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도언의 시인의 얼굴
시인 김정환, 공적인 죽음을 말하다
공적인 죽음,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의 욕망
죽음이 있으니 인생에 불가능은 당연히 있고 문제는 언제 어디서부터 불가능인가, 불가능한가다. 죽음이 끊임없는 (불)가능의 변증법을 모두 치르거나 겪고 난 후에도 있는 마지막 불가능이고 가능이다. 그 이전 불가능은 대개 지쳤거나 게으른 것에 다름 아니다. 잔당(殘黨)의 울화를 닮은. - 김정환 산문 「현실의 물증, 접속사로서의 죽음>(《21세기문학》 2015년 봄호 수록)에서.
시인, 공적인 죽음을 말하다
합정동에서 양화대교로 한강을 건너면 곧 당산동이다. 거기 오래된 아파트에, 거실 한 가운데 놓인 책상 앞에 ‘그’는 정물처럼 그대로 있다. 그는 그냥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그를 마음대로 사용했다. 신기한 것은 수많은 이들의 손을 탄 이후에도 그는 그대로, 처음처럼 닳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 닳지 않고 그냥 거기에 있는 사람, 시인 김정환 얘기다.
가장 최근의 것으로 보이는 시인 서효인과 가진 인터뷰(《21세기문학》 2015년 봄호)에서 그는 의미심장한 말을 한 적이 있다.
“사실 모든 시는 정치적이야. 김수영이 모든 좋은 시에는 죽음의 리듬이 있다고 말한 것, 그게 바로 정치적인 것이라는 말이야. 정치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을 나누는 일인데, 공적이라는 것은 세상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기 위한 자기 죽음 같은 거거든. 일단 죽음을 통과해야 당대의 미학을 끌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이지. (그렇다면 그건) 공적인 희생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
공적인 죽음과 공적인 희생. 그가 죽음과 희생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어딘지 심상하지 않게 다가왔는데, 자신이 선택하고 자신의 입으로 발음한 그 단어들이 자기가 끌고 나갔던 문학적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그가 연역적으로 재구성하는 데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 그러니까 그가 해온 모든 방대한 작업이 공적인 죽음을 이해한 자의 의식과 연관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추정을 가능케 한 것이다.
그는 앞서 얘기한 강변동네의 오래된 아파트에서 수십 년째 살고 있다. 이 한결같음은, 시인으로서, 저술가로서, 그리고 번역가로서 그의 삶의 전모를 이해하는 데 제법 중요한 실마리 구실을 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실 매우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다. 그 행위의 구체성이 시인과 작가의 세계를 구성하는 것일 테다. 시인은 군인이나 경찰처럼 신분적 존재가 아니라 행위적 존재라는 말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런데, 행위란 운동성을 지니는 것이어서 지속가능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더군다나 그게 사유에서 의미를 뽑아내는 일임에야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내 생각에 글쓰기라는 ‘행위’ 속에서 가장 적확하게 정의되고 있는 시인이 바로 김정환인 듯하다. 그 말고 누가 중단 없는 ‘행위’의 운동성을 통해 자신이 시인인 것을, 당대의 지식인인 것을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해보였는가. 그가 그동안 펴낸 책은 물경 200권. 1년에 한 권씩 펴내도 200년, 1년에 두 권을 펴내도 100년이 걸리는 놀라운 양이다. 글만 쓰는 게 아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셰익스피어 전집과 세계현대시인들의 전집을 번역하고 있다. 이 멈추지 않는 운동성의 행위는 행위 자체에 대한 객관적 타자성을 탈색해야 가능하다. 객관적 타자성이란, 수요를 계산하는 공급자의 시각이다. 그런데, 시인 김정환에게 있어 글을 쓴다는 행위는 내면의 각성에 의한 공적인 죽음을 수행하는 행위여서 수요와 공급의 ‘관제성’을 일치감치 뛰어넘는다. 그에게 글쓰기는 차라리 회의와 성찰과 자기긍정이 극적으로 통합된 아니 애초부터 무화된 주술성과 즉물성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도 보인다. 참으로 신비하고 경이로운 삶.
내가 인터뷰어가 되어 그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바로 관제성을 뛰어넘는 순수한 정치 행위자로서의 시인의 삶과, 죽음까지 엮어내고자 하는 그의 ‘총체적’ 노력이 오늘 우리 문학의 조건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어딘지 부족한 것 같고,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이라 칭할 만한 그의 비정상적인 에너지에 대한 원색적인 호기심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음에 안 들고. 아무려나, 이 인터뷰는 백퍼센트 실패가 예정된 것이다.
