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신예희의 프리랜서 생존기
프리랜서의 소비 – 돈지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은 하지 말자
얼마간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엔 망설이지 말고 돈을 바르자. 자신에게 잘해주자. 돈으로도 안 되는 일, 그게 진짜 큰일이다. 그런 일은 언젠가 벌어지기 마련이니, 그때를 위해 평소에 돈으로 체력을 비축해놓자. (2017.08.02)
세상에는 아름다운 지랄이 있다. 하면 할수록 좋은 지랄, 돈지랄이다. 얼마든지 시켜주시라. 아주 잘할 자신이 있다. 내 안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숨어 있다. 그저 돈이 없으니 지랄밖에 못하는 것이다.
돈은 중요하다. 돈은 소중하다. 돈은 생활을 쾌적하게 만들어준다. 삶의 질을 높여주고 여유를 선물한다. 버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쓰는 건 금방이다. 몸무게 1kg을 빼는 데는 한 달의 시간이 걸리지만 1kg을 찌우는 데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것과도 같다. 그러고 보니 감량은 고통스럽지만, 증량은 매우 행복하다는 것도 비슷한 점이다(치킨을 상상해봅시다).
하지만 막상 ‘돈이 다가 아니다’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으로 그럼요, 소리를 했다. 왜냐, 그렇게 대답해야만 뭔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보일 거라 기대했기 때문이고, 속물이란 비난을 듣지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점잖은 사람, 배운 사람은 그래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말이죠, 제가 어느 날 딱히 할 일이 없길래 커피 한잔 만들어 놓고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돈으로 안 되는 게 뭔지, 그런 게 있긴 한지 따져봤다 이거예요. 그랬더니, 어머나? 별로 없는데? 물질적인 거야 당연히 이거 얼마예요, 물어본 다음 여깄습니다 하고 돈을 내거나 카드를 북 긁으면 손에 넣을 수 있으니 패스한다. 그렇다면 정신적인 부분은? 사랑은 어떨까? 사랑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들 하는데, 그거 정말일까?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렇게 좋더냐고 이수일이 심순애를 향해 울부짖었다지만, 그전에 이수일이 평소 심순애를 어떻게 대했는지 궁금해진다. 그는 돈만 없는 걸까, 아니면 돈도 없는 걸까? 혹시 김중배는 돈까지 있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어쨌든 깨져버린 사랑을 돈으로 다시 이어 붙일 수 있느냐는 문제에 대해서라면, 그야 물론 1대 1로 등가교환을 하는 건 어려울 수도 있다고 답하겠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를 찼는데 기분이 참 찜찜하면서 괜히 미안하고 그럴 때, 혹은 내가 차여서 이보다 더 엿 같을 수 없을 때 말이에요. 그럴 때 돈이 있으면 기분 전환 삼아 머리 모양도 쌈빡하게 바꿀 수 있고,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신상으로 쫙 뺄 수도 있고,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것도 먹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뿐인가요, 기분도 안 좋은데 여행이나 가자며 짐을 챙겨 어디로든 갈 수 있습니다. 혼자 가기 싫다면 둘이든 셋이든 얼마든지 친구를 부를 수도 있죠. 야, 내가 쏠께! 오늘 확 놀자!
우정은? 존경은? 사랑만큼이나 고귀하게 느껴지는 요런 것들을 돈으로 살 생각을 하다니 불경스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나의 친절과 여유, 나의 미소와 우아함은 모두 계좌가 빵빵할 때 가장 자연스럽게 좔좔 흘러넘친다. 돈이 간당간당할 땐 친구 모임도 왠지 불편하다. 일단 오긴 왔지만 안절부절못한다. 누구 한 명이 쏘면 참 좋겠지만, 당연히 1/n이겠지? 뭐 하나 더 시키고 싶지만 참아야겠지? 누가 사준다고 해도 마냥 좋을 수 없다. 마음이란 게 참 그렇다. 이런 생각들이 머리에 가득한 채로 뭔 놈의 즐거운 대화? 웃어도 웃는 게 아니다. 모르는 사이, 얼굴에 티가 확확 날 것이다.
