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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어떤 시집이 좋아?

때론 짧은 어느 시 한 구절이 평생의 밑거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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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기억 나세요? 그때 서정의 시대 온다고 하셨던 거요.” 하지만 올해부터는 그런 장난도 치기 어려워졌다. 최근 나는 선생님의 취중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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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한 해가 버겁다 싶어지면 어느 샌가 여름이다. 종종 숨막히는 무더위에 빨리 이 계절이 지나갔을 때도 있지만, 나는 여름이 좋다. 좋아하는 사람들을 ‘한 해의 반절’이 지났다는 핑계를 삼아서 만날 수 있으니. 대학시절의 나에겐 흠모하는 선생님이 있었다. 선생님은 시를 공부하시는 분이었고, 나는 그녀가 골라준 시를 읽으며 한 계절을 담았다. 수업이 끝나고도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 종강 핑계를 댔다. “여름이고 더우니 우리 반 사람들 함께 막걸리 마셔요.” 선생님은 흔쾌히 장소를 정했고, 우리는 그날 그곳에서 흠뻑 취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얼만큼 마셨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즈음, 선생님께서 나지막이 중얼거리셨다. “이제 서사의 시대가 끝나고 서정의 시대가 올 거야.” 그땐 도무지 무슨 말인지 잘 몰랐었다.

 

서사가 소설이고, 서정이 시라는 답안은 도식적이지만, 알 수 있었다. 선생님은 그 누구보다 시를 읽는 시대가 오길 바라고 있다는 걸. 지금도 나는 선생님을 가끔 놀린다. “선생님, 기억 나세요? 그때 서정의 시대 온다고 하셨던 거요.” 하지만 올해부터는 그런 장난도 치기 어려워졌다. 최근 나는 선생님의 취중 예언이 실제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첫 시작은 이랬다. 6월 중순쯤 책을 전혀 안 읽던 친구가 갑자기 얼굴을 붉히며 내게 물었다. “유리야, 요즘 어떤 시집이 좋아? 너 많이 읽잖아.” 그 순간 화들짝 놀랐다. (친구야, 미안하다.) 그리고 뒤늦게 엄청 반가웠다. 친구가 내게 시집을 물어보다니! 가만 생각해보니 불과 1여년만에 많은 지인들이 시집 추천을 받아갔다. 올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가. 작년 말쯤 <비밀독서단>이라는 프로그램이 인기가 많았고, SNS를 통해 좋은 시 구절에 ‘좋아요’가 많이 찍히긴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2016년 시집의 판매량을 직업정신 발휘하여 찾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2016년 상반기에는 시집이 많이 팔렸다. 2015년 상반기 대비해서 판매권수가 63.1% 증가했으니 두말해서 무엇 하랴. 물론 초판본의 열풍과 SNS에서 인기를 끌은 시인들, 필사책 등이 윤활유로서의 큰 역할을 해주기도 했다. 그러나 베스트셀러에 가려져서 보이지 않은 여러 시집들의 판매량도 올랐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희지의 세계』뿐만 아니라 『빈 배처럼 텅 비어』, 『인간이 버린 사랑』, 『잘 모르는 사이』 등 최승자, 정끝별 시인 뿐만 아니라 황인찬, 박성준, 이이체 시인의 시집도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럼 어떤 독자들이 시집을 고른 걸까? 베스트셀러 대부분을 차지한 초판본, SNS 인기 저자, 필사책, 엮은 책들을 다 제외하고 살펴봤다. 시를 찾는 주 독차증은 3040 여성들. 기존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30대 여성이 23.4%였고, 40대 여성이 20.5%였다. 하지만, 내가 반가웠던 건 20대 여성 15.5%, 30대 남성 15%라는 숫자였다. 이는 전체 2016년 상반기 해당 성연령별 판매권수 점유율보다 3~8% 높았다. 젊은 층이 시집을 많이 사본다는 증거였다. 나 역시 좋아하는 시인들이 2016년에 많이 시집을 내주어 행복했던 상반기였고, 시집을 찾는 지인들이 많아진 것도 체감하던 찰나였다. 하지만 데이터를 직접 내 눈으로 확인해보니 ‘서정의 시대’란 말이 낯설지만은 않게 느껴진다고 말하면, 너무 오버하는 걸까.

 

그럴 수도 있겠다. 얼마 되지 않는 숫자로 놀라고, 신기해서 데이터를 좀 더 뒤져보는 내가 오버하는 걸 수도. 그럼 뭐 어떠한가?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눈이 가서, 목록을 다 일일이 따서 살펴보는 노가다 작업도 재미있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시집 제목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시집 제목들은 하나 같이 정말 ‘시’ 였으니까.

 

즐거운 노가다를 하게 해준 친구에게 나는 시집 몇 권을 추천했다. 나도 좋아했었고, 여전히 생각 날 때마다 들춰보는 시집들로 말이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를 모르고』, 『오늘 아침 단어』,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타인의 의미』. 이 글을 읽어보는 분들도 꼭 읽어봤으면 한다.(이미 읽으셨다면 생각나신 김에 책장에서 다시 꺼내서 읽어 봐주시길.) 시를 읽기 시작한 초심자라면 예스24 문학 MD 추천이나 시인이 운영하는 ‘위트 앤 시니컬’에 방문해봐도 좋을 듯 하다.

 

때론 짧은 어느 시 한 구절이 평생의 밑거름이 된다. 내가 추천한 위 시집들도 내 친구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바람은 실제로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시는 우리가 ‘이름을 불러보기 전에/사라져버린 것들’을 품고 있으니. 어떤 까닭에서든 좋으니 아무 빗장 없이 친구가 그녀를 두들기는 시어들을 맞아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다시 나를 만났을 때, 또 물어 봐줬으면 좋겠다. “유리야, 요즘은 어떤 시집이 좋아?” 아직 그녀에게 못 말해준 시집들이, 시인들이, 언어들이, 그리고 그들이 이루고 있는 세계들이 너무나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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