콤플렉스와 분열
문청 시절부터 그의 글을 따라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압도적인 괴물 같은 능력의 소유자에게도 혹여 콤플렉스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그래, 인간이라면 열등감이 어찌 없을 수 있을까. 더군다나 상처에서 꽃을 피운다는 문학을 하는 사람인데. 나는 그래서 인터뷰어로서 그 앞에 섰을 때 작심을 하고 첫 번째 질문을 통해 그의 콤플렉스를 유인해보고자 했다. 그에게 콤플렉스가 있다면 나는 그것이 그의 출생지 ‘서울’이라는 향토성이 거세된 공간의 어떤 한계로부터 촉발되는 건 아닐까라는 짐작을 했다. 그래서 예의를 가장해 도발적으로 물었다. 그가 담배를 빼어물 때, 그러니까 방심할 때를 기다려.
김도언 : 선생님은 서울에서 태어나셨잖아요. 비교적 서울의 전통적인 정서가 남아 있는 마포라는 곳에서 태어나셨는데, 보통의 지방출신 시인 예술가들이 각각 자신의 고향을 독자적인 감수성의 전진기지로 삼아 문학을 시작하고 심화시키는데, 대한민국의 중앙이자 수도인 서울에서 태어나신 선생님은 다른 작가나 시인들의 문학적 고향을 부러워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김정환 : (다소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지금은 풍토가 달라졌는데 옛날에는 문단 어른들이 내가 술 잘 먹고 잘 노니까 좋아하다가도 서울 출신인 걸 언급하면서 너 글 쓰기 힘들겠다. 그러다 또 몇 달 지나면 내가 서울대 나온 것까지 곁들여 너 정말 글쓰기 힘들겠다, 이런 말씀들을 했어요. 거기에다가 난 또 영문과잖아. 그러니까 문단 어른들 말씀은 자기가 제일 똑똑한 줄 알고 잘난 척하다가 글을 제대로 못 썼던 서울대 출신 문인들의 현실적인 한계를 지적한 거였지. 사실 뭐, 서울대 출신들이 문학에 약하긴 하지. 그런데 지금은 달라진 게 요즘 젊은 작가들은 오십퍼센트 이상이 서울 출신이에요. 그만큼 서울이 넓어졌지. 내가 마포 살 때는, 사실 사대문 안이 아니면 서울로 쳐주지도 않고, 마포 촌놈이라고 했거든. 그래서 시골 출신 그리고 서울 사대문 출신 양쪽에서 모두 날 안 쳐줬지.(웃음) 근데 내가 성격이 뻔뻔스러운 데가 있어서 그런지 후회한 적도 없고, 서울 출신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고. 뭐, 별로 신경을 안 쓰고 살았어. 그리고 내가 서울을 좋아해요. 서울이 내 고향이니까 말야. 물론 내 세대에는 서울과 지방에 대한 구분이 좀 있었고, 근대화된 도시에서 산다는 것과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다른데, 나는 오히려 서울 출신인 내가 그 이야기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 경상도, 전라도가 정치적으로만 경쟁심이 있는 게 아니라 워낙 역량이 엄청나. 서울이나 충청도도 별로 내색을 못했을 때부터요. 나보다 한 열 살 정도 위로 가면 경상도랑 전라도 문학이 정말 쎄지.
여기까지 들었을 때, 그로부터 콤플렉스를 유인해보겠다는 내 졸박한 의도가 애초부터 잘못된 것이라는 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우리 문학은 근대화 과정에서 향토로서의 농촌이 와해되고, 그곳을 탈주하는 자들의 상상력과 감수성을 수용하고 배려하면서 성장해온 측면이 있다. 김정환이 지적한 것처럼, 그의 바로 윗세대에서 내로라하는 전라도 경상도 출신 문인들이 배출됐는데, 그들이 상경해 각기 문학의 정부 역할을 자임하면서 한국문학 특유의 에꼴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서울 출신의 희귀한 시인이 위축됨 없이 자기 문학을 밀고 여기까지 온 것은, 그리고 자신의 이름으로 파르티잔의 정부를 세운 것은, 사실 문학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이색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김정환이 덤덤하게 말한 것처럼, “뻔뻔스러운 데가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것 역시, 그가 말했던 공적인 죽음과 연결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콤플렉스란, 사적인 죽음이나 삶의 세계를 배회하는 개인의 욕망이 더 힘센 욕망과 충돌할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적인 죽음의 유혹을 거부한 시인이라면, 도대체 어느 결에 콤플렉스를 느낄 수 있을까.
근대성,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여기에서 잠깐 그의 전기적 사실을 부기하고 가는 편이 좋겠다. 시인 김정환의 외가는 마포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온 집안이고 그의 친가는 황해도 신천의 목사 집안이란다. 그의 아버지는 열일곱에 월남해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 군문에 투신해 특무상사까지 복무를 했고 청와대 경호실에서도 일한 적이 있다. 마포 토박이인 외할아버지가 전쟁통에는 집안에 군인이 하나 있으면 좋을 것 같아 사윗감으로 그의 아버지를 점찍은 것이라고. 아버지가 직업군인이라면, 그렇다면 권위적이지는 않았을까. 압도적인 부권으로부터 어떤 상처를 받은 경험은 없을까. 또다시 콤플렉스를 유인해내고 싶은 이상한 습관.
