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 작가가 읽어주는 책의 맛
로제 그르니에의 『책의 맛』을 번역하며
프랑스어 ‘palais’는 법원이나 도서관처럼 공공건물까지 내포하지만, 우리말 ‘궁전’이나 ‘전당’은 보통사람이 범접하기 힘든 담장 높은 공간의 느낌이 더 강하기에,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책의 맛’으로 옮겼다.
올해 나이 아흔 일곱, 한 세기를 책과 더불어 살아온 작가 로제 그르니에를 어떻게 소개할까? 알베르 카뮈ㆍ로맹 가리ㆍ파스칼 피아ㆍ클로드 루아ㆍ이오네스코ㆍ훌리오 코르타자르 등 가깝게 지내던 친구와 동료 들을 모두 떠나보낸 그는 마치 북적이던 축제가 끝난 곳에 홀로 남아 뒷정리를 하고 있는 사람 같다. 2013년에는 카뮈 탄생 백 주년을, 2014년에는 로맹 가리 탄생 백 주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그들의 작품세계를 얘기하고, 그들과 함께한 추억을 증언했다.
로제 그르니에는 작가이기에 앞서 기자였다. 알베르 카뮈의 추천으로 <콩바> 지에서 데뷔해 20년 넘게 기자로 활동했다. 카뮈가 편집장을 맡았던 <콩바>는 그가 “모든 것을 배운 세계”였다. 그곳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서른 살에 『피고의 역할』을 출간하면서 그는 작가가 되었고, 70년 가까이 왕성한 필력을 유지하며 사십여 편의 작품을 펴냈다. 장편소설과 단편소설ㆍ에세이ㆍ평론ㆍ영화시나리오 등 다양한 장르의 글을 써온 만큼 수상경력도 다채롭다. 1971년에는 작품 전체에 대해 ‘문인협회 문학대상’을 받았고, 1972년에는 『시네로망』으로 페미나 상을, 1975년에는 『물거울』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단편소설 대상을 수상했으며, 1985년에는 전 작품에 대해 아카데미 프랑세즈 대상을, 1987년에는 『알베르 카뮈, 태양과 그늘』로 알베르 카뮈 상을 받았다. 그리고 『내리는 눈을 보라』(1992)로 노방브르 상을, 『율리시즈의 눈물』(1998)로 ‘3천만 동물 친구들을 위한 재단’ 문학상을, 『순간포착』(2007)으로는 편집자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겨울궁전』과 『시네로망』도 대중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지만, 그는 “프랑스의 체호프”라고 불릴 만큼 특히 단편소설 분야에서 대가로 손꼽힌다.
또한 로제 그르니에는 작가들의 초상을 대단히 섬세하게 그려내는 평론가로도 인정받는다. 클로드 루아(『클로드 루아』)ㆍ안톤 체호프(『내리는 눈을 보라』)ㆍ스콧 피츠제럴드(『새벽 세 시』)ㆍ알베르 카뮈(『알베르 카뮈, 태양과 그늘』)ㆍ파스칼 피아(『파스칼 피아 또는 죽음의 권리』)에 관한 책을 썼고, 로맹 가리(『로맹 가리 읽기』)와 프루스트(『프루스트와 그의 친구들』)에 관한 공동저작을 펴내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책에 코를 박고 산 독서광이었던 그는 1963년부터 지금까지 갈리마르 출판사의 편집위원으로 일하며 세기의 숱한 지성들과 교류해온 편집자이기도 하다. 그가 모르는 작가가 없고, 읽지 않은 책이 없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는 50년 넘게 매일 아침 몇 백 미터를 걸어서 출판사로 출근해왔고, 지금도 그 걸음을 멈추지 않고 있다. 백세를 코앞에 두고도 여전히 글을 쓰고 원고를 읽는 그를 사람들은 “지칠 줄 모르는 청년작가”, “프랑스 문단의 살아 있는 역사”라고 부른다.
2011년에 출간된 이 책에서 저자는 아홉 개의 주제, 아홉 가지 각도로 글쓰기와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미디어를 점령한 사회 뉴스와 문학의 관계를 짚어보고, 여러 문학작품이 그리는 기다림에 주목하며 글쓰기가 시간과 맺는 관계도 살핀다. 그리고 자기모순에 빠질 권리와 떠날(죽을) 권리에 대해, 작가의 사생활에 대해 성찰하고, 기억과 소설의 관계에도 주목한다. 문학의 해묵은 주제인 사랑도 빠뜨리지 않고, 작가들에게 미완성작품과 마지막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살피고, 글을 쓰는 이유와 글을 쓰려는 욕구에 대해서도 성찰한다. 그의 펜 아래 어마어마한 작가들이 줄지어 불려 나온다. 스탕달ㆍ플로베르ㆍ카뮈ㆍ도스토옙스키ㆍ프루스트ㆍ체호프ㆍ베케트ㆍ멜빌ㆍ피츠제럴드ㆍ버지니아 울프ㆍ헨리 제임스ㆍ카프카ㆍ보들레르ㆍ포크너ㆍ발레리ㆍ헤밍웨이ㆍ사르트르ㆍ파묵ㆍ페나크ㆍ무질…. 분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등장하는 저자와 작품의 무게만으로 이 책은 상당히 묵직하다. 그러나 이 노작가의 해박함은 위압적이지 않다. 그의 문체는 과시적이지 않고 소박하며 섬세하고 깊이가 있다.
화가의 전기는 그가 본 모든 그림이 말해주고, 작가의 전기는 그가 읽은 모든 책이 말해준다. 한평생 책을 읽어온 작가의 방대한 독서 이력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그의 전기나 다름없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는 독자는 백세 작가가 이끄는 대로 풍성하고 깊이 있는 독서를 하게 될 뿐 아니라 그의 삶까지도 읽게 될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Le Palais des livres”이다. 다른 언어와 달리 프랑스어 ‘palais’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왕궁ㆍ궁전”이 첫째 의미이고, “입천장ㆍ미각”이 둘째 의미이다. 제목을 “책의 궁전” 혹은 “책의 전당”이라 하지 않고 ‘책의 맛’이라 옮긴 건 ‘궁전’이나 ‘전당’이 갖는 위압적인 이미지가 책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 썩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서이다. 저자가 이 단어를 첫째 의미로 쓴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프랑스어 ‘palais’는 법원이나 도서관처럼 공공건물까지 내포하지만, 우리말 ‘궁전’이나 ‘전당’은 보통사람이 범접하기 힘든 담장 높은 공간의 느낌이 더 강하기에, 나는 이 책의 제목을 ‘책의 맛’으로 옮겼다.
책의 맛로제 그르니에 저/백선희 역 | 뮤진트리
그르니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들의 소설과 에세이들로부터 지혜와 유머를 끌어낸다. 그의 펜 아래 줄지어 불려 나오는 어마어마한 저자와 작품의 무게만으로 충분히 묵직한 책이지만, 소박하고 섬세하고 깊이 있는 노작가의 해박함은 우리로 하여금 즐겁게 ‘책의 맛’을 느끼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