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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상처를 치유해줄 수 있을까

세상에 조리가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이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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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뭘 어쩌겠나. 쓸 수 있는 사람은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읽고 광장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나가는 수밖에. 다들, 힘내시길.

내가 최초로 갔던 서점이 어디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지만 서점에 관한 최초의 기억은 남아 있다. 국민학교 4학년 때였다. 요맘때처럼 쌀쌀한 날씨였으니 기말고사가 아니었나 싶다. 어쩐 일인지 시험을 잘 봤다. ‘올백’이라고 아시는지. 국어, 산수, 사회, 자연 과목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고 전부, 싸그리, 몽땅 다 맞추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 나는 올백을 맞았던 것이다. 스포츠에 비유하면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거랑 비슷한 게 아니었을까. 전교에서 딱 한 명, 나뿐이었다. “그 시절에 올백 한번 안 맞아본 사람이 어딨냐”느니 “반장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딨냐” 같은 야유가 저기 어디서 날아올 것 같지만 나도 뭐 이걸 자랑하려는 건 아니니까 좀 더 들어보시라.

 

집안 분위기는 단숨에 좋아졌다. 기념으로 외식을 했다. 주말에도 저녁 늦게 출근했다가 새벽에 돌아오는 아버지가 모처럼 시간을 내셨다. 우리는 어딘가 놀이동산에서 실컷 놀다가 명동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그러고 나서 들른 곳이 광화문 교보문고였다. 당시에는 지금이랑 구조가 달랐을 테지만 아무튼 그렇게 많은 책이 쌓여 있는 공간은 태어나서 처음 구경했다. 기가 막혔다. 입을 떡 벌리고 감탄하는데 “뭐든, 읽고 싶은 책은 전부 사줄게”라며 아버지가 알라딘의 요술램프 같은 말을 했다. 지금까지도 그 얘기가 잊히지 않는다. 왜냐면 그래놓고 결국 만화책은 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법이 어딨냐며 펑펑 울었더니 나중에 엄마가 사주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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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책이 가득 들어차 있는 공간에 가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깨달았다. 아주 먼 옛날에는 벌레가 책을 파먹지 못하도록 향초 같은 걸 넣어뒀고 이 “향초를 끼워둔 책을 서향이라고 했다”던데, 지금은 사정이 다르니까 좋은 냄새라고 할 수는 없어도 텁텁한 책 냄새를 맡으면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그곳에서 공부는 뒷전으로 미뤄둔 채 쓸따리없는 책을 잔뜩 읽었다. 주로 무협지나 추리소설 따위였다. 나는 평소에도 근심 걱정이 많은, 김삿갓 같은 이가 비웃어주기 딱 좋은 성격의 인간인데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나 시험을 앞두고 유용했다. ‘공부는 하기 싫은데 그렇다고 놀자니 불안하다’는 식으로 갈팡질팡 할 때는 책을 읽었다. 추리소설도 어디까지나 책은 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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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잦았지만 그때마다 『서유기』를 읽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한 뒤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 중국의 작가도 있던데 그러고 보면 ‘독서로 마음을 다스린다’는 것이 마냥 고색창연하기만 한 얘기는 아닌 듯하다. 영어사전에 등재된 ‘Bibliotherapy’도 풀어쓰면 ‘책으로 상처를 치유한다’는 정도가 되지 않을까. 『독서인간-책과 독서에 관한 25가지 이야기』를 집필한 차이자위안에 따르면 독서치료를 가장 먼저 제창한 사람은 스웨덴의 신경 병리학자인 야콥 빌스트레이라고 한다. 어떤 특정한 텍스트를 읽음으로써 “환자의 긴장감, 불안감, 그리고 소극적인 정서를 제거하고 낙관적인 정신을 수립하여 병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하게 한다”는 것이 주요 관점이었다. “미국 학자 골트는 <정신병 환자의 독서, 오락, 소일거리에 관하여>라는 논문을 써서 처음으로 ‘독서치료’의 기능에 대한 과학적 연구”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덕분에 Bibliotherapy가 효과적인 정신과 치료의 하나임이 밝혀진 바 있다.

