금씩 정리가 된다. 이건 기고 저건 아니라며 마음을 정할 수 있게 된다. 줌파 라히리(Jhumpa Lahiri)는 책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In Altre Parole에서 이렇게 썼다. '나를 자극한 것, 날 혼란에 빠뜨리고 불안하게 하는 것, 간단히 말해 나를 반응하게 만드는 모든 것을 이해하고 싶을 때 그걸 말로 표현해야 한다. 글쓰기는 삶을 흡수하고 정리하는 내 유일한 방법이다.' 그래, 정말로 그렇다.
일단 정리하고, 마음을 다잡고, 담당자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자. 욕 먹을 건 먹어야지. 그래 봤자 욕이 배 뚫고 들어오진 않는걸.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