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나 한심한데?
나는 아니다, 그게 진짜 아니다
웃는 건 괜찮아! 그건 직업병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잘못이 분명한데도 인정하지 않는 건 도저히 못 참겠다, 이거다 지금 내 말은!!
지난주에는 대통령이 탄핵됐고 나는 장롱 면허증을 꺼내 운전을 시작했다.
3월 9일 헌재 선고 전날, 나는 처음으로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켜고 혼자 길 찾기를 시도했다. 속도에 대한 두려움은 전혀 없지만, ‘속도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나’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도 그 동안 도로 연수를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때가 됐다고 판단했다.
집에서 차로 35분 거리에 위치한 운전 학원을 목적지로 설정했다. 그리고는 마치 오래 전부터 그렇게 운전을 해온 사람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왼발은 브레이크, 오른발은 액셀러레이터에 두고 출발했다. 무슨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도 아닌데 두 발을 동시에 사용하다 보니 수차례 급정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브레이크 조절이 안 되는 거지, 차암 이상하네...’ 이러면서 꾸역꾸역 가보지만 영 내 맘처럼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다 문득 ‘...어쩌면 나는 운전 연수를 받는 동안 이렇게 두 발을 동시에 사용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드는데 확인하고 보니 역시 나를 의심하는 게 맞았다.
나를 의심해야 되는 순간은 언제나 공포다. 때로는 나 때문에 내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내 친구 해영이는 자기가 쓰던 차를 내게 넘겨주면서 걱정을 많이 했다. 나는 치매 노인과 같이 기억력이 나쁘고, ADHD 성향이 있는 항문기 유아 수준으로 주의력이 부족하다. 잘 기억하고 있는 것들도 갑자기 모든 정보가 지워지고 뒤엉키기 일쑤다. 나이 들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그랬다. 며칠 전엔 야간 택시를 잡는데 어떤 사람이 양해도 구하지 않고 순서 없이 택시를 뺏어 탔다. 나는 순간 “예의 동방 지국!”이라고 소리쳤다. 이태원 한복판에서 택시 순서 뺏겼다고 소리친 나도 참 미치겠는데, 그나마도 틀린 말을 외쳤다. 사실 ‘꿀벌’을 ‘벌꿀’이라고 말하게 되는 뇌구조도 나는 알 것만 같아서 너무 괴롭다. 한 번은 내 지난 녹취록을 듣다가 진심으로 공포를 느꼈는데 “그게 그래서 나는 이게 좀 그러니까 어려운 거고 그렇다고 이걸 그게 참 그러면 그것도 그렇고...” 라고 내가 말하는 것이었다. 남은 인생 존중받으며 살고 싶은데 이미 싹수가 불길하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오른 발만 사용해 겨우 달리기 시작했는데 내비게이션은 끝도 없이 직진을 지시했다. 영문을 모른 채 자유로를 계속 달리다가 파주를 지나고 점점 북한과 가까워지면서... ‘어쩌면 나의 내비게이션이 틀린 것은 아닐까?’ 의심했을 땐 이미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이었다. 당황했는지 갑자기 오른발에 쥐가 나니까 막 무서워져서 화장실에 가고 싶어지는데 뉘엿뉘엿 해는 지기 시작하고 갓길 정차를 못 해서 어둠 속을 계속 달렸다. 드디어 신호 대기에 섰는데 앞차 운전자가 차 밖으로 나오더니 나를 향해 수화를 하며 외치는 것이다. “예의 동방 지국!! 예의 동방 지국!!”이 아니고 “헤드라이트!! 헤드라이트!!!” 맙소사, 헤드라이트를 끈 채로 자유로를 달렸구나... 이러다가 그렇게 될 수도 있었는데 어휴 그러면 끔찍해...
다음날, 대통령은 탄핵됐고 나는 당장 GPS가 고장 난 스마트폰을 버리고 신형을 구입했다.
이틀이 지나서야 대통령은 청와대를 떠났다. 내비게이션은 당연히 최단거리를 알고 있었겠지만 헤드라이트를 켠 차는 광화문을 피해 독립문과 서울역을 지났다. 달리는 차 안에서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저렇게 웃는 얼굴로 사람들과 인사를 나눈 뒤 집에서 혼자가 됐을 때 제일 먼저 뭘 했을까. 그걸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걸 했다면 왜 그걸 했을까. 그게 만일 그래서 그런 거라면 왜 자꾸 그럴까. 아 진짜 왜 꼭 그래야만 했을까. 정말 진짜 내가 아으 진짜 이러면서 실시간 검색을 하다가 나는 그만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거의 백만 원을 지불하고 백업을 마친 신형 스마트폰이 내가 요구한 모델보다 하향급 모델인 것이다.
내가 요즘 참을성도 부족해지고 성질이 많이 더러워졌다. 지금까지는 내 영화가 망해서 이렇게 된 거라고 믿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틀린 것 같다. 이게 다 나라 걱정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나는 다음날 눈 뜨자마자 핸드폰 매장을 다시 찾아갔다. 명명백백하게 그 쪽의 실수로 엉뚱하게 하향급 모델로 개통이 됐는데도 그 쪽에서는 3일이 지났기 때문에 시정해줄 수 없다며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나는 그만 뚜껑이 열렸고 짧은 한숨과 함께 건달 포즈로 고쳐 앉았다. “아, 나 진짜 내가 너무 화가 나서 이걸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네?” 찰지게 내뱉는 순간 느꼈다. ‘그냥 앞으로는 이래야 되겠다... 참 순하고 나쁜 말도 못하고 착하게 웃던 그 때를 유지하면서 더 이상은 못 살겠다, 피곤해서!’
니 영화를 보지 않은 300만 명한테 화를 내야지, 왜 핸드폰 매장에 가서 그렇게 화를 내냐고 박 감독님은 말씀하시지만 나는 아니다, 그게 진짜 아니다.
웃는 건 괜찮아! 그건 직업병일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잘못이 분명한데도 인정하지 않는 건 도저히 못 참겠다, 이거다 지금 내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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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그건 그게 아닌데 내가 그래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원래 내가 이래서 그런 거면 내가 좀 그런데...
그게 그러니까...
...너무나 한심한데?
1973년생. 영화 <비밀은 없다>, <미쓰 홍당무> 등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