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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우와 음악만으로 풍성했던 -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객석에서
두 명의 배우가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버거울 수 있는 규모의 극장이건만 짜임새 있는 스토리 전개와 제3의 배우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더해져 공연장은 연일 풍성한 감성과 관객들로 가득 찬다.
<빈센트 반 고흐>, <살리에르>, <파리넬리> 등 예술가들의 삶을 뮤지컬로 제작해 많은 사랑을 받은 제작사 HJ컬쳐가 또 한 명의 예술가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바로 대학로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공연되고 있는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단 두 명의 배우가 감당하기에는 상당히 버거울 수 있는 규모의 극장이건만 짜임새 있는 스토리 전개와 제3의 배우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더해져 공연장은 연일 풍성한 감성과 관객들로 가득 찬다. 웃다가 울다가 참 많은 생각을 했던 90분. 무대 위에는 교향곡 1번의 실패로 깊은 슬럼프에 빠진 라흐마니노프와 그를 치료하기 위해 찾아간 정신의학자 달 박사가 서 있다. 이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객석에서 생각했던, 또 들었을 법한 얘기들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를 살펴본다.
다구역 11열 4 :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다시 듣게 되네. 이 곡이 그토록 암울하면서도 애절하고, 슬프면서도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유를 좀 알겠어. 얼마나 격정적인 심상을 담고 있는지 말이야.
다구역 11열 3 : 그러게. 클래식에 별로 관심이 없어도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모두에게 익숙하잖아. 그런데 이 곡에 그런 뒷이야기가 있는 줄 몰랐네. 마지막에 박수 소리 들었어? 수많은 뮤지컬에서 기립박수 치는 관객들을 봤지만 이번엔 밀도가 다르더라고. 관객들이 1.5배 빠른 속도와 높은 강도로 박수를 치는 것 같아.
다구역 11열 4 : 제대로 감동한 게지. 그 순간 객석에서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은 박수 밖에 없잖아. 나도 박수 진하게 쳤다고.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살리에르>, <파리넬리> 다 봤지만, 모두 좋아하는 작품이지만, 솔직히 초연부터 제대로 감동받은 건 <라흐마니노프>가 처음이야. 사실 빈센트 반 고흐, 살리에르, 파리넬리는 너무나 잘 알려진, 삶의 이야기가 풍성한 사람들이야. 그래서 콘텐츠를 어떻게 엮느냐의 문제일 뿐 절반은 이미 성공한 무대였다고 생각해. 그런데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라는 인물 자체에는 별다른 관심들이 없었잖아.
다구역 11열 3 : ‘피아노 협주곡 2번’이나 ‘보칼리제’가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1, 2위를 다툴 정도로 유명한 거에 비하면 라흐마니노프라는 인물은 잘 모르지. 니콜라이 달 박사 역시 같은 스승에게 함께 배웠다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명성에는 한참 못 미치고. 라흐마니노프 음악이 연주된 음반을 봐도 대개 ‘20대에 극심한 우울증으로 작곡가로서 깊은 슬럼프를 겪다 달 박사의 최면치료와 암시요법으로 회복했다. 이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해 달 박사에게 헌정했다.’는 내용 정도만 있는데, 이걸 이렇게 드라마틱하게 풀어낼 줄이야.
다구역 11열 4 : 그 드라마틱한 이야기에 귀에 익숙한 라흐마니노프의 슬프도록 아름다운 선율이 절묘하게 녹아들었으니 감동이 커질 수밖에. 사실 <살리에르>는 인물은 유명하지만 그의 음악은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아서 ‘좋은 넘버’ 이상의 효과는 낼 수 없었고, <파리넬리>는 ‘울게 하소서’ 한 곡에 지나치게 힘이 실려 있었다면 <라흐마니노프>에서는 그의 음악을 기반으로 극에 맞게 많은 변형이 이뤄졌는데도 마치 전체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으로 채워진 듯 풍성하잖아.
다구역 11열 3 : 무대 위 피아노와 현악 4중주가 큰 몫을 했어. 풍성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 라흐마니노프 연주회에서 자연스레 그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듯했어. 실제로 이번에 가장 인기 있었던 사람이 배우들이 아니라 피아니스트 이범재 씨였다고 하더라고(웃음). 개인적으로는 라흐마니노프 역을 맡은 박유덕, 안재영 배우가 실제로 피아노 연주를 잘 하니까 극에 훨씬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아.
다구역 11열 4 : 너무 욕심 부리지 않은 것도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해. 예를 들어 ‘보칼리제’ 같은 경우 라흐마니노프가 즈베레프 교수의 무덤을 찾아가는 장면에서 허밍으로 처리하잖아. 그걸로 끝이라고. 즈베레프 교수가 라흐마니노프를 꾸짖듯이 ‘이것도 할 수 있고 저것도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모든 걸 끌어안지 않고 과감히 뺀 점이 작품의 수준을 훨씬 높였어.