김도언 : 아버님이 권위적이거나 그러시진 않았어요?
김정환 : 그런 거 없었어. 청와대 경호실 출신인데도, 내가 데모하고 그래도 한 번도 뭐라고 한 적이 없어. 다 승낙해줬지. 왜냐하면 우리 아버지도 자기가 황해도에서 술 깨나 드시던 목사 집안인데, 여기저기 외상값 깔리고 하니까 라디오 같은 비싼 걸 싹 훔쳐가지고 월남을 한 거거든. 그때는 남과 북이 영영 갈릴 줄도 모르고. 흔히 생각하는 글쟁이들이 다 집안 사연 많고, 어렸을 때 불우하고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우리나라만 그런 거예요. 그래서 농담으로 소설가가 소설을 잘 쓰려면 많은 걸 먹어봐야지 어렸을 때. 어렸을 때 먹은 게 별로 없는데, 무슨 소설을 쓰냐. 심지어 가난해야 글 잘 쓴다고 하냐. 뭘 먹은 게 있어야 소설을 쓸 거 아니냐고 하죠. 외국 같은 경우에는 셰익스피어가 기점이야. 자본주의화나 근대화되면서 돈벌이도 좀 있고, 먹고 살 걱정을 좀 덜하고 이래야 글 좀 쓴다고 하지. 나처럼 아내 같은 든든한 원군이 있고. 맨날 부부싸움 싸우면서 그게 되나. 우리나라는 그런데 그게 아직도 강해요. 나는 그런 친구들한테 그건 니들이 근대화가 덜 되서 그렇다고 하지.
김도언 : 방금 영문학에서 셰익스피어가 하나의 기점이라고 하셨는데, 저한테 그게 상당히 인상적으로 들리네요. 셰익스피어를 기점으로 문학을 다루는 관점이라거나 태도가 전근대적인 것과 어떻게 구분될까요.
김정환 : 셰익스피어 이후로 평론가들이 문학이 고통의 산물이라는 이야기를 안 하기 시작했어. 반 고흐 이야기를 우리나라만 유별나게 해. 아, 반 고흐가 물론 고생하고 정신병 걸리고 그랬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문학은 별난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없어. 내가 하게 된 것도 우연히 하게 된 거라서. 그러니까 내가 황지우나 이성복 같은 친구들이랑 잘 놀았지. 아까 말한 콤플렉스라는 게 어떻게 보면 좋은 것일 수도 있는데, 피차 콤플렉스가 없으니까.
김도언 : 문학도 다른 분야처럼 제도화가 되고 생태계가 만들어지고, 직업도 생기고 종사자도 생기고, 당연히 시스템도 생기고 권력도 생기잖아요. 그러면 선생님 같은 경우는 흔히 이야기하는 주류니, 비주류니, 권력이니 하는 게 상당히 사소하고 시시하게 들렸을 것이고, 선생님은 애초부터 그런 걸 의식하지 않고 작업을 하신 것 같은데 그렇게 선생님이 균형감각을 잡을 수 있었던, 자기중심을 잡고 견고한 태도를 가질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하고요. 사실은 이게 먹고사는 문제고 돈 문제이기 때문에 아무리 초연한 소설가나 시인들도 자유롭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래서 주류로부터 밀려나면 괴롭고 고통스럽고 갈등과 다툼이 생기고, 그게 현재 우리 현대문학의 왜소화된 현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선생님이 진단을 좀 해주세요. 선생님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게 쉽지 않으니까요.
김정환 : 뭐, 난 어쩌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지. 먹고 사는 문제가 사실 문학의 문제인데, 김수영 같은 경우는 계속 먹고 사는 문제가 나오잖아. 그게 근대화라니까. 그래서 내가 서정주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건 근대 이전의 시라는 거지. 거기에는 먹고 사는 문제가 없어요. 그래서 서정주를 좋아하는 건 좋은데, 괜히 흉내내려고 하다가 지금이 어느 시대 이야기인지도 모르는 거, 서정주만 못한 시를 쓰게 된다는 거지. 김소월도 마찬가지지. 그 사람도 자살해버린 사람이잖아. 끝까지 살려고 노력한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지. 김소월 시에 사는 이야기가 어디 있어.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이거 사는 이야기가 아니잖아. 이건 근대 이전에 시인이 음풍농월을 할 때, 그때 잘 쓴 시지. 그러니까 그 당시에 그 시를 쓴 건 대단한 거지. 그렇다고 그걸 계승한다면서 먹고 사는 이야기는 하나도 안 쓰고. 그러니까 요즘 보면, 미래파 그거 딴 거 없어. 근대화야. 근대화. 음풍농월이 없잖아. 사는 이야기고. 여자를 찢어 죽이고 싶다고 했다가 그 다음날 다시 사랑한다고 하고. 거기 음풍농월이 없는 거야. 김수영 때문에 근대화 될 뻔했는데. 요새는 김수영 존경하는 사람은 많고 극복하려는 사람이 없어서 그게 문제지.
