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캐롤을 듣는 시간
‘이웃’에 관하여
카페에서도, 큰 서점에서도, 작은 동네상점이나 백화점에서도, 시내 거리를 걸어도 같은 음악을 듣는 시즌이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의 에세이 <시간의 철학>이 매주 화요일 연재됩니다. 시간과 날짜에 대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 다르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들을 철학적으로 풀어봅니다.
빨갛고 하얀 공동의 나라
카페에서도, 큰 서점에서도, 작은 동네상점이나 백화점에서도, 시내 거리를 걸어도 같은 음악을 듣는 시즌이다. 쪼개진 사회가 음악을 통해 하나가 되는 기분이 드는 유일한 때가 바로 12월의 이 즈음이다. 각박한 세태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는 찾아오고 곳곳에는 크리스마스캐롤이 울려 퍼진다. 최초에는 교회의 종교음악으로 시작되었을 이 음악은 종교적 색채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인의 시즌송이 되었다. 신부가 목탁을 두드리며 독경을 하는 풍경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스님이 크리스마스캐롤을 사람들과 따라 부르는 모습은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크리스마스캐롤은 최고의 겨울노래다. 연인들의 러브송이고, 어린이들을 기쁘게 하는 노래이자 핫한 걸그룹들이 매년 이 시즌마다 발표하는 팝한 레퍼토리다. 크리스마스캐롤은 같은 멜로디와 가사에 대해 가장 많은 변주가 이루어져 왔으며, 전세계 대부분의 가수들이 한 번쯤은 다시 부르기를 시도하는 노래다. 어떻게 이렇게 복잡하고 다원적인 세계에서 모두가 한 계통의 노래를 부르고 듣는 시간이 형성될 수 있는가.
크리스마스캐롤을 듣는 시간은 대개 내 의지로 오기보다는 바깥에서 온다. 내가 직접 캐롤을 틀기보다는 이 시즌에는 어딘가 곳곳에서 늘 들려오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본래 복음처럼 선포되는 종교성을 근간에 깔고 있기 때문인가. 캐롤은 우리를 가볍게 흥분시키며 이유 없이 들뜨게 한다. 종소리 같은 기본 악기와 익숙한 음색은 우리에게 천진한 아이의 시간, 행복한 기억, 사랑의 약속을 환기하며 화해와 용서의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그 음악은 색색구슬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 산타할아버지를 태우고서 루돌프사슴코가 끄는 눈썰매, 빨간 양말 속에 감춰진 선물, 북쪽의 눈나라, 성당의 종소리를 불러들인다. 그런 점에서 크리스마스캐롤의 전형적인 색깔은 빨간색과 하얀색의 조합이 아닐까. 빨갛고 하얀 캐롤을 듣는 이들은 무수하고 다양하지만, 그 음악은 무수한 사람들을 저런 몇 가지 공통된 이미지의 나라로 이끌고 그 이미지들을 불러 모은다. 그 이미지의 나라는 음악을 듣는 이들의 객관적 정황과는 무관한 곳에 존재하는 어떤 ‘공동의 나라’다.
캐롤은 구원에 관한 노래
그러나 크리스마스캐롤이 모든 이들을 어떤 ‘공동의 나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찰스 디킨즈의 소설 <크리스마스캐롤>에서 주인공 스크루지는 크리스마스캐롤에 냉담하다. 아이들이 부르고 다니는 캐롤은 시끄러운 소음으로 들린다. 캐롤은 스크루지라는 현실적 존재를 다른 차원의 기억과 아름다운 가상 이미지로 이동시키는 데 역부족이다. 그에게 세상에 존재하는 사물은 오직 교환가치, 즉 화폐적 척도로만 평가된다. 현재 교환가치가 없다면, 적어도 근미래에는 사물이든 사람이든 돈으로 바뀌어 돌아올 수 있어야만 한다. ‘구두쇠’로 표현된 이 인색한 인간형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영국 빅토리아시대의 물질적 번영이 배태한 한 인간 전형이다. 디킨즈는 소설에서 그를 도덕적인 시선으로 풍자하고 있으나. 그는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자기의 성공만 살피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선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죄 없는 인간’이며, 자본주의 발전 과정에서 당시 승승장구한 부르주아계층의 표본이기도 하다. 작가의 도덕적 시선을 제거한다면 사실 스크루지는 예외적 인물이 아니다. 물질적 성공만이 유일한 가치로 남은 지금 세상에서 그를 보자면, 그는 타인에게 냉소적이고 현실적 이해관계에만 몰두해 사는 우리 시대 평범한 개인들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다만 그는 재화의 축적에 성공하였고, 그와 비슷한 가치를 공유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에 차이가 있을 뿐.
