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달아서 끈적한 것이다
다이도(Dido) <White Flag>
내가 올해 달콤한 크리스마스를 못 보내는 것은 결국 심정이 마를 대로 말라 문을 닫고, 사랑을 포기한 채 끈끈하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모레가 크리스마스 어쩌고인가 본데 올해는 혼자다. 상관없다. 반드시 달짝지근하게 보내야 하는 날도 아닌데 뭘. 나는 일말의 쓸쓸함도 없이 의연한 자세로 방구석에서 잘 보낼 계획이다. 그런데 오래전 런던에서 맞은 크리스마스가 문득 떠올라 버렸다.
그때 나는 어학연수를 빙자한 외화벌이 알바중이었다. 처절한 생존에 지쳐 낭만적으로 보낼 궁리를 하던 끝에, 일터에서 친하게 지내던 여자애와 둘이서 시간을 보내면 썩 괜찮을 것 같다고 판단했다. 맛있는 것도 사 먹고, 영화도 보고, 뭔가 반짝반짝 장식된 옥스포드 스트리트를 함께 걸으며 크리스마스의 달콤함을 만끽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돌대가리같이 간과한 게 두 개나 있었다. 크리스마스 전후로 런던은 완전한 연휴모드에 돌입해 문을 여는 상점 따위가 하나도 없다는 걸 몰랐다는 점과, 여자의 심리를 전혀 몰랐다는 점이었다.
“크리스마스 때 나랑 놀래?”
“내가 왜 오빠랑 크리스마스에 만나?”
“간단한 질문이군. 난 멋있잖아.”
여자애는 자지러지게 웃은 다음 말했다.
“아니야 오빤 웃겨.”
나는 바보같이 그것도 모르고 내가 멋있는 놈인 줄 알고 장도 안 봐놨고 달랑 혼자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해야 했다. 먹을 게 아무것도 없어서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다. 설마 구멍가게 하나쯤은 장사를 하겠지? 싶었지만 암만 돌아다녀도 없었다.
“이런 예외 없는 녀석들ㅠㅠ”
나는 당시 함께 살던 하우스메이트들에게 음식을 꿀 수밖에 없었다. 착한 친구들이라 먹을 것과 생필품을 조금씩 빌려주었다.
“런던에서 크리스마스가 처음인가 보구나.”
“응. 빌린 건 연휴 끝나면 꼭 갚을게.”
모두들 없이 사니까 잊지 않기 위해 나는 수첩에 또박또박 적어 두었다.
노버트: 소시지 한 개 / 마크: 콩 통조림 한 캔 / 루비: 라면 한 봉지 / 크리스티나: 담배가루 10그램 / 마틴: 에일 330cc / 예수님: 커다란 엿
하우스메이트들은 각자 파티나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 집을 떠났다. 나만 텅 빈 집에 남아 멍하게 앉아 있었다. 생존을 위해 빌린 음식은 아주 아껴 먹어야했다. 마음은 크리스마스 때문에 들떠있는데 아무것도 할 게 없었다. 특선영화라도 해 주려나? TV를 틀었더니 왕가위 감독의 <화양연화>가 나왔다. 반가웠지만 동네가 난시청 지역이라 화면은 잠깐 선심 쓴다는 듯 나왔다가 곧 지지직 선이 그어지며 뒤틀려버렸다. 안테나를 암만 만져도 소용없었다. 그 TV는 벼룩시장에서 싸게 파는 걸 보고 땡잡았다며 낑낑대며 들고 온 물건이었다. 그 무거운 걸 사와서 한 번도 제대로 시청한 적 없으니 허리가 아팠다. 도서관 역시 안 열었을 테니 책을 빌려올 수도 없었다.
