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궁금해지는 스칼렛 이야기,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남북전쟁에 대한 강렬한 묘사로 이야기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더욱 탄탄해진 서사, 화려한 의상과 안무, 인상적인 넘버로 돌아왔다.
로맨스 너머의 이야기를 담아내다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가 재정비를 마치고 다시 관객 앞에 섰다. 지난 1월 국내 초연 당시 전개가 매끄럽지 못하다는 평을 들은 만큼, 드라마를 보강하는 데 주력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야기의 빈틈이 완전히 메워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극의 초반부는 원작 영화의 주요 장면만을 재현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구성상의 미진함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3권의 소설, 4시간의 영화에 담겼던 방대한 서사를 2시간 40분여의 공연으로 풀어내기에는 분명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고, 그런 점에서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야기의 빠른 전개를 위해 차선책을 택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설명하려는 과욕을 부렸다면 극의 흐름이 늘어지는 것을 막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선택은 옳았다.
1막의 종반부로 달려갈수록 작품은 진가를 드러낸다.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었던 철부지 소녀를 뒤로 하고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 스칼렛이 등장한다. 이번 공연의 연출을 맡은 한지섭 연출가는 “원작 소설의 작가인 마거릿 미첼은 스칼라 오하라라는 여인을 통해서 생존을 그리고 싶다고 했었다.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등장인물의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공언한 대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는 로맨스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스칼렛과 레트의 이야기, 그 이상의 것이 담겨있다. “난 결코 지지 않을 거야. 거짓말, 도둑질, 살인을 해서라도 내 가족을 굶주리게 하지 않을 거야!”라는 스칼렛의 다짐 속에는 비참한 현실과 비극적인 운명, 그에 전면으로 맞서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서려있다.
남북전쟁에 대한 강렬한 묘사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도, 중간 중간 흑인 노예들의 절규로 무대를 가득 채우는 것도 같은 이유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전쟁은 단순한 배경 사건이 아니다. 낭만적 허상의 세계에 머물던 소녀 스칼렛은 처절한 현실의 공간, 농장 한 가운데의 목화밭으로 내던져졌다. 패배할 것이 분명한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겠다던 현실주의자 레트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전장으로 향한다. 그를 대신해 스칼렛의 곁을 지키는 이들은 흑인 노예들이다. 그들은 한 데 어울려 농장에서 일을 하고 살 방도를 궁리한다. 일찌감치 전쟁터로 떠나간 애슐리나 변함없이 그를 기다리는 멜라니 역시 전쟁의 광풍 한 가운데에 놓여있다. 이들이 겪는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북전쟁이라는 거대한 맥락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 사실을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충실하게 살려내 전하고 있다.
볼수록 궁금해지는 스칼렛의 이야기
뮤지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스칼렛에 대한 재발견을 주문한다. 동명의 영화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내면의 목소리가 전해지는 까닭이다. 독백과도 같은 넘버 속에서 그녀는 외로움을 토로하고, 사실은 자신도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치고 싶다고 고백한다. 자신을 사랑했던 남자들조차 ‘스칼렛, 당신은 강한 여자야’라고 이야기할 때, 그녀는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자신의 존재를 아프게 확인한다. 스칼렛에게 사랑이란 무엇이었을까. 생존 앞에 사치가 되어버린 마음이었을까, 비참한 현실에서도 결코 놓아버릴 수 없는 끈이었을까.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지켜볼수록 그녀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는 바람은 더욱 깊어진다. 극장을 나서며 원작 소설에 대한 향수에 사로잡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뮤지컬과 영화가 미처 다 전하지 못한 세세한 순간들이 그리워진다.
뮤지컬로 다시 태어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이전보다 탄탄해진 서사, 화려한 의상과 안무, 인상적인 넘버들로 관객을 유혹하는 작품이다.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은 이야기를 다시 만난다는 것만으로도 반가운 시간이 될 테지만, 분명 그때보다 더 많은 순간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거야”라는 명대사, 스칼렛과 레트의 열정적인 키스 등 단편적인 기억만으로 작품을 추억하고 있다면 완전히 새로운 만남으로 다가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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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