그러므로 다시 던지게 되는 질문은 이렇다. 과연 우리 시대의 크리스마스캐롤은 그 음악을 듣는 우리를 예전과 같은 ‘공동의 나라’로 인도하는가. 김애란의 소설 <나는 편의점에 간다>의 클라이맥스는 크리스마스캐롤이 울려 퍼지는 성탄전야의 에피소드와 관련이 있다. 대학가 주변 원룸에서 자취하는 가난하고 내세울 것 없는 자취생인 ‘나’는 이 시즌의 캐롤을 한 편의점에서 듣는다. 흥미로운 것은 캐롤이 은은히 울려 퍼지고 있는 편의점 입구에 대한 묘사다.
큐마트의 특징은 우선 센서식 자동문에 있다. 큐마트의 자동문은 코가 예민한 짐승처럼 잔뜩 웅크리고 있다가 조금이라도 기웃거리는 손님이 있으면 컹, 하고 짖듯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자동문은 항상 구원처럼 열렸다.
-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눈에 띄는 것은 저 자동문이다. 작가는 ‘예민한 센서식 자동문’을 이 시대에 열리는 ‘구원’의 현실적 의미로 관찰한다. 오늘날 가장 달콤하며 유혹적인 크리스마스캐롤은 상점, 특히 백화점 같은 곳에서 울려 퍼지며, 이 사회에서 인간의 구원은 ‘화폐-상품’의 교환?획득에서 발생되는 물리적 메커니즘과 깊은 관련을 맺는다. ‘구원’은 개인들이 물질적 현실에 좌우된다. 그리고 그 물질적 현실이 심리적이고 상상적인 차원을 지배하기까지 한다.
이 소설이 새삼 되묻는 것은 크리스마스캐롤이 본래 담지하고 있는 ‘구원’의 참된 의미다. 크리스마스캐롤을 듣는 시간에 발생했던 저 설레는 이미지들, 그리고 그 이미지들이 최종적으로 인도하는 ‘공동의 나라’는 지금 어디 있는가. 아무리 의미가 퇴색되었다고 해도 캐롤은 단순한 시즌송이 아니다. 캐롤은 ‘메시아’라고 불린 특별한 존재의 탄생을 축하하는 노래다. 죽음으로부터의 재생, 죄의 대속과 구원에 관한 희생제의적 노래다. 특정 신앙으로서 기독교를 지지하지 않는다 해도, 한 특별한 정신의 탄생과 투쟁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 드라마는 극적이며 감동적이다. 기독교도가 아니더라도 이 특별한 정신의 담지자가 행한 잘 알려진 생의 드라마가 그 자체로 우리를 존재의 구원과 관련하여 우리 생각이 도달하지 못했던 먼 곳으로 인도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리스마스캐롤을 듣는 시간에 우리가 음악을 통해 이끌리는 공동의 나라도 본질적으로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메시아는 ‘이웃’이다
메시아란 누구인가. 메시아가 얘기하는 ‘구원’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 구원의 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성경에 따르면 ‘메시아 예수’(‘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의 그리스어 번역이다)는 이에 대해 간단하지만 의미심장한 일화를 제시한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 죽게 되었는데, 랍비와 레위 사람은 그 옆을 그냥 지나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교회에 가는 중이었다. 랍비나 레위 사람은 유대공동체에서 종교적?법률적 권위를 대표하는 지배계층이다. 죽어가는 사람을 도와준 것은 그 공동체 내에 속하지 못한 사마리아인이었다. 유대공동체에서 그는 법률적?사회적?문화적 지위를 지니지 못한 ‘이방인’으로 취급된다. 예수는 그 사람을 ‘이웃’이라고 불렀다.
