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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와 나이 – 나이 먹으며 배운 것에 대하여

나는 나. 어디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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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조금씩 잔잔하고 평온해진다. 그러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긴다. 자신을 신뢰하는 만큼 선택에도 확신이 생긴다(그렇다, 지난 몇 개월간 국민 프로듀서로서 아주 열심히 일했다). (2017.08.08)

 

신예희의-프리랜서-생존기_8회-그림.jpg

 

 

30대는 20대와 한 세트로 묶이고 싶어 한다. 어떻게든 2030이고 싶은 것이다. 3040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정색한다. 한편 40대는 30대에 슬쩍 한 발을 얹고 싶어 한다. 4050이라니, 천인공노할 소리다. 그놈의 나이가 뭐길래 이러지?

 

현재 스코어 40대 초반이다. 일 관계로 만나게 되는 사람의 나이가 점점 어려진다. 굳이 묻지 않아도 느낄 수 있다. 한때는 미팅을 앞두곤 언제나 잔뜩 긴장했다. 누가 나오든 마냥 우러러 보였다. 하지만 이제는 이 사람, 몇 살이나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물론 실제로 물어보진 않습니다). 지금 내 이야기를 알아듣고 있는 걸까? 내 이야기 속 장소를 같이 걷고 그 노래를 같이 들었던 적 있을까? 혹시 그저 예의상 고개를 끄덕여주는 건 아닐까? 나 혼자만 즐거운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 그런 생각이 들면 한참 신나게 대화를 나누다가도 중간중간 멈칫한다.

 

미팅이 끝난 후에도 멈칫은 계속된다. 지금 진행하고 있는 작업물에 이 말장난을 넣어도 될까? 언제적 개그냐는 소리를 듣게 되는 건 아닐까? 구려 보이면 어떡하지? 굳이 찾아 듣지 않아도 최신곡이 저절로 귀에 쏙쏙 들어와 입으로 줄줄 흘러나오던 시절, 어떤 스타일의 옷과 신발이 제일 잘 나가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던 시절은 갔다. 이제는 노력이 필요한데, 노력도 피곤하다. 엑소 멤버는 알지만, 방탄소년단은 모른다. 미안합니다. 하지만 엑소들의 수많은 얼굴과 이름을 제대로 연결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렵사리 익힌 얼굴이 탈퇴할 때는 좌절했다. 그 와중에 조규찬 1집, 이소라 1집을 들으면 여기가 바로 내 누울 자리인가 싶게 편안하다. 참고로 각각 1993년, 1995년에 발매되었습니다요.

 

인터넷 커뮤니티엔 심심찮게 옷이며 가방, 외모에 대한 질문이 올라온다. 30대 후반인데 후드티 입어도 될까요? 40대 중반인데 긴 머리는 주책일까요? 178cm에 75kg인데 뚱뚱한 건가요? 40대인데 이런 백팩 메도 되나요? 다들 마음의 나이와 몸의 나이 사이에서 동공지진을 겪는 것이다. ‘무슨 이런 질문을 해,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도 때로는 나 역시 흔들린다. 즐겨찾기 해둔 쇼핑몰엔 좀 과장해서 딸뻘 모델들이 가득하다. 스카잔 점퍼는 나한테 좀 그럴까? 핫팬츠는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려나? 하지만 아무리 그렇대도 미시 쇼핑몰은 죽어도 싫다. 딜레마다. 어쨌든 간에 나는 나이를 먹었다. 피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고작 백화점 좀 돌아다녔다고 허리와 무릎이 쑤신다. 의자 없나, 의자? 속으로 외치며 앉을 데를 찾는다. 오 마이 추간판! 외출에서 돌아와 브래지어 후크를 풀 때면 인생의 무게를 내려놓는 기분마저 든다. 옷을 고를 땐 일단 위아래로 대각선으로 쭉쭉 잡아당겨 본다. 스판기가 없으면 입지 않는다. 각 잡힌 빳빳한 정장에 하이힐, 클러치백을 고집하던 시절은 갔다. 스판이 최고다. 조금만 추우면 화가 바짝바짝 난다. 겨울 옷을 고르는 기준은 단연 기모다. 스판과 기모를 개발하신 분을 찾아 노벨 평화상을 안겨 드리고 싶다. 일 좀 하려니 눈이 시큰시큰 시려, 결국 몇 개월 전 인공눈물이라는 신묘한 영약을 영접했다. 그리고 뭐니 뭐니 해도 흰머리. 털이 나는 곳이라면 위아래 가리지 않고 한 가닥 두 가닥 고개를 내민다. 마음 같아선 싹 뽑아버리고 싶지만, 꾹 참는다. 숱이 줄면 나만 손해다. 쓰다 보니 되게 서럽네.

 

그런데 희한하게도, 30대나 20대로 돌아가겠냐는 질문엔 ‘어휴 됐어요, 완전 사양할래요’라고 대답하게 된다. 한 번 겪은 것으로 족하다. 다시 잘해볼 생각일랑은 요만큼도, 정말 요마아안큼도 없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 맨땅에 냅다 헤딩하는 기분으로 배운 것이다. 이젠 그걸 즐겁게 써먹을 때다.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힘든 일, 불행한 일은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줄 알았다. 그야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니까 그렇죠. 주인공은 원래 그런 것 다 피해 가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모든 일은 일어날 수 있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 당연한 사실을 몸으로 직접 겪으며 하나씩 배웠다. 그렇다. 이 세계는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우리는 피임을 해야 하고, 저축을 해야 하며, 건강검진을 받아야 한다. 무단횡단은, 불법 유턴은, 음주운전은 모두 안 될 말이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배웠다. 긴가민가, 확신이 부족한 시기엔 남의 시선에 크게 영향받는다. 이거 괜찮아? 어때? 사지 말까? 별로야? 티셔츠 한 장을 살 때도 동행인이 필요하다. 확인을 받아야 안심한다. 그러다 30대 초중반쯤 드디어 깨달았다. 아니, 내 코트를 고르는데 얘나 쟤나 걔의 의견이 대체 뭔 필요가 있어? 그때부터는 혼자 움직인다. 입을 꾹 다물고 내 마음의 소리에 집중한다. 걸려 있는 옷들을 레이저 같은 눈빛으로 쭈욱 스캔하다 뚝 멈춘다. 그래, 네가 내 코트구나. 이리 와서 언니 품에 안기렴.

 

40대의 나는 이제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알고 뭘 싫어하는지도 안다. 무엇이 나를 괴롭히는지도 알고 내 멘탈과 내 시간이 귀하다는 것도 안다. 아닌 건 아니구나, 하며 냉정하게 돌아서는 법을 안다. 핏대 세워 무엇 하리, 그 시간에 맛있는 거나 한입 더 먹지. 이런 변화는 때론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오래된 관계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 걸 이제 안다. 그렇게 조금씩 잔잔하고 평온해진다. 그러다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 순간을 마음껏 즐긴다. 자신을 신뢰하는 만큼 선택에도 확신이 생긴다(그렇다, 지난 몇 개월간 국민 프로듀서로서 아주 열심히 일했다).

 

어느 날은 나이 든 내가 서럽고, 어느 날은 나이 든 내가 좋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고민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갈팡질팡, 질풍노도다. 새로 출시된 립스틱에 혹하고, 멋있는 사람에 설렌다. 카페의 신메뉴는 꼭 먹어봐야 직성이 풀린다. 나는 나. 어디 가지 않는다.

 

40대의 창작자는 불안해질 때면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나이를 먹는 만큼 독자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고, 그러니 나는 오늘의 내 이야기를 하면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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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신예희(작가)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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