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조영주의 성공한 덕후
거짓말 같은 진짜가 있다
『진짜 거짓말』 속 주인공 진호처럼
치기 어린 생각 끝에 눈물 찍 콧물 훌쩍이며 소리도 질렀다. “두고 봐, 내 글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하게 해주겠어!”
임지형 작가와 남편 김매니저, 그리고 김매니저가 그린 그림
옛날 옛적에까지는 아니고, 21세기 전라도 광주에 한 여자와 남자가 살았다. 두 남녀는 흔하디 흔한 소개팅으로 만났다. 남자는 여섯 살 연상의 여자에게 끌리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 버스에서 여자가 선물로 준 책을 읽고는 마음이 동했다. “아, 이 여자다”가 아니라 “아, 이 책이다”라는 느낌이었달까. 그로부터 5년 후인 2017년 3월, 남편은 책의 재출간을 기념해 연고 없는 서울에서 아내를 위한 북콘서트를 개최하였으니, 나는 남자의 감정을 대리체험하고 싶어 문제의 책을 버스에서 읽어보기로 했다.
초등학생 진호네 반에서 거짓말 대회가 열린다. 문제는 진호가 할 거짓말이 없다는 거다. 자기 차례는 다가오는데 대체 뭘 말해야 하나, 한참 고민 끝에 진호는 눈 질끈 감고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기로 한다. 그런데 반 친구들은 진호의 사정에 “진짜 거짓말 같아요!” 소리를 친다. 나도 진짜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자조하는 진호의 중얼거림을 들여다 보자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5년 전 남자처럼 프러포즈를 할 정도로 작가에게 반한 게 아니라, 20년 전 어느 봄날이 떠오른 까닭이었다.
남편이 직접 그린, 만났을 당시 이야기
남들은 공부하느라 정신 없다는 고3의 봄, 대학 백일장 순례를 나섰다. 대학마다 초입부터 펼쳐지는 봄 꽃의 향연에 나는 제사보다 젯밥, 백일장보다 꽃구경을 제창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참가했던 백일장 시간이 웬 호랑말코 탓으로 엿가락처럼 늘어지면서 나의 원대한 꽃놀이 계획이 흐트러지고 말았다. 심사위원 왈, 누군가 작문을 하랬더니 정말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거다. “어디 발칙하게 고등학생이 백일장에 와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적어내나. 리얼리티가 있는 이야기를 써라.” 나는 그 의견에 적극 동의하면서도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 호랑말코가 쓴 작문인 즉, “점쟁이 할아버지가 새벽에 쫄면을 먹다가 급체하여 죽는다, 이후 손 벌릴 데 없어진 손녀는 고등학교에 올라간 후 사는 게 더 고되졌다”는 이야기인데, 그건 내가 적어낸 작문과 꼭 같았다. 이런 우연이 일어나다니.
그런데 30분 넘게 조목조목 문장까지 일일이 예시로 들며 따지는 심사위원의 이야기를 경청하자니 깨달았다. 아, 그 호랑말코가 나였다. 내가 적어낸 일상이 누군가에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처럼 보인 탓으로 꽃놀이가 지체된 것이었다.
하지만 모두 사실이었다. 내 할아버지는 역술인이었고, 정말로 쫄면을 드시다 급체해 돌아가셨다. 살아계실 때엔 용돈깨나 주셨지만 돌아가신 후로는 손 빌릴 데가 없어지자 안 그래도 좋지 않던 집안 사정이 더 나빠졌다. 새벽이면 집 앞에 빚쟁이가 찾아왔다. 엄마는 늘 돈을 꾸러 다녔다. 가스가 끊겼다. 문제의 백일장에 나가게 된 경위 역시 어디까지나 교내 문학상을 받아 학비를 면제받았으니 그만큼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마음가짐에서 비롯된 결과였다.
나는 이런 일상을 공개적으로 부정당했다. 리얼리티가 중요하다는 건 이해하겠으나 그래도 억울했다. 그게 내겐 현실이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도, 우리 집이 이렇듯 힘든 것도 모두 리얼리티가 없어도 진짜라고 말하고 싶었다. 『진짜 거짓말』 속 주인공 진호처럼.
돌아가는 길, 꽃은 폈으나 구경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바로 집에 돌아가 이러저러했다고 울며불며 어린애 난동을 부렸더니 엄마가 말했다. “그런 대단한 사람이 네 글을 그렇게 자세히 보고 진심으로 화를 내다니 널 눈여겨봤다는 뜻이야.” 귀가 얇은 나는 바로 기분이 나아졌다. 치기 어린 생각 끝에 눈물 찍 콧물 훌쩍이며 소리도 질렀다. “두고 봐, 내 글을 보고 진심으로 감탄하게 해주겠어!”
그 때 내 작문을 보고 분기탱천했던 심사위원이 지금 내가 쓴 소설을 본다면 뭐라고 할까. 어른이 되어 조금은 생활이 나아진 나는 어떻게 대답할까.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 날처럼 집에 돌아가서 난동을 부릴까. 알고 싶다. 그러니 신경림 선생님, 시간 나시면 20년 전 꽃피던 그 봄날처럼 제 소설 좀 봐주세요. 이번엔 진짜, 거짓말만 썼어요.
별명은 성덕(성공한 덕후). 소설가보다 만화가 딸내미로 산 세월이 더 길다.
<임지형> 글/<박영란> 그림10,800원(10% + 5%)
작가는 문학을 통해 세상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늘 고민합니다. 때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도 합니다. 작가가 끊임없이 글을 쓰는 이유는 작품을 통해 ‘문제’가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책은 2011년에 나왔던 책의 개정판입니다. 시간이 흘렀지만 변하지 않는 현실이 세월의 무게만큼 담겨 있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