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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영석 연대기 (3) '아이디어는 자유롭게, 대신 쉬운 찬성은 말고'
찬성이든 반대든 중요한 건 표면이 아니라 그 맥락이다
사람들이 낯설어 하고 예측하지 못하는 그림에서 혁신을 읽고 성공의 감을 읽어내는 것은 나영석의 오랜 지론과 같다.
(‘많이, 멀리, 독하게’ 대신 핵심 콘텐츠를 ‘깊게’ : 나영석 연대기 (2)에서 이어집니다.)
자, 답은 나왔다. 더 많은 요소를 붙이는 것이 아니라 핵심 콘텐츠를 최대한 돋보이게 할 것. ‘인간’의 속내로 깊게 들어가는 것. 그렇다면 “우리도 나영석처럼 합시다”라고 외치는 것으로 혁신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한국에서 무엇인가 혁신하려는 이들이 흔히 저지르는 실수가 여기에 있다. 조직의 수장으로부터 “자, 지금부터 우리도 애플처럼 혁신합시다”라거나 “우리도 닌텐도 같은 게임기를 만들어봅시다”라는 식의 명령이 하달되면 혁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오류. 기한을 정해놓고 돈을 투자하면 기존의 조직문화 안에서도 혁신적인 무언가가 나올 수 있다고 믿는 기괴한 셈범. 이게 가능한 일이라면 세상살이가 한결 간단하겠지만, 불행히도 혁신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정답을 찾는 게 아니라고 모두에게 문을 열자
딴 짓조차 기획의 단초가 되었다
뛰어난 아이디어는 짜내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해서 짜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유롭게 의견을 말하고 들을 수 있는 분위기에서, 얼핏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의견을 낸다고 해서 그 의견만으로 질책을 당하거나 아예 묵살당할 일이 없는 환경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앞서도 강조했지만, 기왕에 존재하는 요소들은 다 저마다의 쓰임과 존재이유가 있어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제거하고 혁신하려면 기존의 질서에 과감하게 질문을 던질 수 있어야 하는데, 기존의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버티고 있는 환경에서 그게 가능할까? 서열 순으로 앉아 막내는 입을 떼기도 어려운 환경의 회의라거나, 기껏 입을 뗐는데 돌아오는 반응이 “그거 해 봤는데 안 되더라”라거나 “그 아이디어는 좋지 않다”라고 말을 막아버리는 분위기라면? 창의성은 분명 개인의 능력이지만, 그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은 조직의 능력이고 리더의 능력이다.
나영석이 기존의 예능을 구성하던 요소들에서 군더더기를 빼고 인간이라는 본질 안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던 비결 또한 여기에 있다.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사실이지만, 나영석은 가히 집착적으로 회의에 매달리는 사람이다. 그것도 뚜렷하게 정해진 주제가 있는 회의가 아니라, 아무 제약 없이 각자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는 종류의 회의. 당연히 효율성은 떨어지고 회의 시간은 길어지지만, 어떤 정답을 찾으려고 하는 회의가 아니라는 점이 이 회의의 비밀이다. 어떤 목표를 정해놓고 시작한 회의가 아니기에 비교적 부담 없이 아이디어를 던질 수 있고, 어떤 주제든 불이 붙은 김에 끝까지 논의해볼 수 있다. 혹시나 팀에서 연차가 낮은 스태프가 주춤거리며 말을 못 할 것을 염려해 상석을 피해 앉고, 말이 없으면 일부러 말을 걸어서라도 의견을 묻는다.
시작은 이런 집 한 채를 마련하자는 잡담이었다. 잡담을 해도 되는 분위기였기에 기획의 단초를 잡을 수 있었다.
<삼시세끼> ⓒCJ E&M. 2014
<삼시세끼>가 이런 식으로 시작된 프로그램이다. 지난 연재분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서울 동교동 미디어카페 후에서 열렸던 토크콘서트 ‘후아유’에 연사로 초대되었던 나영석은, <삼시세끼>는 애초에 프로그램을 기획하려다가 나온 아이디어가 아니라 제작진이 각자 필요할 때마다 콘도처럼 사용할 수 있는 공동 소유의 전원주택을 알아보던 것에서 출발했다고 밝힌 바 있다. 만약 이 팀이 단지 새로운 프로그램 기획에만 집중하자며 전원주택 이야기를 뒤로 미뤘다면 누구도 인터넷에서 귀촌 비용을 검색해보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생각보다 귀농귀?촌을 꿈꾸고 궁금해하며 정보를 구하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명확한 정답도 주제도 없는 회의이기에, 보통의 회의라면 ‘딴짓’ 취급을 당했을 만한 일이 기획의 단초를 제공한 셈이다.
