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 리뷰 대전] 아름답고 아름다운 소설
하염없이 소설 읽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꼭 읽어야 할 이유가 있어서 소설을 읽는 건 소설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 아니다. 서점에서 일하느라 소설 읽기가 일인 경우가 많다. 하지만, 가끔 직업이나 이유 같은 건 잊게 되기도 한다. 그런 독서를 ‘하염 없이 소설 읽다’라고 한다.
소설 속의 남자는 30년 전의 일을 돌아본다.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고 한 건축사무소에 갓 입사한, 신입사원 시절의 1, 2년 이야기가 소설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누군가에게 추억이란 거꾸로 되넘겨 펼쳐보는 페이지라면 이 남자의 추억이란 항상 펼쳐놓고 있는 페이지 같다. 설계도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지난 30년 동안 늘 마음 속에 단정하게 펼쳐둔 채 삶을 세우고 증축하고 보수했을 것이다.
그가 신입사원으로 입사했던 ‘무라이 건축사무소’는 세상의 큰 흐름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곳이다. 고도개발 시기의 ‘크고 높고 화려한 건축’이라는 트렌드에서 벗어나 있고, 도심에서 벗어난 조용한 골목가에 눈에 띄지 않게 자리잡고 있다. 여름에는 아예 도쿄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별장에서 작업을 한다. (이야기의 대부분도 여름별장이 배경이다) 실력이나 명성이 부족해 중심에 서지 못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무라이 슌스케 소장의 명성이 탄탄하기 때문에, 자신의 스타일과 한적한 입지를 유지해도 일감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무리하게 큰 프로젝트에 참여하거나 화제가 되고자 애쓰지 않는 곳에서, 남자는 사회생활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런데 이 남자가 무라이 사무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무라이 슌스케 소장이 이례적으로 ‘국립 현대 도서관’이라는 대형 공공 프로젝트 경쟁입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손이 더 필요해 진 것이다. 도대체 왜 무라이 소장이 그런 결정을 하게 되었는지 소설은 궁금증을 자아내고, 그 궁금증을 쉽사리 풀어주지 않은 채 흘러간다. 이런 작은 호기심을 자아내는 요소들은 여러 가지 배치되어 있다. 사무소에서 만난 마리코와 유키코 두 여자 사이에서의 결말, 무라이 소장과 후지사와 씨 사이의 과거, 경쟁 입찰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 등 소설은 적당한 호기심과 긴장을 자아내며 은근히 뒤를 궁금하게 만든다. 심지어 소설을 다 읽고도 궁금한 것이 남는데, 전혀 불만스럽지 않고 오히려 만족스러운 것도 신기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 소설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자신의 스타일을 지켜가는 무라이 사무소 사람들이다. 경쟁입찰에 참여했다지만 사무소의 분위기는 부산하지 않다. 업무는 체계적으로 나뉘어져 있고,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지시도 없다. 저마다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한 채 사무소는 돌아간다. 신입사원에게 알려주는 것도 실무라기 보다는 사무소의 철학이나 원칙이다. 어떤 건축이 좋은 건축인지, 건축이 사람에 관해 어디까지 고려해야 하는 지에 관한 대화가 이뤄진다. 사각사각 연필을 깎는 소리만 들리고, 환한 햇살이 유리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다가 슬며시 물러나고, 창 밖으로는 여름 별장의 푸른 나무와 정원이 펼쳐진 곳에서 들리는 조용한 대화는 이 혼탁하고 시끌시끌한 세상의 완전한 반대편에 있는 것 같다.
사람의 시선을 압도하기 보다는 사람의 삶에 조용히 닿아있는 건축.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고자 애쓰지 않지만 완벽을 기하는 사람들. 하나의 철학을 공유한 사람들이 나누는 인간과 건축에 관한 풍부한 대화. 그런 한 순간을 살아낸 사람에게, 이런 기억은 각인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남자는 30년이 지나서도 인생의 여름을 돌아본다. 아름다운 설계도를 들고 30년 간 세워 올린 그의 삶은 고요하고 정갈하고 단단해 보인다. 아름답고 아름다운 소설이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마쓰이에 마사시 저/김춘미 역 | 비채
일본 현대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 등장했다. 오랜 편집자 생활을 뒤로하고 늦깎이 작가로 데뷔한 거물 신인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그 주인공이다. 인간을 격려하고 삶을 위하는 건축을 추구하는 노건축가와 그를 경외하며 뒤따르는 주인공 청년의 아름다운 여름날을 담은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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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
<마쓰이에 마사시> 저/<김춘미> 역15,120원(10% + 5%)
제64회 요미우리문학상 수상작! 일본문단의 정통성을 잇는 거물 신인 마쓰이에 마사시의 놀라운 데뷔작!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가와바타 야스나리,《설국》에서)만큼 아름다운 첫 소절이 또 있을까. 다자이 오사무의 고백하듯 담담한 독백체만큼 몰입도 좋은 문장이 또 있을까. 가와바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