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친지 도움 없이 둘째 낳기
돌이켜보면 첫째 출산은 일도 아니었다
둘째 출산은 첫째와 달랐다. 첫째라는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다. 엄마는 회복에 전념해야 하는데, 첫째는 엄마를 찾는다. 아빠는 출근해야 하므로 종일 첫째를 볼 수는 없다. 어떻게 하지?
뽀로로친구들도 첫째의 마음을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얼마 전 둘째가 태어났다. 재생산에 참여한다는 거창한 명분은 아니고, 그냥 어쩌다 보니 대한민국 평균 출산율을 상회하는 자녀를 품었다. 어쩌다 보니, 라는 표현에서 짐작하듯 출산 이후 계획은 그렇게 치밀하게 세워두지 않았다. 물론 대략적인 시나리오는 있었다. 엄마는 일반적인 산후조리원(대개 산후조리원은 남편만 출입이 허용됨)이 아니라 누구나 언제든 자유롭게 오갈 수 있는 병실조리를 2주간 거친다. 29개월 된 첫째를 어린이집 종일반에 맡긴다. 아빠는 첫째 등하원을 담당한다. 병실조리 기간 세 가족은 병실에서 함께 잔다. 주말은 아빠가 첫째를 데리고 뽀로로파크를 가든 어떻게든 시간을 보낸다. 최대한 양가 친지 손을 안 빌리기 위해서였다.
둘째는 월요일에 태어났다. 다행스러웠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출산 시 보장되는 남편 휴가는 최소 3일인데 사용일수에 휴일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30일 이내에 사용 가능하기에 일정을 잡기에 따라 토/일을 빼면 된다고 하지만 산모가 회복하는 데 가장 필요한 시간은 출산 직후이므로 대개는 출산과 동시에 사용한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따로 있는데, 평일은 어린이집에서 일정 시간 첫째를 맡아줄 수 있어서다. 가장 완벽한 장면은, 첫째가 어린이집에서 즐겁게 놀 동안 엄마가 4시간 진통 끝에 분만에 성공하고, 아빠가 첫째를 어린이집에서 데리고 와서, 약간은 피로해보이지만 어느 정도 회복한 엄마와 함께 온 가족이 새 생명 탄생의 기쁨을 나누는 그림이다.
거의 비슷한 그림으로 상황이 전개되긴 했는데, 둘째가 태어난 때가 밤이라 첫째와 나는 병원에 가는 대신 집에서 자기로 했다. 아빠와 아기 둘만 자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설레지는 않았다. 그저 두려울 뿐. 혹시 첫째가 엄마 찾느라 밤새 울지나 않을까 무서웠다. 엄마 생각나지 않도록 소시지와 아이스크림과 과자를 듬뿍 줬다. 평소에 둘째 탄생에 관해 말해두는 게 좋다고 하여 수백 번 반복하긴 했지만 적어도 그날만은 동생의 존재에 관해 일체 말하지 않았다. 곧 동생이 생기고, 잠시 엄마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멀리 봐선 부려 먹을 수 있는 동생이 생기는 게 너에게 좋으리라는 말은 속에 묻었다. 어차피 말해봤자 생명의 탄생을 이해하기에는 턱없이 어린 첫째였다.
첫째는 다행스럽게도 엄마 없는 밤을 참아냈고 다음 날, 조금 울긴 했지만 어린이집 등원도 별 탈 없이 해냈다. 첫째를 어린이집에 맡긴 뒤 병원을 찾아 둘째와 아내 얼굴을 보고, 병실에서 보낼 수 있도록 짐을 옮겨놨다. 병실에 들어선 순간 걱정이 앞섰다. 무엇보다 침대가 작았다. 산후조리원에 흔히 놓여 있는 퀸 사이즈 침대가 아니었다. TV 채널도 공중파가 유일했다. 유투브로 뽀로로나 콩순이 혹은 타요를 틀어주겠다는 부부의 계획은 틀어졌다. 그래도 시도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세 식구가 잤고, 역시나 좁은 침대에서 첫째와 엄마는 숙면을 취하지 못했다. 그렇게 첫째와 아빠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엄마를 병원에 두고 아빠와 첫째가 집에서 버텨보기로 했다. 아빠에게 주어진 3일 출산휴가는 빠르게 흘러갔다. 아빠가 출근할 때 뽀뽀뽀는커녕 첫째는 어린이집 등원을 온몸으로 거부했다. 할 수 없이 회사에 하루 더 휴가를 더 쓰겠다고 보고했다.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건 좀 아닌 거 같아. 첫째가 엄마를 너무 보고 싶어 해.”
1주일 병실 조리 기간이 남았지만 일요일에 아내는 퇴원 수속을 밟고 둘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길고 긴 한 주가 지나가나 싶었다. 엄마가 와서 심리적으로 안정되었는지 첫째는 어린이집 등원을 거부하지 않았다. 나도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회사로 출근했다. 점심 시간. 어린이집에서 전화가 왔다.
“미열이 나는데 입안에 수포도 조금 보이네요.”
하필 이럴 때 첫째가 수족구에 걸렸다. 수족구는 대개 1주일 정도 지속되는데, 전염성이 강하다는 게 무엇보다 문제였다. 1주일은 어린이집에 갈 수 없는 상황. 아직 몸을 완전 회복하지 않은 아내가 아기 둘을 보는 건 무리. 친정 어머니에게 손길을 요청했다. 장모님이 오시고 나서야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처음에 계획했던, 주변 친지 도움 없이 둘째 낳기는 결국 실패했지만 상황이 상황이라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길고도 긴 월요일을 마무리하며 부부는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 닥쳐올 육아가 결코 쉽지 않겠지만, 정신 승리로 잘 해쳐나가자고. 아마 우리는 전생에 저들의 자식이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우리의 엄마 아빠는 전생에 우리 자식이었을 테고. 그렇게 무한으로 거슬러 오르다 보면 누가 누구의 엄마이고 아빠이고 자식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는데, 아내가 명쾌하게 결론지었다.
“어쨌거나 전생에 지은 업보가 없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을 거야.”
불교 세계관에서 업은 핵심 개념이다. 업에 따라 내생이 정해진다는 세계관은, 때때로 왜 악한 사람이 벌받지 않고 선한 사람은 비참하게 사느냐를 설명하는 데 유용하다. 전생에 쌓은 업보 탓이니라. 물론 자아가 없다 ? 무아는 불교와 브라만교가 결별하는 주요 지점이기도 하다 - 는데 윤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업과 윤회로 처음? 실제로 불교에서는 세상의 시작을 ‘무시이래’로 이야기한다 -을 설명할 수 있나, 문자 그대로의 전생과 내생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없지 않나, 등과 같은 복잡한 문제는 제쳐둬야겠지. 그저 우리 부부는 앞으로 육아에서 어려울 때마다 업을 떠올리기로 했다. 맞아, 전생에는 너희들이 나의 똥오줌을 받아냈지…
그리하여 요즘 나의 목표는 가능하면 업을 짓지 말자인데, 동생을 향한 질투와 어느 정도 몸싸움이 가능한 근력을 무기로 자주 양육자와 대립하는 첫째와 지내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최근에는 울고 보채고 버티는 첫째에게 성숙한 인간이라면 차마 하지 말아야 할 ‘입 닫아’라는 말까지 뱉어버렸다. 아내가 와서 거리낌 없이 내 등짝을 손봐줬는데, 맞을 만했다. 이렇듯 쉴 새 없이 구업(口業)을 짓고 있는지라, 『못 참는 아이 욱하는 부모』를 사버렸다. 비록 언제 다 읽을지는 모르지만…
티끌 모아 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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