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스트’ 그리고 ‘까칠리스트’
노안 이후 보이는 문장 『나쁜 페미니스트』를 읽고
남녀노소, 가진 자, 못 가진 자,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이런 저런 애자 숙자 경자 모두 다 함께 존중하며 살아보자는 것이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이고 나의 민감함의 시원(始原)이 아니겠는가.
노비 문장(노안 이후 비로소 보이는 문장)
페미니즘이 어떤 대단한 사상이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의 성 평등임을 안 순간 페미니즘을 받아들이는 건 놀라울 정도로 쉬워졌다.
『나쁜 페미니스트』,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17 쪽
1.
김수영은 왜 나는 작은 일에만 분노하는가 라고 탄식했지만 분노까지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종종 일상에서 만나는 어떤 작은 것들을 통해 딴지심이 발동하고는 한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전철을 타면 핑크색 의자가 있다. 임신부를 위한 자리다. 약자를 배려하는 의도, 참 좋다. 그런데 의자 아래에 빨간 색 바탕으로 이런 글을 적어놨다. “ 핑크카펫,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
어린이는 새 나라의 주인공, 미래의 주인공 등의 이야기를 관용구처럼 들었다. 교과서에도 나왔을 것이고, 어린이 날이면 방송에서도 빠지지 않고 그런 식의 말을 해댔다. 그래서 핑크 카펫의 내일의 주인공은 익숙하기도 하고 의미 전달도 빠르다. 그럼에도 그저 멍 때리고 저 글자를 계속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다 주인공 일 수도 없고, 꼭 주인공이 아니어도 괜찮잖아?”
주연은 주연이고 조연은 조연, 주인공은 주인공이고 엑스트라는 엑스트라, 그것들에 순위를 정하거나 우열을 가리지 않고 서로가 상대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사회, 그것이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아닌가, 라고 생각하면서, 저렇게 주인공이라는 말을 남용하니까 다들 주인공이 되려고 혈안이 되는 거야, 라고 전철 안에서 속 말을 궁시렁 대는 것이다.
또 있다. 작년까지 내가 살던 오피스텔 앞의 조형물이다.
아빠와 엄마, 아들과 딸, 네 명의 구성원이 안정감 있게 서 있는 작품을 오가다 보며 나는 내심 신경이 거슬렸다. 이혼을 했거나, 독신이거나, 자녀가 없거나 하는 사람들은 마치 완전한 가족의 풍경을 과시하는 듯한 저 상징물을 보며 어떤 기분을 느낄까? 그 불편한 심경을 페이스북에 이렇게 남겼다.
<일상 풍경- 조금만 세심하기로>
혼자여도 되고 둘이어도 행복한, 정상성과 완전성의 모델같은건 다수와 소수를 구별하는 씨앗 같은 것.
최근에는 신문 일 면에 실린 미국 발 한 장의 사진이 내 오지랍을 툭 하고 건드렸다.
지난 1월 20일,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트럼프 부부가 ‘마이 웨이’에 맞춰 춤 추는 사진이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 부부, 대통령 장녀 이방카와 맏사위 재러디 큐슈너 부부 등 정권의 핵심들이 남녀 잘 차려 입고 춤을 춘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서도 오피스텔 앞의 조형물과 비슷한 심통이 생긴다.
‘주류 사회의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자와 여자가 한 쌍이 되어야 하고 그것만이 사진의 프레임 안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 거야? 게이와 레즈비언과 의도한 독신남녀와 어쩌다 보니 독신남녀들은? ‘
내 해석 속에서 이 사진은 다분히 차별적이고 편협했으며 조금은 오버스럽게 말한다면 누군가에는 폭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김수영이 나라의 부패한 정치를 욕하는 대신에 설렁탑 집 주인의 불친절에 분개하고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는 대신 귀찮게 하는 야경꾼에게 증오했다면 나는 전철 안 임신부 석의 별 것 아닐 수 있는 단어에, 그 단어를 선택한 사람의 무딘 감수성에, 다양성을 인정하지 못하는 듯한 조형물과 자기들끼리 다 해 먹는 듯한 남의 나라 사진을 보며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그러면서 슬쩍 드는 생각은, 내가 혹 비비 꼬인 성격의 소유자인가, 그렇다면 나는 왜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관대하지 못하지? 내가 잘못 늙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인데, 아무튼 나는 다양함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들에 유독 민감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2.
