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출판사와 코보의 큐레이션 전략
디지털 시대 출판·콘텐츠 산업의 미래 #3
결국 펭귄 클래식의 핵심은 큐레이션이 완료된 도서 목록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료 다운로드의 경쟁 환경에서도 펭귄 클래식이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이유다.
1998년 아마존 설립 초창기에 인공지능 전문가 그레그 린덴(Greg Linden)은 데이터를 보다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해냈다. ‘제품별 공동 필터링’이라는 이 시스템은 제품 간 상관관계를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고객이 미처 원하는지도 몰랐던 상품을 추천했다. 아마존은 이것을 ‘고객별 개인화’라고 한다. 아마존은 판매의 33퍼센트 이상이 이 알고리즘 추천 방식에 의해 발생하고 있다고 추정한다. 도서를 추천할 수 있는 큐레이션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1주일 사이 동시에 일어난 두 가지 사례가 있다.
코보의 사이트 폐쇄와 펭귄 클래식
전자책 판매업체 코보(Kobo)는 신문기사를 통해 누군가 자체 제작한 포르노물이 자사 웹사이트에서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는 사실을 접했다. 더욱이 이것은 일반적인 성애물이 아니었다. 보통의 수위였다면 코보 사이트 상품 목록에도 올라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 포르노물은 하필이면 아동 문학 서적을 소개하는 화면 바로 옆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소비자들의 격분한 목소리가 곳곳에서 들려왔다.
영국 코보의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스미스(W.H. Smiths)는 좀처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고객들은 아우성이었고 주주들은 회사 평판에 영향이 미칠까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스미스와 코보 측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이들은 하룻밤 동안 코보 웹사이트 전체를 폐쇄하기로 했다.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자책 판매 사이트였던 코보에게는 엄청난 손해가 예상되었음에도 말이다.
같은 주, 펭귄 클래식(Penguin Classics)은 논쟁거리가 될 만한 결정을 내렸다. 가수 모리세이(Morrissey)의 자서전을 최고의 위엄을 자랑하는 블랙 클래식 범주에 포함시키기로 한 것이다. 저자의 요구가 강하게 작용한 듯했다. 이 결정은 두 가지 이유에서 매우 이례적이었다. 우선 클래식 출판물이 아닌 것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다소 외람되었다. 저자가 당대 아무리 뛰어난 작사가라 해도 말이다. 또한 블랙 클래식은 호메로스(Homer), 오스틴(Austen), 톨스토이(Tolstoy) 등 이미 고인이 된 작가의 작품을 위한 것이었다. 모리세이의 사후라면 문제될 게 없겠지만 그는 생존해 있는 작가였다.
출판의 위기는 디지털 때문이 아닌 콘텐츠 과부하 문제
이 두가지 문제 상황은 모두 큐레이션과 관련이 있다.
자체 제작은 코보 측에 매우 유익한 서비스였다. 이를 통해 해당 분야에서 시장을 선도하고 있던 아마존(Amazon) 킨들에 전혀 뒤지지 않고 작가와 독자는 물론 관련자 모두를 유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체 제작물에 대한 여과 장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결국 코보는 위험에 노출되고 말았다. 이후 코보는 자사의 비즈니스 영역이 단순히 자체 제작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이 아님을 깨달았다. 사실 서비스 제공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코보는 자체 제작물에 대한 큐레이션 작업 역시 비즈니스 영역에 포함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는 훨씬 어려운 작업이지만 가치 제안에 있어 아주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펭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인터넷에서는 저작권 기한이 만료된 책을 무료로 볼 수 있다. 가령 소설 『모비딕(Moby Dick)』을 읽고 싶으면 요금을 전혀 내지 않고도 바로 다운로드 받아볼 수 있다. 펭귄 클래식의 업무 영역은 더 이상 책을 내는 것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요 작가의 작품 목록 정리, 추가적인 편집 작업, 도입부 및 참고문헌 정리 등 일련의 과정을 포함한 선별 작업이 모두 새로운 업무 영역에 포함되었다.
결국 펭귄 클래식의 핵심은 큐레이션이 완료된 도서 목록을 제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무료 다운로드의 경쟁 환경에서도 펭귄 클래식이 여전히 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위의 두 가지 사건 모두 단 일주일 안에 벌어진 일이다. 출판업계에서는 이 같은 과잉의 문제, 또 큐레이션의 문제가 하루에도 몇 건씩 발생한다. 요컨대 출판업자가 직면한 위기는 디지털 기술 그 자체가 아니다. 판매자 및 독자에 대한 콘텐츠 과부하가 문제인 것이다.
큐레이션마이클 바스카 저/최윤영 역 | 예문아카이브
큐레이션은 '불필요한 것들을 과감히 덜어내는' 힘이자, '선별과 배치를 통해 시장이 원하는 것만 가려내는' 기술이다. 큐레이션은 이제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사용되는 의미를 넘어서서, 패션과 인터넷을 비롯해 금융ㆍ유통ㆍ여행ㆍ음악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미치는 새로운 트렌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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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 연구자, 작가, 저널리스트이자 디지털 퍼블리싱 콘텐츠 기업 카넬로(Canelo)의 발행인. 옥스퍼드 브룩스 국제 센터(Oxford Brookes International Centre) 연구원으로 영국문화원 ‘미래를 이끄는 젊은 창조 기업가’로 선정됐고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수여하는 ‘깁스상(Gibbs Prize)’을 받기도 했다. 지은 책으로는 디지털 시대 콘텐츠 산업의 미래와 해법을 다룬 《콘텐츠 머신(The Content Machine)》 이 있다.
<마이클 바스카> 저/<최윤영> 역16,200원(10% + 5%)
“대신 선택하고 미리 보여줘라!” 시장이 원하는 것만 가려내는 기술 이미 수많은 정보·콘텐츠·상품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어느 것 하나 주목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선택을 대신할 수 있는 큐레이션(Curation)의 개념을 살펴보고 이를 적용할 수 있는 방법과 분야를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제시하는 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