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에 잠식당한 이들을 위해 - 뮤지컬 <라흐마니노프>
아름다운 선율과 비밀스러운 이야기, 그 속에 담긴 따뜻한 위로!
라흐마니노프의 잃어버린 3년, 그의 곁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라흐마니노프, 그의 두 손이 얼어붙은 이유
러시아의 대표적인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우리에게는 드라마 <밀회>, 영화 <호로비츠를 위하여>,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다빌레> 등을 통해 친숙한 그의 음악과 삶이 무대 위에 올랐다. 바로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다.
작품은 라흐마니노프의 ‘두 손이 얼어붙었던’ 시간에 주목한다. 어린 나이에 「교향곡 1번」을 발표했던 라흐마니노프는 쏟아지는 대중의 혹평 속에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했다. 신경쇠약이 심해져 작곡 활동이 불가능해졌고 3년 동안 세상과 담을 쌓은 채 지냈다. 이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발표하고 재기에 성공하기까지, 그의 곁을 지킨 한 사람이 있었다. 정신의학자 ‘니콜라이 달’ 박사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떤 이야기와 시간이 존재했던 걸까. 그들에 관해 전해지는 내용이라고는 ‘니콜라이 달 박사가 라프마니노프를 치료했다’는 단 한 줄의 기록뿐이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이 짧은 문장이 다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 혹은 그 안에 응축된 무수히 많은 감정들을 파고든다.
이야기는 라흐마니노프의 「교향곡 1번」이 초연되던 순간에서 시작된다. 무대 위로 쏟아지는 차가운 시선들,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을 마주하며 라흐마니노프는 절규한다. 이후 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스스로를 유폐시킨 그의 앞에 니콜라이 박사가 나타난다. 라흐마니노프의 사촌 형인 알렉산더 실로티의 부탁을 받고 치료를 위해 찾아왔다는 그는 치료가 끝나기 전까지는 떠날 수 없다고 선언한다. “날 환자 취급하지 마”라고 외치는 라흐마니노프는 강경한 태도로 치료를 거부하지만, 결국 니콜라이 박사를 떠나 보내기 위해 치료에 응한다.
치료가 진행될수록 니콜라이 박사는 라흐마니노프의 기억 속으로 초대된다. 라흐마니노프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과거를 거닐고, 그 곁에 니콜라이 박사가 함께 걷는다. 그 속에는 라흐마니노프가 처음 음악과 만났던 순간이 있고, 그의 재능이 인정받고 부정당하기를 반복했던 시간들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니콜라이 박사는 ‘왜’ 라흐마니노프가 교향곡을 작곡하려 하는지, 교향곡을 들려주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에 주목한다. 그를 향해 라흐마니노프는 묻는다. 당신은 ‘왜’ 나를 치료하려 하느냐고. 두 사람은 이제 자신을 향해 질문의 화살을 겨눈다. 나는 왜 교향곡을 쓰려 하는가. 나는 왜 그를 치료하려 하는가. 정답에 가까워질수록 두 사람의 거리도 점점 좁혀진다.
절망에 잠식당한 이들을 위하여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전설적인 음악가의 감추어진 시간에 관한 이야기인 동시에, 그 시절의 라흐마니노프처럼 절망에 잠식당한 이들을 위한 이야기다. “당신은 새로운 곡을 쓰게 될 거예요. 새로운 곡을 쓰게 되면 관객들이 당신을 사랑해줄 겁니다”, “당신은 이미 사랑 받는 음악가입니다”라는 니콜라이 박사의 말이 라흐마니노프를 통과해 객석까지 전해지는 까닭이다. 나 자신조차 나의 가치를 의심하게 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이야기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지금 그대로도 충분하다고, 분명 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속삭여주는 목소리가 필요할 뿐.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작지만 절실한, 그 하나의 속삭임으로 기억되는 작품이다.
잘 만들어진 2인극이 그러하듯 <라흐마니노프>는 강한 흡인력을 자랑한다. 라흐마니노프와 니콜라이 달, 단 두 명의 배우만으로도 무대가 꽉 찬 느낌을 준다. 생에 가장 어두운 시간을 지나고 있는 라흐마니노프의 비통함과 능청스러운 듯 허를 찌르는 니콜라이 박사의 경쾌함이 조화롭게 어우러진다. 그 결과 이야기는 너무 무겁지도 않고 너무 가볍지도 않게 흘러가면서 서서히 무게를 더해간다. 라흐마니노프 역의 배우 박유덕과 안재영, 니콜라이 달 역의 배우 김경수와 정동화, 네 명의 배우 ‘빈틈없는 호흡’을 보여주는 덕분이다.
뮤지컬 <라흐마니노프>에는 또 다른 주인공들이 숨어있다. 라흐마니노프의 명곡들을 라이브로 들려주는 연주자들이다. 팝 피아니스트 이범재와 7명의 현악 연주자들로 구성된 5인조 오케스트라는 클래식 공연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생생한 음악을 들려준다. 그들의 연주는 라흐마니노프의 목소리가 되어 관객을 향해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아름다운 선율과 비밀스러운 이야기, 그 속에 따뜻한 위로를 담아낸 뮤지컬 <라흐마니노프>는 오는 25일까지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에서 관객들을 기다린다.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