 

그렇다면 ‘어떤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과 ‘그 특수한 상황에 처해 있는 인간에게 필요한 책’을 어떻게 연결시켜 줄 것인가 하는 과정이 중요할 듯하다. 예전에 나도 ‘연인과 헤어지고 괴로울 때 읽으면 좋은 책’이라거나 ‘긴 글을 읽지 못하는 아이가 고민인 엄마들이 참고하면 좋은 책’ 같은 식으로 이런저런 잡다한 글을 쓴 적이 있지만 그거야 심심풀이 땅콩 삼아 해본 거니까 이렇다 할 근거나 체계는 없었다. 그런 와중에 제대로 된 필자들이 쓴 작업물이 어딘가에는 있을 텐데 하고 서가를 어슬렁거리다가 발견한 것이 『소설이 필요할 때』라는 책이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두 명의 독서치료사가 실제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독서치료에서 소설의 효능이 가장 완전하고 확실하다는 확신을 얻”어 쓴 책이라고 한다. 몇 가지 사례를 읽어보니 무척 흥미로웠다. 그중 눈에 띄는 항목 몇 개를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할 때

 

혼자서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가. 늘 곁에서 누군가 손을 잡아주었으면 하는가. 하지만 매사 남에게 의지하는 태도는 좋지 않다. 인생에는 독립심을 배워서 오직 자신에게만 의지해야 할 때가 오기 마련이다. 남북 전쟁이 끝난 직후의 미국을 배경으로 하는 찰스 포티스의 『트루 그릿』은 아버지를 죽인 살인자에게 복수하기 위해 강철 같은 투지로 고군분투하는 열다섯 살 소녀의 이야기이다. 앞으로 인생의 진창길을 가려면 이 책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2) 사이비종교에 현혹됐을 때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이비 단체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덫이나 미끼에 대한 뛰어난 글을 읽는 것이다. 페기 라일리의 『우호와 슬픔』이면 충분하다. 혹시 남의 말에 잘 넘어가는 성격이라면 5년에서 10년에 한 번씩 이 소설을 읽어라.


3) 언어 장애가 있을 때

 

언어 장애로 겪는 온갖 고난과 시련을 가장 뛰어난 통찰력으로 탐구한 작품은 바로 데이비드 미첼의 『블랙 스완 그린』이다. 물론 소설의 주인공과 달리 당신은 치료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언어 장애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설의 마지막 대목을 읽는 순간 가슴이 환하게 밝아지리라는 것은 확실하다. 당신은 분명히 좀 더 성숙해질 것이다.


4) 공감할 줄 모를 때 

 

돌턴 트럼보의 『조니 총을 얻다』야말로, 평생 냉동고에서 산 사람처럼 차갑고 주위의 어떤 소리도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읽으면 좋을 소설이다. 차가운 심장이 연민을 향해 나아가게 될 테니까.


5) 대처할 능력이 없을 때

 

지금 당신이 벼랑 끝에 걸린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라 해도 읽는 이의 동정심을 마구 자아내며 통찰력이 빛나는 제럴드 우드워드의 『8월』을 읽다보면 여러 문제로 한없이 어수선한 마음이 정리될 것이다.

 

이쯤에서 사실을 고백하자면 원래 이번 주에 쓰려던 글은 이게 아니라, 정치의 뒷면에서 이권을 얻기 위해 자유자재로 인사를 조작하는 ‘흑막’에 관한 세이초의 소설이었다. 하지만 몇 줄 쓰다가 접었다. 도무지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철학자 우치다 타츠루가 『사악한 것을 물리치는 법』에서 지적한 대로 그것은 어쩌면 내가 입은 상처, “세계에는 조리가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믿음에 금이 가면서 생긴 상처”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그렇다면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책을 소개해 보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전개돼 버린 것이다. 이런 상처를 입은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닐 듯하다. 그래도 뭘 어쩌겠나. 쓸 수 있는 사람은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읽고 광장에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나가는 수밖에. 다들, 힘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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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김홍민(북스피어 대표)

미남이고 북스피어 출판사에서 책을 만든다. 가끔 이런저런 매체에 잡문을 기고하거나 라디오에서 책을 소개하거나 출판 강의를 해서 번 돈으로 겨우 먹고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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