‘이웃’은 누구인가. 이웃은 ‘친구’가 아니다. 이웃은 친구처럼 공통의 인연이나 공통 관심사나 공통의 이해관계로 엮여 있지 않다. 이웃은 핏줄로도, 학연으로도, 땅으로도, 역사로도 어떤 법률적 테두리로도 이어져 있지 않다. 이웃은 가족도, 가문도, 동문도, 나라도, 민족도 아니다.
이웃의 윤리학이 있다면 유일한 원리는 ‘살아있는 존재’는 누구든 ‘제대로 살아있도록’ 존중하고 잘 되라고 도와주는 것이다. 이웃은 항구적 실체가 아니라, 타인과 대면의 계기에서 참된 존중과 도움을 주는 순간에만 ‘발생하는’ 존재 사건이다. 예수의 관점에 전적으로 충실할 때 구원의 주체는 ‘이웃’이고 구원의 방법론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는 ‘너희는 이 세계에 속하나 나는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노동계급 출신이며 집 없이 거리를 떠돌고 노숙하던 그 역시 사회적 공동공간 중심에 자리를 갖지 못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는 공동공간 주류의 도덕관념과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차원의 윤리를 설파하고 실천했다는 점에서 ‘이웃’이었다. 여기에서 구원은 타인을 위해 애씀으로써 제 존재의 들어올림이 가능해지는 동적이고 동시적인 실천이 된다. ‘사건’으로서 ‘이웃’은 명사가 아니라 실천 속에서 발생하고 자기구원에 참여하는 동사이기도 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편의점에서 오가는, 내가 한번쯤 만났을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사람들. 그중에는 조금 전 비디오방에서 섹스를 한 뒤 같이 컵라면을 나눠먹는 어린 연인도 있을 테고, 근처 병원에서 아이를 지운 뒤 목이 말라 우유를 사러 온 여자, 아버지께 꾸중 듣고 담배를 사러 온 백수 총각, 얼굴을 공개한 적 없는 예술가나, 실직자, 간첩, 심지어는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조차 있을지 모른다.
- 김애란, 〈나는 편의점에 간다〉, -『달려라 아비』 (창비, 2005)
여기서 ‘걸인으로 위장한 예수’가 바로 ‘이웃’이다. 이 소설에서 한 인간의 죽음 현장에서 유일하게 ‘인간에 대한 예의’를 보여준 자가 ‘걸인’(노숙자)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가 당시 대형교회를 찾아다니면서 거기 목회자들과 신도들이야말로 신을 모독하는 자들이라며 그들의 위선을 통렬하게 꾸짖었던 것처럼, 크리스마스캐롤이 교회와 온나라 곳곳에 퍼지고 있는 성탄전야에 소설의 작가는 이 도시에서 구원 받을 자는 오직 ‘걸인 이웃’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광화문광장 길가 상점들에서 크리스마스캐롤이 흘러나온다. 흰 눈을 맞으며 천천히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나는 지금 ‘이웃’으로 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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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이며,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한국문학 속에 나타난 전위적 감각과 윤리를 탐구하는 연구·비평·강의에 매진하고 있다. 인문정신의 사회적 확산과 시민적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해 ‘실천적 인문공동체 시민행성’을 기획하여 공동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매일경제신문에 문명의 무의식과 시대정신을 사색하는 <사물의 철학>이라는 인문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문학평론집으로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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