공부는 어떨까? 창작은 어떨까? 돈이 있다고 해서 모든 걸 이룰 수는 없지만, 일단 시도해볼 수는 있다. 학원에 다니든 학교에 다니든 개인 레슨을 받든, 뭘 하든 돈이다. 해본 다음, 야 이거 재미있네, 딱 내 스타일이네! 라며 더 깊이 파 들어가려면 또 돈이다. 해보긴 했는데 나랑은 잘 맞지 않네, 다른 걸 해봐야겠어 할 때도 돈이다. 제2의 기회, 제3의 기회를 만들어 주는 건 결국 돈이다. 실패할 여유가 생긴다. 그놈의 가성비를 따지지 않아도 된다. 지마켓에서든 옥션에서든 최저가 정렬부터 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헐, 돈 진짜 좋은데?
하지만 만약 나의 어린 조카(미취학 아동입니다)가 “이모 있잖아요, 돈이면 다 되는 거예요?”라고 묻는다면… 우와, 그럼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당연하지, 돈이 짱이야!”라고 온 마음을 담아 외쳤다가는 뒤에서 애 엄마(나의 언니)가 눈을 부라리며 손톱을 드릉드릉 할 것이다. 머리채를 잡힐 수도 있다. 그러니 “착한 조카야, 그렇지 않아. 세상엔 더 중요한 것들이 많단다”라고 대답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나 어릴 적 어른들이 어째서 돈이 다가 아니라는 말을 했는지 알 것도 같다.
그나저나 이 즐거운 돈 쓰기에 왜 ‘지랄’이라는 비속어가 찰싹 달라붙은 것일까? 단순히 돈을 아껴아껴, 모아모아 부자가 되라는 의미만은 아닐 것이다. 돈을 쓰는 것은 지랄, 즉 천한 행위이니 대신 몸으로 때우라는 것이겠지. 가사 노동 전문가에게 적절한 비용을 지급하고 가사 업무를 의뢰하는 대신 직접 몸뚱이를 갈아 넣으라는 것이겠지. 커피 전문점에서 몇 천 원짜리 커피를 테이크아웃 하는 대신 자판기 커피를 뽑아야 개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겠지. 네, 뭐라고요? 아예 집에서 타 갖고 오면 더 좋다고요? 이게 말이야 말갈족이야?
여러분, 우리 돈지랄이란 소리에 주눅 들지 말자. 얼마간의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엔 망설이지 말고 돈을 바르자. 자신에게 잘해주자. 돈으로도 안 되는 일, 그게 진짜 큰일이다. 그런 일은 언젠가 벌어지기 마련이니, 그때를 위해 평소에 돈으로 체력을 비축해놓자.
하지 않아도 될 고생은 하지 말자.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일을 시키는 쪽에서나 하는 소리다. 대꾸할 가치도 없다.
홍익대학교 산업디자인학과를 졸업한 후 현재까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는 프리랜서의 길을 걷고 있다. 재미난 일, 궁금한 일만 골라서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30대 후반의 나이가 되어버렸다는 그녀는 자유로운 여행을 즐기는 탓에 혼자서 시각과 후각의 기쁨을 찾아 주구장창 배낭여행만 하는 중이다. 큼직한 카메라와 편한 신발, 그리고 무엇보다 튼튼한 위장 하나 믿고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40회에 가까운 외국여행을 했다. 여전히 구순기에서 벗어나지 못해 처음 보는 음식, 궁금한 음식은 일단 입에 넣고 보는 습성을 지녔다. ISO 9000 인증급의 방향치로서 동병상련자들을 모아 월방연(월드 방향치 연합회)을 설립하는 것이 소박한 꿈.
저서로는 『까칠한 여우들이 찾아낸 맛집 54』(조선일보 생활미디어), 『결혼 전에 하지 않으면 정말 억울한 서른여섯 가지』(이가서), 『2만원으로 와인 즐기기』(조선일보 생활미디어), 『배고프면 화나는 그녀, 여행을 떠나다』(시그마북스), 『여행자의 밥』(이덴슬리벨)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