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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의 재능기부 대응책에 대하여

모두가 제값을 받으며 즐겁게 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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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의 진심이 작가님께 닿을 거라고 믿어요’라는 추상적인 소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정식으로 의뢰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2017.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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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내내 열정페이로 고통받았다면 30대부터는 슬슬 재능기부를 강요당한다. 나는 지금 ‘강요’라는 표현을 썼다. 말로는 아니라지만, 좋은 일을 함께하자는 권유라지만, 분명히 어딘가에서 강요의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긴다. 안 해주면 너 나쁜 사람! 이렇게 쾅쾅 못을 박는 소리도 들린다.

 

물론, 재능기부를 원하는 모든 단체가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지금부터 잘근잘근 씹으려는 건 앞뒤 맥락 없이 다짜고짜 맡겨놓은 것을 내놓으라는 듯 손을 내미는 단체다. 그 전에 어떤 식으로든 교류가 있었다면 보리싹 밀싹 쭉쭉 올라오듯 맥락도 생길 테지만, 그게 아니니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체 누구신데요. 그쪽 소개가 너무 부족하지 않습니까.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케이블 TV를 보다 기부금을 요청하는 다양한 단체의 광고를 갑작스레 마주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이런 유의 광고를 좋아하지 않는다. 배경에 한껏 애잔한 음악을 깐 시각적으로 불편한 영상, 여기에 아련한 목소리의 성우 또는 유명 연예인의 나레이션은 필수다. 당신이 당장 입금하지 않으면 이 아이의 생명은 보장할 수 없다며 난데없이 사람을 냉혈한으로 매도한다.

 

이런 광고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해당 단체의 재무제표다. 그동안 어떤 성과를 거두었는지 객관적으로 나열하는 것도 중요하겠다. 특정 종교와 관련이 있는 단체인지, 정치색은 없는지 등도 공개해야 한다. 한마디로 ‘시청자 여러분께 기부를 요청합니다. 그러면 우리 단체가 최선을 다해 그 돈을 알차게 사용해 보람을 느끼게 해드리겠습니다’라고 어느 정도는 투명하게 나와야 한다 이거죠. 지금은, 자동차 창문으로 치면 연예인 밴 수준으로 선팅한 거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맥락 없는 재능기부 요청자(단체)에게 내가 원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저희의 진심이 작가님께 닿을 거라고 믿어요’라는 추상적인 소리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정식으로 의뢰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어떤 단체이며 나에게 어떤 일을 원하는지, 그것을 어떤 식으로 활용할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때, ‘저희는 의뢰서 같은 게 없는데요’라며 주먹구구임을 살포시 드러내는 곳도 꽤 많다. 이 경우엔 내 쪽에서 의뢰서 양식을 보낸다. 구글에서 ‘의뢰서’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참으로 다양한 상황에 해당하는 문서의 샘플이 줄줄 나오는데, 그중 적당해 보이는 것을 골라 약간의 수정을 거친 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문서지만 의뢰서엔 생각보다 다양한 항목이 있어, 각각 뭐라고 써넣어야 할지 잠시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 생각이라는 걸 하게 되는 것이다.

 

요식 행위란 지루하고 비합리적인 거로 생각하기 쉽지만, 최소한의 형식을 갖추는 방법이기도 하다. 보호막이 되어주기도 한다. 의뢰서씩이나 써야 하는 일인 줄 몰랐다며 말끝을 흐리는 단체도 있다. 그 흔한 신용카드나 체크카드 한 장 만드는 데도 복잡한 서류에 여러 차례 서명해야 하고, 한동안 기다려야 한다. 창작자의 자산을 무료로 내어달라 요청하면서 이 정도의 형식을 갖출 마음이 없다면 곤란하다.

 

좋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 어떤 단체의 재능기부 요청에 응해야 하는가? 이 문장과 참 비슷하게 느껴지는 질문이 있다. ‘연애를 시작했는데, 언제 섹스를 해야 할까요?’라는 것이다. 사귀기로 한 날 곧장 방 잡고 뿜빰빰? 일주일 된 기념으로 뿜빰빰? 에이, 한 달은 끌다가 뿜빰빰? 여기서 중요한 건, ‘언제’를 정확히 몇 날 며칠이라고 해석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섹스는, 내가 하고 싶을 때 해야 한다. 내 욕구를 파악하고 오케이, 접수한 후 상대방의 의향을 타진해야 한다. 내 욕구가 크다면, 최선을 다해 상대방 역시 섹스를 하고 싶게끔 유도한 후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되겠습니다.

 

이걸 뒤집어서 생각하면, 상대방이 다짜고짜 덤빈다고 해서 무조건 섹스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요청에 응하지 않으면 이 작자가 삐질 것 같고, 뒤탈도 있을 것 같으니 눈 딱 감고 하는 건 좋은 관계가 아니다. 상호 협의가 우선 되어야 한다. 기대 수준의 인프라를 갖춘 공간이 있는가, 내 몸은 적절한 준비가 되었는가, 안전과 위생 문제는 어떤 방식으로 해결할 것인가 등 따지고 걸러야 할 것들이 있다. 그 결과, 나도 좋다면 하는 거죠. 재능기부 역시 내가 하고 싶은 곳에,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으로, 상호 협의로 이루어져야 한다.

 

때론 거절이 어려워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기도 한다. 거절이 어려운 이유는, 왠지 그 사람 전체를 부정하고 거부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고작 제안 하나를 거절하는 것인데도 그렇다. 이것은 어쩌면 나 역시 거절당하는 것을 그만큼이나 두려워한다는 이야기겠다. 거절은 할 수도 있고, 당할 수도 있다. 그저, 아닌 건 아닌 것이다. 돈 문제일 수도 있고, 스케줄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는 무궁무진하다. 거절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하다 보면 요령과 맷집이 생긴다.

 

그리고, 해당 단체가 요청하는 재능기부란 결국 무엇인지 분별할 능력을 키워야 한다. 재능이라는 쑥스럽고도 뿌듯한 단어, 기부라는 따뜻하고 아름다운 단어에 가려진 것이 무엇인지 파악해야 한다. 좋은 의도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멋대로 왜곡될 수 있다. 돈을 받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은 자칫 두고두고 애매한, 위험한 근거를 남기는 결과를 만들기도 한다. 내가 좋은 마음으로 한 재능기부로 인해, 다른 창작자들이 엉뚱한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누구누구 씨도 공짜로 (혹은 아주 저렴한 금액으로) 우리 업체 일을 했는데, 당신이 돈을 받겠다고요?’라는 식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으론 조금 씁쓸하다. 내깟게 뭐라고, 뭐 대단한 인물이라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걸까.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지. 하지만 경력을 쌓은 만큼, 나이를 먹은 만큼, 분명 명확한 태도를 보일 필요가 있기에 어렵게 입을 뗀다. 옳지 않은 구조는 바로잡아야 한다. 인프라가 부족하다면 탄탄하고 유연하게 쌓아야 한다. 나는 그런 일에 힘을 보태야 한다. 모두가 제값을 받으며 즐겁게 일해야 한다. 적어도 생태계를 교란하는 뉴트리아는 되지 말자고 다짐한다.

 

아... 상상해보니 진짜 싫다... 뉴트리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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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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