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독서도 타이밍
타이밍이 안 맞아서 후회한 책 『뉴로맨서』와 만화 『아키라』.
어쨌든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 때문에 기시감을 대롱대롱 매달고 읽었지만, 두 작품 모두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20년쯤 먼저 태어났으면 훨씬 재미있었겠지!’하는 생각이 커진다.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어쨌든 인생도, 독서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한참 전에 <시계태엽 오렌지>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속눈썹을 거꾸로 붙인 주인공이 휘파람으로 ‘싱잉 인 더 레인'을 부르며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모습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뒤, 영화 <사랑은 비를 타고>를 봤을 때의 당혹감이란. 빗속에서 경쾌하게 춤추는 진 켈리는 근사했지만, 그 뒤를 흐르는 노래는 으스스했다. 그의 춤이 끝나기 전에 갑자기 유혈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을까 하고 마음 한 켠에서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물론 그 유명한 장면의 패러디를 본 적은 있었지만, 멜로디를 뚜렷하게 인식한 것은 시계태엽 오렌지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또, 패러디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이코>의 샤워실 비명 장면인데, 패러디를 먼저, 너무 많이 접했던 탓에 정작 영화를 봤을 때는 자넷 리의 비명을 들으면서도 ‘드디어 올 것이 왔군’ 하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이처럼 가끔 작품을 만나는 시점이 너무 이르거나 너무 빨랐다고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의 안타까움은 소설 『밤의 피크닉』에서, 『나니아 연대기』를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읽은 한 소년이 토로한 바 있다.
"마지막까지 다 읽었을 때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가 하면, 어쨌든 머리에 떠오른 것은 ‘아뿔싸' 하는 말이었어."
"아뿔싸?"
"응. ‘아뿔싸, 타이밍이 늦었다.'야. 어째서 이 책을 좀더 옛날, 초등학교 때 읽지 않았을까 몹시 후회했어. 적어도 중학생 때에라도 읽었더라면. 10대의 첫머리에서 읽어두어야 했어. 그랬더라면 분명 이 책은 정말 소중한 책이 되어, 지금의 나를 만들기 위해 뭔가가 되어주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 분해서 견딜 수 없어졌어. 사촌형은 아무 생각 없이 책을 주었던 게 아니었어. 우리 남매의 나이며 흥미 대상을 생각해서, 그때에 어울리는 책을 골라주었던 거야. 사촌형이 책을 주었을 때 바로 읽었더라면, 사촌형이 골라준 차례대로 순순히 읽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그만큼 분했던 일은 최근에 없었던 것 같아." -『밤의 피크닉』 (온다 리쿠) 중에서
솔직히 말해서, 내가 읽은 책에 비하면 앞서 예로 든 영화는 무척 양호한 편이다. 독서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지 않고 손이 가는 대로 책을 읽는 성격이라, 추리소설에서 전작의 범인과 트릭을 스포일러 당하거나, 까치발을 들 듯 어려운 책을 꾸역꾸역 읽었다가 뒤늦게야 오독했던 것을 깨닫고 부랴부랴 같은 책을 다시 찾기가 일쑤다(다행스럽게 『나니아 연대기』는 초등학교 때 읽었다).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이제는 책이든 영화든 웬만큼 순서가 잘못 되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데, 그래도 타이밍이 안 맞아서 후회한 책이 두 권 있다. 바로 소설 『뉴로맨서』와 만화 『아키라』다.
먼저 사이버스페이스 하면 떠오르는 것을 아무거나 들어보자. 0과 1 사이를 뛰어다니며 정보를 캐오는 해커, 그 곁에는 신체가 적당히 개조된 매력적인 조력자가 있다. 그들을 기다리는 건 거대자본이나 권력자의 음모이며, 물론 인공지능도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고전적인 이 설정들을 맨 처음, 그리고 전부 다 넣은 게 바로 『뉴로맨서』다. 『아키라』도 비슷하다. 핵폭발 이후 아직 복구가 덜 된 거리를 질주하는 오토바이, 거미줄처럼 얽힌 뒷골목, 초능력 때문에 순식간에 찌그러진 공간. 비슷한 그림들이 몇 떠오르지만 이를 가장 먼저 감각적으로 그려낸 것은 『아키라』라고 한다. 어쨌든 어디서 본 듯한 장면들 때문에 기시감을 대롱대롱 매달고 읽었지만, 두 작품 모두 재미있었다. 그리고 그만큼, ‘20년쯤 먼저 태어났으면 훨씬 재미있었겠지!’하는 생각이 커진다.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어쨌든 인생도, 독서도 타이밍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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