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조영주의 성공한 덕후
중2병도 괜찮다고 말해줘
인생은 원래 뒤통수를 친다. 그런 인생을 어떻게 믿나?
이런 내가 어떻게 하면 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출판사 덕질이었다.
작년부터 내게 2월 1일은 특별한 날이 됐다. 김춘수의 시 「꽃」을 빌어 표현하자면,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던 내가 세계문학상을 수상함으로서 작가로 인정을 받은 날이랄까.
세계문학상이 시작되고 11년간, 나는 단 한 번도 응모하지 않았다. 내가 쓰는 건 추리소설이니까 그런 큰 상을 탈 리 없다고 자신만만(?)했다. 수상 후에도 ‘탈 리 없어’는 끊이지 않았다. 주최 측의 실수였다고 사과 전화가 오는 상상을 몇 번이고 되풀이했다. 악몽이 끝난 건 시상식 직후, 통장에 상금이 입금된 걸 획인하고 나서였다. 하지만 일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소설을 쓰려고 마음만 먹었다 하면 ‘나는 안 돼’가 끊이지 않는다. 방금 전까지 손에 들고 있었던 『비수기의 전문가들』에 나온 말대로다.
인생은 원래 뒤통수를 친다. 그런 인생을 어떻게 믿나?
2011년, 데뷔하긴 했으나 첫 책은 판매가 신통찮았다. 두 번째 책 역시 지지부진, 다음 책을 낼 가능성은 희박했다. 이런 내가 어떻게 하면 작가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심 끝에 선택한 것이 출판사 덕질이었다. 어떤 출판사에서 무슨 책이 출간되는가, 그 책이 얼마나 팔리는가를 파고들다 보면 나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알면 알수록 기대치는 낮아졌다. 뭘 해도 안 되는 출판사는 부지기수였으나 히트작을 내는 출판사는 거의 없었다. 내가 응원하던 출판사에 문제가 생기는 날이면, 그곳 책을 안주 삼아 꼬박 하룻밤 술을 마셨다. 지금도 그 버릇은 없어지지 않았다. 송인서적 부도 후로 매일 밤 술이다.
오늘도 내 오른편엔 책 더미가 쌓여 있다. 유달리 신경이 쓰이는 책은 뭐니 뭐니 해도 지난 12월 후배가 갑작스레 차린 출판사의 첫 책 『걸어서 세계속으로』다. 하도 폈다 접었다 했더니 책의 발문을 외워버렸다. ‘사람은 피곤한 상태로 태어난다. 고로 쉬기 위해 살아간다.’ 후배의 책을 내려놓고 책장으로 다가간다. 박스세트만 쌓아놓은 칸에 가장 최근 자리 잡은 『S&M 시리즈 박스세트』를 연다. 시리즈 첫 권 『모든 것이 F가 된다』 마지막 장에 후배의 책 발문과 대구를 이룰 만한 문장이 있다. ‘소설은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하지만 소설을 통해 미래를 생각할 수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둘 다 재미있다.’ 내 멋대로 바꿔본다. 사람은 피곤한 상태로 태어나니까 쉬려고 책을 읽는 거다. 더 나아가면 평생 쉬고 싶어 작가가 되려 드는 거다. 물론 노력한다고 다 평생 쉬는 작가가 되지는 않는다. 박스세트 위에 놓인 『작가의 수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노력해서 평생 쉬는 작가가 여기 한 명 있다. S&M 시리즈의 작가 모리 히로시. 그는 집안 정원에 진짜 기차를 들여놓기 위해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는 우리나라 돈으로 200억원이 훌쩍 넘는 금액을 번, 기차 덕후 최종병기 같은 인간이다.
나는 평생 가도 그런 날 안 올 거다. 중증 중2병 상태로 중얼거리며 술병을 든다. 비었다. 어느새 다음 병을 딸 차례다. 조금이라도 희망적인 생각을 해볼까 하며 든 책은 존 버거의 『백내장』이다. 또 첫 장의 말을 흉내 낸다. 왼쪽 눈의 비수기는 걷혔다. 하지만 오른쪽 눈의 비수기는 여전히 남아 있다. 아, 오늘밤은 글렀다. 뭘 읽어도 찌질이다. 더 이상 바닥을 파기 전에 누가 내게 노력하면 다 잘 될 거라고 말해주면 좋겠다.
이 순간, 연락이 온다. 제 13회 세계문학상 수상자는 도선우다. 2016년 『스파링』으로 문학동네 소설상을 타고 연이어 세계문학상까지 거머쥐었다. 네티즌 사이에선 까칠한 비토씨로 유명한 네이버 파워블로거. 단 한 번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고 묵묵히 소설을 써온 블로그 덕후. 첫 회차에서 말했던 징크스는 이렇게 또 이뤄진다.
그런데 나는 뭘까. 늘 덕질만 하잖아. 가까스로 밝아진 머릿속에 또 한 번 중2병으로 가득차려는 순간, 지난 1월 5일 그를 만나 사인 한 번 술 한 잔 받았을 때를 떠올린다. 『스파링』을 편다. 사인이라기에 지나치게 긴 그의 문장을 보며 징징거리는 걸 잠시 멈춘다. 내가 덕질하는 사람은 모두 스타가 된다. 그렇다면 올해는 스스로를 덕질해 보자. 그의 덕담대로, 영원히 소설가로 행복하게 살기 위하여.
별명은 성덕(성공한 덕후). 소설가보다 만화가 딸내미로 산 세월이 더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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