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이 몰려오는데 성폭력을 줍고 있는 마음
우리는 이걸 페미니즘이라고 한다
정 사건이 다른 식으로 퍼지는 게 찝찝하고 억울하다면, 하지 말자.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불명예스러운 평판이나 소문이 귀에 들어오기 전에, 하지를 말자. 혹시 남들이 알까 찝찝한 일은 하지 말자.
출처_imagetoday
남에게 희생을 당할 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 놈이 울었고
40명가량의 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
이 캄캄한 범행의 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 김수영, 「죄와 벌」
알량하게 문학을 해보겠다고 필사를 한 적이 있다. 김수영 시집도 자주 읽었지만 「죄와 벌」은 베껴 쓰지 않았다. 저 지극한 자기애를 투사하는 방식이 기분 나빴지만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서늘하다. 화자는 우산으로 사람을 폭행한다. 집에 돌아와 아는 사람이 혹시 그 현장을 보았을까 찝찝하다. 버리고 온 우산도 아깝다.
이미 세상을 떠난 김수영으로 빙의라도 한 듯한 사람들이 대거 자신의 성적 욕망을 가지고 사람들을 아직도 패고 있다. 소설을 쓰고 시를 쓰고 평론을 하는 사람이 사람을 희롱하고 모욕한다. 일부는 사과문을 게재하면서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고 한다. 실제와 다르게 소문이 왜곡되어 억울하거나, 일시적 감정의 부득이한 소치일 뿐 폭력은 아니었다고 해명하거나, 어쨌든 미안하니 스스로 맡은 자리를 내려놓겠다고 한다. 그리고 심려를 끼쳤다며 고개를 숙이는데, 어째 방향이 미묘하게 피해자가 아니라 현장을 목격한, '아는 사람'을 향해 가 있다.
아내를 때리면 문학이 되는 시에서 아내는 행여 자신의 부덕을 증언하고 비난할 존재가 아니다. 사랑해서 술먹고 불러내 만졌다. 이 문장에서 피해자는 인간이 아니다. 번화가에서 술먹고 때리는 펀치머신처럼 자신의 감정을 푸는 매개다. 여성은 아름답고 영감을 주는 존재다. 이 문장에서도 여성은 인간이라기보다 관상용 화초에 가깝다.
세상은 조용히 우산대로 맞던 사람이 말을 하자 놀라는 모양새다. 아니, 피해자가 말을 해? 말은 인간만 하는 게 아니었어? 말 많은 인간들은 이때다 싶어 한마디씩 보탠다. 진정성을 의심한다. 혹은 아예 침묵한다. 내가 말을 보태면 인간이 아닌 것들이 인간이 될까 봐, 내가 아는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줄까 봐 저어한다.
가해자 편을 들 수 있다. 세상에는 무고한 일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특히 아는 사람에게 무고한 일이 벌어지면 참 안타깝고 도와주고 싶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누군가를 때리고 있다면, 그에게 현장을 봤노라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 인간이라면 배워야 한다. 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받아본 사람이라면, 자신의 감정이 상대방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고 하지 말아야 한다.
사건은 이미 벌어진 일이고, 소문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말이다. 벌어진 일을 옮기면서 실제와 달라지기도 하고 그렇다. 정 모르겠으면, 사건이 다른 식으로 퍼지는 게 찝찝하고 억울하다면, 하지 말자.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기 전에, 불명예스러운 평판이나 소문이 귀에 들어오기 전에, 하지를 말자. 혹시 남들이 알까 찝찝한 일은 하지 말자. 자위하지 말고, 사과할 일 만들지 말고.
어둠 속 방으로 들어가 혹시나 아는 사람이 봤더라도 곧 잊겠지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면 틀렸다. 언제까지 조용히 맞으면서 사람 취급 해줄 때까지 기다려줄 줄 알았나. 옆집 사람을 강간하겠다는 가사를 쓴 랩퍼가, 여성 비하발언 개그맨이 멀쩡히 앨범을 내고 방송을 한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맞았다. 우리는 이미 눈을 감은 목격자들을 목격했다. 우리는 계속 목소리를 낼 것이다. 계속 아는 사람으로, 피해자로 증언할 것이다. 눈에 거슬린다면 그건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드러내 줄 뿐이다.
스캔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진다. 그 와중에 다그닥 훅 소리를 내며 나라는 잘 돌아가고, 국정을 농단한 자는 ‘강남 아낙네’로 불린다. 여성은 인간이 아닐진대, 인간이 아닌 존재는 범죄자가 될 수조차 없다. ‘문단 내 성폭력’을 다루려던 글은 비선실세 해일이 일어나는데 한가롭게 해변에서 성폭력이나 줍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러나 여성은 조개가 아니라 인간이다. 해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여성은 인간이다. 이걸 ‘페미니즘’이라고 한다.
왜 우린 우리가 지닌 짐승 같은 부분에 대해서 인간적이라는 말을 쓰는 거지, 오빠? 공격성도 인간적이라고 하고, 잔인함, 증오, 탐욕도 인간적이라고 하지. 그건 인간적이지 않은 면이야, 오빠. 정말 슬픈 일이지. 진짜 인간이 되려면 우린 그런 모든 것들을 뒤로해야 해. 왜 그러려고 노력도 못 해?
- 『체체파리의 비법』, 「덧없는 존재감」 중
uijungchung@yes24.com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저/<이수현> 역13,320원(10% + 5%)
1970년대에 이미 ‘페미니즘 SF’의 기수로 불렸던 사람,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첫 번째 단행본이 드디어 나왔다 활동할 당시 ‘페미니즘 SF’의 기수로 인정받았고 사후에는 ‘팁트리 상’으로 기림받는 작가인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주요 작품들을 담은 중단편선집이다. 팁트리의 작품이 단행본으로 묶여나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