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마포 김 사장의 야매 책방
제목이 없는 거짓말 같은 책
마음산책, 북스피어, 은행나무 출판사의 도전
판매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얘기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무엇보다 이런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와 독자가 함께 뭔가 재미난 작당을 한다’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굳이 밝혀두고 싶다. 그러니 모쪼록 즐겨주시길.
마음산책 편집자, 은행나무 편집자와는 지금까지 몇 차례인가 함께 여행을 가곤 했다. 공식적인 임무가 있었던 건 아니고 종종 어울리다가 “이번 연휴에 시간 어때” 하는 얘기가 나오면 후다닥 짐을 싸서 다녀온다. 처음 시작은 재작년, 그러니까 2015년 무렵이었다. 책을 만들어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해외에 나가면 누가 먼저 제안하지 않아도 들리는 곳은 뻔하다. 서점이다. ‘이 나라에서는 책을 어떻게 만들고 어떤 책들이 팔리는가’ 하는 것은 늘 궁금한 대목이니까. 그래서 우리끼리는 이 모임을 ‘떼거리 서점 유랑단’이라고 부른다.
작년 가을 무렵에는 일본에 다녀왔다. 마침 가격이 저렴한 비행기 티켓이 눈에 띄었고 그 시기 멤버들의 일정도 맞았다. 그때 교토의 어느 서점에 들렀다가 흥미로운 광경을 목도했다. 매대 하나에 같은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는데 책 표지에 제목 대신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이 책을 어떻게 추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재미있다’, ‘매력적이다’라고 느끼게 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책 제목을 숨기고 팔기로 했습니다.”
제목도, 저자 이름도, 흔히 말하는 디자인도, 아무것도 없었다. 오로지 믿고 사주었으면 좋겠다는 권유뿐이었다. 이 책(혹은 프로젝트)의 이름은 ‘문고 X’.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것은 그해 일본 출판계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가 된다. 물론 매대에서 책을 마주할 때만 해도 ‘문고 X’가 뭔지, 누가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다만 직감적으로 ‘아아, 정말 재미있는 발상이구나’ 하고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 않은가. 세일즈 포인트인 제목과 저자 이름을 봉인한 책이라니!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을까.
저간의 사정을 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일본에서 워낙 화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문고X’는 책 전체를 전면 띠지로 가리고 랩핑하여 책에 대해 알 수 없게 만든 채로 판매하는 문고본이다. 내용을 추측할 수 있는 힌트라고는 (1) 500페이지가 넘는다는 것, (2) 가격이 810엔이라는 점, (3) 띠지에 쓰인 소개 문구뿐이었다. 기획자는 ‘사와야 서점’ 페잔점의 직원인 나가에 다카시 씨였다. 그는 무크지 <이 문고본이 대단하다 2016>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한 바 있다.
“2016년 7월 21일, 맨 처음에 60권을 매대에 진열했다. 그 모습을 찍은 사진을 ‘사와야 서점 올 여름 최대의 도전’이라고 이름 붙여 트위터에 올렸다. 그렇다, 이건 나에게 ‘도전’이었다. 솔직히 말해 팔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60권을 매대에 진열할 때 나는 ‘시간이 걸려도 좋으니 30권이 팔릴 때까지는 매대에서 치우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다. 그 정도로 자신이 없었다. 표지도 제목도 알 수 없는데다 문고본치고는 810엔이나 하는 살짝 비싼 책이다. 이 60권이, 설마 5일 만에 매진될 거라고는, 게다가 똑같은 형태로 전국에 퍼질 거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 책은 현재 ‘문고X’라 불리고 있다.”
<아사히신문>과 <모리오카 경제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모리오카 역 건물 안에 자리 잡은 사와야 서점의 페잔점에서 이 책의 판매는 한 달에 두세 권 정도였다고 한다. 그런데 ‘문고X’로 이름 붙이자 불과 일주일 만에 60부가 팔렸다. 이에 페잔점의 점장인 다구치 씨는 잘 알고 지내는 다른 서점들에게도 이 같은 상황을 알렸고 곧 전국 650개 이상의 서점들로 ‘문고X’ 기획이 퍼져 나간다. 이 대목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점은 이 책을 구입한 독자들의 반응이었다.
“표지가 보이는 상태였다면 절대 사지 않았을 테지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이 책을 사서 읽게 되어 정말로 좋았다. 접할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소감이 많았다. 게다가 독자들은 ‘부디 SNS에 제목을 공개하지 말아달라’는 문고X 기획자의 당부를 흘려듣지 않았다. 실제로 ‘문고X’가 선을 보이기 시작한 2016년 7월 21일부터 해당 서점에서 공식적으로 이 책의 제목을 공개하겠다고 선언한 12월 9일까지 SNS에서는 대부분의 독자들이 책의 제목을 공개하지 않았다. 책을 구입한 독자가 “나는 ‘문고X’뿐만 아니라 ‘문고X’ 기획의 취지까지 함께 구매했다”는 내용의 포스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문고X’는 전국적으로 11만 부가 팔렸다.
한편 ‘떼거리 서점 유랑단’과 함께 올 1월에는 영국에 다녀왔다. 이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는 다소 엉뚱한데다가 영국만 다녀온 게 아니라 벨기에, 네덜란드, 독일에도 10여 일 동안 머물렀지만 이 과정을 전부 설명하기는 곤란하니까 그냥 ‘함께 유럽의 서점에 다녀왔다’는 정도로 해두자. 옥스퍼드의 ‘블랙 웰’ 서점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우리는 매대 한켠에서 이런 문구와 마주할 수 있었다. “A NOVEL SURPRISE!” 거기에는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등 각 나라에서 출간된 소설 중 블랙 웰 서점의 스태프들이 엄선한 책이 ‘제목과 저자의 이름이 가려진 채 진열’되어 있었다. 알 수 있는 것은 출간 국가와 가격뿐이었다.
‘문고X’ 때와 마찬가지로 조사해 본 결과, 블랙 웰 서점의 “A NOVEL SURPRISE!” 이벤트는 ‘문고X’보다 훨씬 더 전부터 시행되었으며 영국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서점들이 “Blind Date with a Book”이라는 이름으로 각자 머리를 맞대고 자사의 콘셉트를 부각시키며 판매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테면, 봉인된 포장지에 (1) 소설의 첫 문장만 적어둔다든가 (2) ‘기괴함’, ‘유머러스함’ 같은 키워드만 인쇄해 놓는다든가 (3) 발행한 나라의 이름만 적어놓는 식으로 독자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었다. 이들 이벤트에는 ‘좀 더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에게 다가가고 싶다’는 노력 같은 것이 담겨 있었다.
‘문고X’와 ‘서프라이즈 노벨’을 목도한 우리는 ‘만약 이런 이벤트를 출판사에서 진행한다면 어떤 형태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한국에서 이런 이벤트를 시행한다면 독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마침내, 어떤 결과가 초래되든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는, 당연하기 그지없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하여 마음산책, 은행나무, 북스피어의 2017년 라인업 가운데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싶은 책’을 선택하여 동시에 출간해 보자는 데에 이르게 된 것이다.
판매에 전혀 의미를 두지 않았다고 얘기하면 거짓말이겠지만, 무엇보다 이런 이벤트를 통해 ‘출판사와 독자가 함께 뭔가 재미난 작당을 한다’는 마음이 더 크다는 것을 굳이 밝혀두고 싶다. 그러니 모쪼록 즐겨주시길.
미남이고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책을 만든다. 가끔 이런저런 매체에 잡문을 기고하거나 라디오에서 책을 소개하거나 출판 강의를 해서 번 돈으로 겨우 먹고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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