그 집에선 인터넷도 없었다. 급히 네트워크가 필요할 땐 집주인 루비네 방에서 잠시 빌려 쓸 수 있었는데 그녀도 남자친구에게 가버리고 없었다. 크리스마스란 아기 예수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탄생한 아름다운 날이 아니라 내겐 세상이 멈춰버린 고립의 날이었다. 처연한 기분이 되어 쓰디쓴 술이 고팠다.
하지만 우리의 형제 터키인이 있었다.
산책밖에 할 게 없어 거리에 나갔더니 밤늦게 기습적으로 문을 연 케밥집이 보였다. 그때 영국에선 밤 11시 이후에 술 판매가 금지되어 있어 몰래 파는 케밥집에서 사곤 했었는데 크리스마스에도 기적적으로 연 것이었다. 나는 오아시스를 발견한 조난자처럼 그곳에 달려갔다.
“헤이 부라더! 메리 크리스마스야.”
“원하는 거나 빨리 말해. 문 닫기 직전이야.”
“양고기 케밥과 맥주 네 캔.”
“맥주 같은 소리하네. 그런 건 없어.”
“제발, 크리스마스인데 나 혼자야. 부탁이야.”
형제는 플리즈를 연발하는 나를 잠시 응시했다.
“특별히 너만 주는 거야.”
그는 바깥 눈치를 살핀 뒤 검은 봉지에 맥주 네 캔을 담아 은밀하게 카운터 밑으로 건넸고, 맛있는 양고기 케밥은 카운터 위에서 하얀 봉지에 싸주었다. 집에 와서 와구와구 먹고 마시는 동안 터키인이 지구에서 가장 괜찮은 친구들이라는 과장된 애정을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축복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심정이 되었다.
따듯한 마음으로 라디오를 틀자 오늘의 주제곡 다이도(Dido)의 <White Flag>가 흘러나왔다. 그해 영국 라디오에서 줄기차게 틀어대던 다이도의 히트송 중에서 가장 맘에 드는 곡이었다. 이 영국여자 목소리는 그냥 듣기만 해도 사람을 평화롭게 만들어주는 희한한 음색에, 전매특허인 몽롱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데 그날 들은 <White Flag>의 메시지는 딴판이었다. 마치 크리스마스를 외롭게 혼자 보내는 건 포기했기 때문이라는 지적을 하는 것만 같았다. 헤어진 연인과의 사랑을 못 잊는 기색이 역력한 노랫말인데, 의외로 내 메마른 마음을 돌이켜 사랑이란 이렇게 끈끈해야만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깨달음마저 주는 느낌이었다.
Well I will go down with this ship 자, 난 이 배에 딱 걸린 거고
And I won't put my hands up and surrender 손들고 굴복 안 해요
There will be no white flag above my door 백기를 들지 않을 거라고요
I'm in love and always will be 사랑하고 있고, 언제나 사랑할 거니까
아아, 이 곡을 들으니 포기하지 않고 언제까지나 사랑해야지 싶었다. 내게 맥주와 케밥을 판 터키인도 돈 몇 푼 더 벌려고 나온 게 아니라 나처럼 혼자 배고픈 사람이 있을까봐 문을 열어준 것만 같았다.
내가 올해 달콤한 크리스마스를 못 보내는 것은 결국 심정이 마를 대로 말라 문을 닫고, 사랑을 포기한 채 끈끈하지 않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끈끈하니까 달거나, 달달하니까 끈적한 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돌대가리 같이 메마른 심정으로, 메마른 사회를 탓하며 혼자 쓰디쓴 크리스마스를 보내려 했다니. 십 년이 지난 지금 다이도의 명곡을 다시 들으며 후회해 본다.
크리스마스는 아직 이틀 남았다. 그래, 나도 포기하지 않을 테다. 이틀 만에 연애는 힘들 테지만, 사랑으로 주위의 배고픈 이웃이라도 도와야겠다. 가난해서 백기를 들어버린 고립된 사람들을 보듬어야겠다. 우린 결국 이 땅에 함께 살아야만 하고 크리스마스는 달짝지근해야 제 맛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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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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