찬성이든 반대든 중요한 건
표면이 아니라 그 맥락이다
최대한 자유롭게 발언을 독려하는 것이 아이디어의 문턱을 낮추는 것이라면, 회의에 참여하는 주체들에 대해 파악하고 그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은 아이디어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다. 나영석은 자신과 함께 일하는 팀원들의 성향을 파악하고 그들을 각 세대, 성별, 취향을 대변하는 이들로 상정한 채 회의 내내 이들의 반응을 살핀다. 물론 구하는 것은 모두의 찬성이나 지지가 아니라, 반응 그 자체다. 나영석은 주간지 <시사IN>과의 인터뷰 중 기획단계에서 <삼시세끼>를 좋아한 건 자신과 이우정 작가 둘 뿐이었다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대다수가 반대한다는 건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는 것이고 그만큼 새로운 기획이라는 뜻도 된다. 사람들은 익숙하지 않은 것에 거부감을 표시한다. 반대 또한 하나의 의견이다. ‘이 프로그램은 정말 새로운 프로그램이구나’ 하는 생각에 한 번쯤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시사IN> 388호 “‘삼시세끼’ 먹듯 회의하는 남자” 중)
팀원 대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윗사람이 책임지고 밀어붙이는 게 좋은 의사결정이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팀원들의 ‘반대’에서 ‘해볼 만한 일’이란 결론을 뽑아 내려면 그만큼 팀의 특성에 대해 꿰고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단순히 정서적인 반감인가? 프로그램의 소재가 부적절 해서 반대하는가? 이들이 대변하는 계층은 어떤 이들이고 이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무엇이며 구체적으로 어떤 맥락에서 이 의견에 반기를 드는 것일까? 나영석은 오랜 회의 끝에 이들의 ‘반대’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이란 키워드를 읽고, 거기에서 다시 ‘새로운 기획’이란 답으로 도약했다.
“휴대전화가 없는 삶이라니, 어떤 그림이 나올지 머릿속에서 그림이 안 그려지지 않나.”
과연 나영석의 말처럼 <인간의 조건>은 쉽게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속내를 꺼내 보이며 정규편성에 성공했다.
<인간의 조건> ⓒ한국방송공사. 2012
사람들이 낯설어 하고 예측하지 못하는 그림에서 혁신을 읽고 성공의 감을 읽어내는 것은 나영석의 오랜 지론과 같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일화지만, 2012년 KBS를 퇴사하기 전 마지막으로 참여했던 파일럿 <인간의 조건> 기획 회의 당시, 나영석은 일상에서 스마트폰과 인터넷, TV를 뺀 삶을 실험해보자는 신미진 PD의 아이디어를 옹호하며 말했다. 뭐가 나올지 다 예상이 되는 것보다, 뭔지 모르겠다는 궁금증을 일게 하는 것이 더 성공 가능성이 있다고. 나영석은 그래서 반대에서 맥락을 읽었듯 찬성 또한 그 맥락을 살피고, 너무 쉽게 이룬 합의는 좀처럼 믿지 않는다. 아니, 아예 다 뒤집고 백지에서 새로 시작한다. 모두가 쉽고 빠르게 찬성하는 아이디어라는 것은, 회의에 참석한 이들이 대변하는 다양한 계층이 모두 머릿속에 쉽게 그려볼 수 있는 뻔한 그림이라는 뜻이니까. 뭐가 나올지 뻔히 그림이 그려지는 것은 혁신이 아니다. 그래서 찬성과 반대는 그 자체보단 그 맥락이 중요하다. 이 찬성이 익숙함에서 나온 게으른 찬성인가? 이 반대는 낯섦에서 나온 두려운 반대인가?
(다음 편에서 계속)
* 참고문헌:
서수민 CP가 밝힌 <인간의 조건> 탄생설화. 엔터미디어. 정덕현. 2013.02.02
<다큐처럼 일하고 예능처럼 신나게> 중앙북스. 정덕현. 2014
유호진 PD, 유튜브에서 뭐 봐요?. 시사IN 354호. 황용호 KBS PD
‘삼시세끼’ 먹듯 회의하는 남자. 시사IN 388호. 고재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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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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