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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나여도, 그게 진짜 나인걸

보답받기 위한 관심과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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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의 사랑은 단계를 거치며 진화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안정감으로 형태를 바꿔 나가야 했다. 여전히 그에게 설레는 것은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 남자를 믿지 못한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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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존감을 키우기 위해서는 나의 노력만큼이나 주변의 도움도 필요하다. 내가 ‘내 편’이 되어 나를 끊임없이 북돋아주는 것만큼 나를 믿고 사랑해주는 존재가 있을 때 자존감은 훨씬 더 수월하게 부풀어 오른다. 어린 시절 부모에게서 건강하고 지혜로운 사랑을 받으며 자랄 수 있는 환경에 있었던 사람은 자존감이 잘 발달해 있다. 그러나 자존감 형성에 좋은 영향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해서 가망 없는 것은 아니다. 부모 이외의 친밀한 관계에서도 얼마든지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항상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길 바라는 구제불능의 연애주의자였던 나는 연애를 통해서 나의 자존을 키우려고 시도했던 것 같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연애를 하는 동안 애정을 쏟고 달래주고 보살펴주며 휴식처가 되는 일은 서로가 서로에게 해준 것이 아니라 내가 그에게 일방적으로 쏟은 에너지였다. 물론 그것은 상대에 대한 애착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와 만난 지 3년이나 지났는데도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심장이 두근거려요.” 연애 근황에 대해 묻는 사람들 앞에서 나는 눈을 하트 모양으로 만들며 몇 년 동안 변함없는 설렘을 내 열정의 증거이자 자랑처럼 늘어놓았다. 그것은 일종의 비정상, 병증이었다. 격정의 사랑은 단계를 거치며 진화해야 한다. 서로에 대한 믿음과 안정감으로 형태를 바꿔 나가야 했다. 여전히 그에게 설레는 것은 연인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이 남자를 믿지 못한다는 증거일 뿐이었다.
 
그에 대한 나의 헌신적인 관심과 사랑은 결국 보답받기 위한 것이었다.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 받으려 했고 그에 대한 기대가 바탕에 한가득 깔려 있었다. 그것이 좌절될 때마다 요동치고 격정적인 순간을 만들어내 그의 감정을 확인하려 했다. 불안이 극에 치달을 때는 섹스를 이용해서 그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다고 관계가 나아지진 않았다. 같은 패턴의 반복, 그와 그렇게 부딪히게 될 때마다 심장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겪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일 때마다 자존감도 같이 갉아 먹혔다. 특히 내 연애는 실패로 끝날 수 없다는 강박 때문에 문제 상황을 인지했으면서도 괜찮은 척 버텨냈다. 자존감이 서서히 바닥을 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스스로 만든 것이다. 그에게 과하게 의존하고 매달리는 입장이 되었다는 게, 전형적으로 연애 문제를 겪는 여자들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자존심도 상할 수밖에 없었다.
 
연애가 내겐 마치 육아나 나름 없는 일이었다. 모성을 품은 엄마의 기분으로 연애를 했다.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내 안의 아이는 방치해 두었고 어린애 같이 사랑받고 싶은 내 마음은 성숙하지 못한 태도라고 부정하면서 내가 더 그를 아끼고 사랑하면 괜찮을 거라고 자신을 속였다. 그를 키운다고 열심히 키웠으나 어째서인지 하나도 자라지 않았고 오히려 내게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이 관계에서 나의 에너지만 소모되어 지쳐버리자 그만둘 때가 왔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런 식의 연애를 몇 번이나 반복했던 것 같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내가 어떤 걸 원하고 바라는지 직면하게 되었다. 연애를 하다 상처입고 무너지고 산산조각 나긴 했지만 그 경험을 통해서 내 안에 어떤 것이 들어있고,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넌 나를 위해 인내하고 감수하고 희생하는 것처럼 연기하는 것뿐, 결국 너밖에 사랑하지 않잖아. 널 채워주기엔 너의 기대가 너무 높아서 나는 벅차. 항상 모자란 인간이 되는 기분이야.” 그런 말을 들었을 때 이런 비난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늘 계획은 원대하고 실천은 며칠 지속하지 못하는 그를 지지하고 기운을 낼 수 있게 응원했던 건 나였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나 싶었다. 하지만 내가 그의 이면까지 파악하듯 그 역시 나를 읽어낼 수 있는 가장 친밀한 사람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나의 치부가 발설되는 것, 내상은 깊게 입어도 나를 직면하는 방법이었다. 그게 결국 나라는 걸 인정해 나가는 과정이 연애였다. 그리고 전형적인 여성성에서 벗어나 과도한 모성을 내세우지 않는 관계가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연애하지 않을 때의 내가 가장 평온하고,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스스로 빛났다. 잘못된 방식의 연애를 했던 탓에 연애 자체가 자존감을 키워 주는 데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변덕스럽게 높낮이를 만들어내서 오히려 힘에 부쳤다. 그럼에도 그 경험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고 같은 실수를 되도록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자존감의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는 격정이 아닌 소소한 충만감이 있는 동지애 가득한 연애를 지향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과거의 실패는 의미가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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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현정(칼럼니스트)

사랑하거나 글을 쓰며 살고 있습니다. 『사랑만큼 서툴고 어려운』, 『나를 만져요』 등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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