자신을 나쁜(bad)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한 '록산 게이 Roxane Gay'는 『나쁜 페미니스트 Bad Feminist』를 통해 나쁨의 예를 솔직한 고백으로 나열한다. 여성으로 실패했고, 불완전하고 모순적 인간이며 의존적이고 핑크를 좋아하며 된장녀를 꿈꾸고 드레스를 사랑하고 제모를 하는, 페미니스트로는 부족하기에, 부족해서 bad한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페미니스트가 아닌 것보다는 나쁜 페미니스트가 되는 편이 훨씬 낫다고 믿으며 천박한 문화 소비 방식에 대해, 인종문제와 다양성이 부족한 문화 전반에 대해, 남성과 여성의 차별에 대해, 성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자기 목소리를 당당하게 낸다.
강간 당했던 자신의 과거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러나 담담하게 털어 놓는 등 그녀의 모든 글에는 그녀의 경험, 그녀의 철학, 그녀의 정치적 입장이 선명하게 담겨있다. 충격적 경험 속에서, 비극이 부르면 경건함과 엄숙함으로 응답할 법도 하련만, 시종일관 경쾌하고 빠르고 별 것 아닌 듯이 툭툭 치고 나가는 방식이 이 분홍색 표지 책의 예쁜 장점이다. 페미니즘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전혀 무겁지 않게, 그러나 설득력 있고 실감나게, 마치 매시가 드리블을 하듯이 유려하고 능숙하게 가지고 노는 작가의 능력도 발군. “ 어휴 또 그 이야기야? “ 라는 페미니즘 책에 대한 독자의 선입관을 조롱하며 그녀는 전통적이고 근본적인 페미니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페미니즘 이야기를 한다.
알리스 슈바르저의 『아주 작은 차이』를 읽은 것이 서른 초반이었다. 오르가슴은 가짜 였다고 남편에게 말하는 아내의 이야기를 읽으며, 통쾌함이 아닌 당혹감이 들었던 것이 사실이다. 어느 출판사의 청탁으로 그 책의 서평을 쓰고, 여성 편집장에게 대한민국 젊은 남성이 대견하다는 칭찬까지 받았지만 페미니즘은 옳은 것, 정당한 것임에도, 뭔가 무겁고 다가가기 힘든 것, 그래서 슬쩍 외면하고 싶은 것이라는 인식이 그때 생겼었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그런 부담감을 툭툭 털어줬다. 게다가 내 일상 속 민감함을 자책하지 않아도 괜찮겠다는 마음까지 생겼다. '록산 게이'가 소설과 영화와 대중 문화 속에서 사람들이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차별과 폭력성에 대해 “나쁜 페미니스트” 의 이름으로 딴지를 걸었듯이, 그리고 끊임없이 그리 해야만 사회가 발전한다고 자기 신념을 강화하듯이, 내가 일상의 어느 지점에서 보이는 민감함 역시 『나쁜 페미니스트』에서 치고 있는 그물망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남녀노소, 가진 자, 못 가진 자, 이성애자, 동성애자, 양성애자, 이런 저런 애자 숙자 경자 모두 다 함께 존중하며 살아보자는 것이 록산 게이의 나쁜 페미니스트이고 나의 민감함의 시원(始原)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하며 앞으로도 죽 까칠리스트로 늙어가겠다고 페미니스트 책을 덮으며 결론을 내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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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딴지일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노매드 힐링트래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심리에세이 《어른의 발견》, 《심리학, 남자를 노크하다》, 《사장의 본심》, 《남편의 본심》, 여행서 <<시가 있는 여행> <발리> 등의 책을 썼다. 또한 주요 매체들에 ‘윤용인의 심리 사우나’, ‘아저씨 가라사대’, ‘남편들의 이구동성’ 등 주로 중년 남성들의 심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칼럼을 써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