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노 요코의 달님
그날도 보름달이었다
대학생 때 나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나라공원에서 모두 허리를 젖히고 달을 보았다. 보름달이었다. 옆에서 허리를 젖히고 있는 남학생 얼굴이 낮에 볼 때보다 선명했다.
나는 미래에 대해 어떠한 꿈도 가진 적이 없다. 미래는 늘 의심스러웠다. 어릴 때 본 만화에 걷지 않아도 저절로 이동이 가능한 도로가 나왔다. 하늘에는 1인용의 작은 비행기가 날아다녔다.
거리에 터무니없이 높은 빌딩이 우뚝 솟아 있고 여기저기 로봇이 걸어 다니기도 했다. 그 만화를 내게 보여준 다카짱은 “굉장하다, 굉장해, 미래는 이런 세상이야” 하면서 입에 거품을 물고 흥분했지만, 나한테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들렸다. 게다가 그런 이야 기는 내 취향도 아니었다.
게타(기모노와 함께 착용하는 일본의 전통 나무신)를 신고 들판에서 놀던 시절이었으니 다카짱도 100년, 200년 뒤의 머나먼 미래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랬는데 언젠가부터 나는 움직이는 길 위에 서 있게 되었다.
거리 풍경이 만화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번쩍번쩍 빛난다. 빌딩도 첩첩이 이어져 있다. 그 만화에 스마트폰은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이 컴퓨터를 각자 한 대씩 지니고 다니게 되리라는 것까지는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리 길지 않은 기간에 상상 속의 미래가 현실이 되었고, 어느새 현실이 앞질러가기 시작했다. 나는 스마트폰으로 메시지를 보내며 편리해진 세상을 찬양하다가도 사소한 일에 비위가 상하기도 한다.
가난했던 청춘 시절, 데이트 약속은 엽서를 통해서 했다. 그 아이, 글자를 참 못썼는데. 누구든 글자를 쓸 때 독특한 버릇이 나왔고 저마다 개성이 있었다. 실연한 여자애의 편지에 눈물이 번져 1센티 정도 파란 동그라미가 생긴 걸 본 적이 있다.
스푸트니크 2호를 타고 나간 개가 아직도 지구 둘레를 돌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섬뜩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사진은 은색 풍선 같은 옷을 입은 인간이 달에서 걷는 사진이다. TV로 보면서 ‘너, 거긴 뭐 하러 갔어? 쓸데없이’라고 생각했지만 남자들은 흥분 했다.
나는 이대로가 좋아. 토끼가 떡방아를 찧는 달이 좋아. 차를 타고 산길을 달리면서 달을 보면 공주님이 달빛 아래에서 왕자를 기다리는 장면이 상상된다. 중국 땅에서 일본의 달을 그리워하는 한 남자의 고독이 느껴진다. 갓난아기를 등에 업은 열두 살 소녀가 터서 갈라진 작은 손을 펴고 겨울 하늘에 뜬 달을 아기에게 보여주려 애쓰는 모습을 애틋한 마음으로 떠올린다. 달은 나를 자꾸만 과거로 데려간다.
달은 보는 것이다.
지구에 태어났던 인간이 몇 조 명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모두 달을 보고 생각에 잠기거나 그저 멍하니 바라보았다. 보름달이 뜨면 늑대인간이 울부짖기도 했다. 모양이 변하는 달을 달력 대신으로 이용하면서 불편하다고 누가 생각했을까?
거기까지 가서 돌을 주워오는 건 미친 짓이다. 사람에겐 해선 안 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해선 안 되는 일만 하고 싶어 한다. 해버리면 당연한 게 된다.
우리에게 미래가 없어졌다. 미래가 다가오기도 전에 현실이 빠른 속도로 앞질러가기 때문이다. 내가 본 만화는 SF였을까? 지금 우리가 보는 SF영화처럼 세상이 또 바뀔까? 그런 세상이 오기 전에 죽고 싶다.
내 안의 뭔가가 그래선 안 된다고 주장하지만, 상상 속의 미래가 그리 밝지는 않다. 자꾸만 앞질러가는 현실을 따라가자니 숨이 찼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시간은 모두 과거가 되었다.
그저께가 보름달이었다. 수풀 위로 펼쳐진 깊은 남색 하늘에 동그란 달이 영롱하게 빛났다.
이 계절의 보름달을 보면 베이징에 살던 시절 집 앞 정원에 나와 달구경하던 때가 떠오른다. 정원에서 술판을 벌이는 손님들이 베이징의 중추명월은 세계 최고라고 떠들어대며 턱을 치켜들고 하늘을 쳐다보았다. 왠지 나도 감탄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하얀 벌레를 찾느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제쯤 달을 봐야할 것 같아 위를 쳐다봤을 때 담 위에 있는 고양이와 눈이 마주쳤 다. 나는 검은 고양이를 보고 감탄했다.
대학생 때 나라로 수학여행을 간 적이 있다. 나라공원에서 모두 허리를 젖히고 달을 보았다. 보름달이었다. 옆에서 허리를 젖히고 있는 남학생 얼굴이 낮에 볼 때보다 선명했다.
“야, 너, 지금은 인기 없어도 스물일곱, 여덟쯤 되면 괜찮은 여자가 될 거야. 그때 내가 반해줄게.”
“미래는 됐으니 지금 반해.”
“그건 무리야. 절대 무리.”
그 남자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베니스에서 혼자 돌아다니다가 열 살 정도 되는 남자 아이한테 헌팅을 당했다. 저녁 8시에 교회 분수대에서 기다리겠단다. 12 시가 다 되어 홀로 베란다에 나와 보니 달이 떠 있었다. 달빛이 바다의 잔물결처럼 산들산들 비쳤다. 그 아이, 정말로 교회 앞에서 기다렸을까? 왠지 웃음이 나왔다. 그날도 보름달이었다.
거봐, 달은 옛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 존재하는 거야.
문제가 있습니다사노 요코 저/이수미 역 | 샘터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는 게 뭐라고』의 작가 사노 요코가 가장 그녀다운 에세이집으로 돌아왔다. 중국 베이징에서 맞이한 일본 패전의 기억부터 가난했던 미대생 시절, 그리고 두 번의 결혼과 두 번의 이혼을 거쳐 홀로 당당하게 살아온 일생을 그녀 특유의 솔직함으로 그려낸다.
1938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전쟁이 끝난 후 일본으로 돌아와 무사시노 미술대학 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베를린 조형대학에서 석판화를 공부했다. 1971년 《염소의 이사》를 펴내며 그림책 작가로 데뷔했다. 주요 그림책으로 《100만 번 산 고양이》 《아저씨의 우산》 《내 모자》 등이 있고, 《사는 게 뭐라고》 《죽는 게 뭐라고》 《열심히 하지 않습니다》 《시즈코 상》 등의 수필을 썼다. 《내 모자》로 고단샤 출판문화상을 수상했고, 수필집 《하나님도 부처님도 없다》로 고바야시 히데오상을 받았다. 2010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노 요코> 저/<이수미> 역11,520원(10% + 5%)
산다는 건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 그러니, 걱정일랑 하지 말고 오늘도 느긋하고 박력 있게! 『100만 번 산 고양이』 『사는 게 뭐라고』의 작가 사노 요코가 가장 그녀다운 에세이집으로 돌아왔다. 『문제가 있습니다』는 일본 출간 당시 독자들로부터 가장 사노 요코다운 에세이집이라는 평가를 받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