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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재혼을 해서 행복한 더글라스 케네디

오늘도 왁스광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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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 케네디의 에세이 『빅 퀘스천』을 읽었다. 굉장히 솔직한 작가였다. 때로는 너무나 솔직해, ‘어이. 그런 이야기쯤은 세련되게 우회적으로 말하라’고 하고 싶었으나, 런던에 있는 그가 내 말을 들을 리 없다. 이렇게 썼는데, 방금 그가 내한했다는 기사를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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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10.
 
설 연휴를 맞아 아내와 <쿵푸팬더3>를 봤다. 4DX로.


두당 일만 팔 천원을 지불하고 앉아야 했던 4DX 전용 의자는 수면 중인 소설가에게 물을 뿌려댔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착란증에라도 걸렸는지, 내 몸을 상하좌우로 격렬히 흔들어댔다.
 
우리는 테러의 시대에 살고 있다. 지구적 수준의 테러는 편재해있다. 이와 동시에 일상의 폭력은 점차 소멸돼가고 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여러 계급사회에서 상존했던 폭력은 점차 사그라졌다. 즉, 거대한 폭력은 타국에 있고, 사소한 폭력은 4DX 전용관 의자에 응집돼 있다.
 
우리 부부는 삼만 육천 원을 지불하고 두 시간 동안 전기의자 위에 앉아(실제로 전기로 작동된다) 사소한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다행히 아내가 표 값을 냈다.
 
*
여보, 그저께 설거지하기 싫다고 투정부려 미안해요. 오늘 거실 바닥에 왁스광 내놓았어요.
 


2. 15.
 
더글라스 케네디의 에세이 『빅 퀘스천』을 읽었다. 굉장히 솔직한 작가였다. 때로는 너무나 솔직해, ‘어이. 그런 이야기쯤은 세련되게 우회적으로 말하라’고 하고 싶었으나, 런던에 있는 그가 내 말을 들을 리 없다. 이렇게 썼는데, 방금 그가 내한했다는 기사를 봤다.
인생은 속단할 수 없다. 
 
더글라스 케네디에게 다소 미안한 말이지만, 『빅 퀘스천』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더글라스는 재혼을 해서 행복하다.’


그는 무려 300쪽에 걸쳐, 왜 자신이 이혼을 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혼을 한 뒤 얼마나 큰 해방감을 느꼈는지 설명하는데 자신의 훌륭한 문학적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결혼한 지 불과 두 달 밖에 안 된 나에게는 시기적절하지 못한 독서였음을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에야 깨달았다. 아울러, 결혼한 지 불과 두 달 밖에 안 된 나는 역시 시기적절하지 못한 만남을 지난주에 가졌는데, 당시 만난 한 웹툰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은 좋지. 그런데, 이혼은 더 좋아. 마치 여행이 좋지만, 집에 돌아오면 더 좋은 것처럼 말이야.”
 
세상에는 자신의 주장을 그럴싸하게 전개할 줄 아는 천재들이 널려 있다. 아울러, 세상에는 직접 증명해볼 수 없는 가설들이 존재한다.
 
그나저나, 이 책에서 훔칠 기술은 두 가지.

 
하나, 더글라스 케네디는 어떤 이야기를 전개하다가 갑자기 과거의 한 사건을 언급한다. 그러고선 약 150여 쪽 정도를 다른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완전히 또 다른 이야기들을 무수히 거치다가, ‘자, 그럼 아까 했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고 말한다. 물론, 여기서 ‘아까’라고 언급한 그 이야기는, 무려 150여 쪽 전의 그 이야기다. 셜록 홈즈의 『주홍색 연구』에도 이런 기법이 차용돼 있으나, 차이점이 있다면 더글라스 케네디는 코난 도일보다 더욱 과감하게(아니, 더 뻔뻔하게) 자그마치 150 페이지 후에야 이전 이야기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둘, 그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단 하나의 대사를 인용하기 위해, 무려 열 줄에 가까운 수식어구를 헌사했다. 시상식에서 수상자를 발표하기 전 드럼을 오랫동안 치는 것처럼 말이다.
 
훔칠 것을 선사해주었으므로, 그의 대표작 『빅 픽처』 역시 읽어볼 것이다. 
 


2.23.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서 내가 활동하는 밴드 ‘시와 바람’의 이달치 앨범 저작권료를 입금했다.  447원이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연중 대부분의 시간을 해외에서 체류하다, 영감을 받으면 소설을 쓴다고 한다. 다른 일도 하지 않는다. 부럽다. 이혼도 했다(마지막 문장은 그냥 붙인 말이다).
 
*
여보 오해하지 마요. 왁스광 또 낼게요. 
 


2. 25.

『빅 픽쳐』를 읽었다 이 소설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우선, 묘사가 세밀하다. 예컨대, 헤밍웨이의 소설이라면 ‘정청래는 열정적으로 말했다’ 정도의 간단한 문장도, 이 소설에서는 ‘역동적으로 말하기 좋아하는 정청래는 말하는 동안 팔을 움직이기 편한 에스띠라 양복을 입고 등장한 후, 연설대에서 서서 구강근육만 쓸 요량인지 눈썹이나 안면근육 따위는 테이프로 고정 시킨 듯 주위를 둘러보고선, 빠른 속도로 침을 튀기며 말을 했는데, 그것은 알고 보니 말하는 동안 화장실을 가지 않기 위해 신체의 수분을 침으로 분출해내는 것이었다’ 와 같이 쓰여 있다(물론, 내가 이해한 방식대로 재창조한 것이다).
 
어느 정도 읽다보면 이 장황한 서술에 적응이 되는데, 중요한 것은 긴박한 상황에서도 묘사를 세밀히 하기 때문에 빨리 읽어낼 수밖에 없다. ‘아! 이 묘사!’하며 잽싸게 읽고 이야기의 핵심을 파악하려 하는데, 그럴수록 페이지는 더 빨리 넘어간다. 페이지가 마구 넘어가니, 자연스레 소설이 재미있다고 여기게 된다. 더글라스 케네디는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한국 속담을 아는 것일까. 한국 속담도 아는 더글라스 케네디가 부럽다.
 
그렇다. 소설은 서두를 필요가 없다. 서두르지 않는 기술법을 훔치기로 했다. 카사노바들이 전희에 충분히 시간을 할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 다른 특징은, 지나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해서 ‘별 것 아니겠지’하며 빨리 넘기며 읽었던 장치들이 후반부의 사건 해결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런 책을 한 권 읽고 나면, 무수한 디테일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작가와 두뇌 게임을 하는 기분이다.
 
게다가, 독자가 기대하는 결말과 다른 대안을 제시하며 이야기를 끝낸다. 이러한 전개는 독자의 서사적 상상력을 개발하는데, 결국은 소설에 더 적극적으로 몰입시키는 역할을 한다. 더글라스 케네디. 부럽다(나도 해외에 가서 영감을 받고 싶다).


2. 26.

장편 소설 두 편을 카카오에 연재하기로 했다. 첫 연재물은 맥주를 소재로 한 정치소설이다. 소재가 맥주이다 보니, 아무래도 취재차 벨기에에 다녀와야 할 것 같다. 더글라스 케네디를 흉내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지만 맞다). 선인세보다 많은 돈을 쓰고 올 것 같다. 인세로만 사는 미국 작가 때문에 가랑이가 찢어질 것 같다. 『빅 픽쳐』를 괜히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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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 빅 퀘스천 <더글라스 케네디> 저/<조동섭> 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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