다구역 11열 3 : 극 자체도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 1번에 실패한 뒤 피아노 협주곡 2번으로 재기하기까지 3년에 집중했고. 보통 실존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다 보면 연대기적으로 극을 풀어나가다 결국 인물에 대한 요약 노트 같은 느낌을 줄 때가 많은데 말이야. 캐릭터 해석도 좋았어. 실제로 라흐마니노프는 키가 190cm에 한 번에 피아노 13도 음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손이 큰 거구인 데 반해 성격은 꽤 소심했다고 해. 예민한 라흐마니노프와 호탕하고 가벼운 것 같으면서도 진지한 달 박사. 특히 달 박사가 무척 매력적인 배역이었던 것 같아. 김경수, 정동화 배우가 잘 소화하기도 했고.
다구역 11열 4 : 맞아, 내가 배우라도 달 박사 역이 탐났을 것 같아. 두 배우가 달 박사와 함께 연기했던 즈베레프 교수 말이야. 성격이 무척 다른 것 같지만 달 박사와 즈베레프 교수도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프로이트에게 가렸던 달 박사는 긍정과 격려로 라흐마니노프를 치료한 데 반해, 차이콥스키에게 밀렸던 즈베레프 교수는 엄격하고 혹독하게 라흐마니노프를 가르쳤지. 하지만 두 사람이 진심으로 바랐던 것은 결국 라흐마니노프를 통해 스스로의 열등감을 만회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자신의 방식이 경쟁자의 것보다 ‘맞다’는 것을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싶었을 거야.
다구역 11열 3 : 그렇다면 그들 역시 부분적으로나마 성공한 셈이지.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에게 ‘나는 사랑 받는 음악가입니다. 새로운 곡을 쓰면 관객들이 나를 사랑해 줄 겁니다.’라고 자기 암시를 하게 하잖아. 결국 라흐마니노프는 치유돼서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완성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았고, 이후 러시아를 대표하는 낭만주의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세계적으로 사랑받았으니 즈베레프 교수의 엄격했던 가르침도 빛을 발한 셈이고.
다구역 11열 4 : 그래서 이 작품에서는 ‘왜’라는 대사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 왜 즈베레프 교수가 라흐마니노프에게 그렇게 엄격했는지, 왜 라흐마니노프가 이른 나이에 모든 것을 쏟아 부어 교향곡 1번을 작곡할 수밖에 없었는지, 왜 달 박사가 라흐마니노프를 치료하려고 했는지. 그 ‘왜’라는 이유 때문에 모두가 힘든 길을 걷고, 그 ‘왜’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해 싸우다 결국 화해하게 되잖아. 서로 그리고 스스로도.
다구역 11열 3 : 나는 따뜻한 말 한 마디, 긍정의 힘, 자기최면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이 사람들을 위로하고, 이 작품이 관객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말이야.
다구역 11열 4 : 중요해. 그런데 ‘왜’라는 것을 직면한 뒤에야 본격적인 치유가 가능하지 않을까. 라흐마니노프와 달 박사 역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그 ‘왜’가 어떤 식으로든 들춰진 다음에야 더 가깝게 소통하게 되잖아. 그래서인지 나는 라흐마니노프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쏟아낸 뒤 오열할 때 달 박사가 어깨를 조심스레 토닥이는 장면에서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
다구역 11열 3 : 하긴 우리 모두에겐 저마다의 ‘왜’가 있겠지. 이렇게 살아가고 있는, 이럴 수밖에 없는. 누구에게도 말 못할, 하지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은,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는...
다구역 11열 4 : 그래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가 감동적이었다고. 유명한 예술가, 그 작품에 깃든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삶의 굴곡, 그래서 더욱 와 닿는 예술작품. 어쩌면 뻔한 공식이지만, 공식대로만 해도, 너무 거창하지 않아도 이렇게 멋진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걸 보여줬잖아. 달 박사는 라흐마니노프의 ‘마음의 소리’를 들었고,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마음의 소리’를 관객들에게 음악으로 들려준 셈이야.
다구역 11열 3 : 그래, 그래서 연일 S석 구하기도 쉽지 않은가봐. 다음에는 어떤 예술가의 삶이 무대에 오를지 벌써 궁금하네. 그런데 그때는 캐스팅이 좀 달라지겠지(웃음)? 워워, 물론 나도 이 배우들 좋아하지만, 요즘 일부 제작사 작품에 특정 배우들이 반복적으로 출연하는 거... 산뜻하지는 않잖아?!
관련태그: 라흐마니노프, 뮤지컬,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피아노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