사람들은 그를 사용한다.
김도언 : 아까 황지우, 이성복 이런 분들 말씀을 하셨는데, 예를 들어서 선생님이 막 등단하셔서 활동하셨던 70년대 후반 80년대 초반에 상대적으로 걸출한 문사들이 많이 나왔잖아요. 이성복 선생님도 계시고, 이인성 선생님도 계시고, 황지우 선생님도 계시고, 박남철 선생님도 계시고. 저는 그런 시대가 60년대 김현, 최하림, 김승옥 선생님 나오셨던 산문시대를 연상시키더라고요. 그때가. 그런데 그런 분들은, 황지우, 이성복 선생님 같은 분들은, 물론 딱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떻게 말하면 문학주의의 포즈를 취하면서 빠르게 문학 중심부로 육박해 들어갔잖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그와는 달리 상당히 복합적인 태도를 취하셨더라고요. ‘자실’ 이런 곳에서 운동도 하시고, 민중적인 관점에서 문학운동도 하시고. 그때 선생님이 상대적으로 문학인으로서, 문단의 한 멤버로서 불리할 수도 있는 선택을 하신 거잖아요. 그때 상황과 선생님 생각을 설명해주실 수 있으세요. 또래들이 중심부로 육박해들어가는데 선생님은 다른 쪽으로 좀 돌아가신 것 같아서요. 창비와의 관계도 좀 말씀해주시고.
김정환 : 그게 말하자면 ‘팔자’라는 거겠지. 알겠지만 내가 등단하고 한 5년간을 떨어져 있다가 나온 셈이지. 나는 이걸 다행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내겐 문청기간이 없어요. 보통 다른 친구들이 문청 때 읽는 책들이 좀 많아? 그런데 늦게 읽으면 또 늦게 읽는 맛이 있어. 늦게 읽으면 더 많이 보이거든. 그래서 공부를 또 열심히 하면 그것도 손해 볼 것도 없고. 오히려 문청을 평생 동안 못 벗어나는 사람도 있고. 내가 운동할 때 할복자살한 사람(김상진 열사)의 추도식을 하는데, 그때는 거기 가면 다 잡혀가는 거지. 추도식에서 시 한 번 읽었다고 징역 2년 산 건 좋은데, 나오자마자 또 나이가 어려가지고 강제징집까지 됐거든. 그래서 도합 5년의 공백이 생긴 거야. 그런데 그 5년 동안 심심하니까 편지 주고받고. 사실 내 첫 시집(「지울 수 없는 노래」) 이 마누라랑 주고받은 편지야. 한 편 빼놓고는. 그런데 창비가 센 곳이잖아. 그쪽으로 데뷔하고 보니까 운동권에 징역살고 게다가 창비로 데뷔한 사람이 나밖에 없는 거야. 그래서 갑자기 내가 운동문학 안에서 서열이 높아진 거야. 하여튼 운동권이라는 게, 사회주의라는 게 반쯤은 전근대적인 게 있어서 창립선언문을 딱 썼더니 대변인 되고 서열이 또 올라가고.
김도언 : 선생님은 그런 걸 예측하지 못했는데 쓰고 나서 보니까 그렇게 되어 있더라는 거죠?
김정환 : 아니, 김근태 형이 나보고 대변인을 해달라는 거야. 그때는 내가 이미 글쟁이라 대변인하면 망할 것 같아서 그건 못하겠다고 했더니 삼고초려하면서 꼭 좀 해주라는 거야. 세 번 오면 큰일인데 거절도 못하고. 원래 분위기가 좀 그렇잖아. 그러고 있다가 백낙청 선생님이 ‘자실’을 만들자고 해서 그럽시다 했지. 그런데 자실이라는 게 요즘 작가회의처럼 회원 2천 명이 아니고 백 명이 안 됐지. 고은을 비롯해서 제일 젊은 나까지. 그런데 그때가 제일 영향력이 컸어. 지금은 2천 몇 명이라고 하는데 이건 댈 게 아니야. 한 달에 한 번씩 내가 문지 가서 회비 걷고 그랬지. 그때는 자실 사무국장 하면서 출세를 했다는 생각도 들었어.(웃음) 내가 자실 사무국장하면서 ‘문명’을 얻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기관지를 낼 때마다 구류를 살았거든. 내가 아마도 우리 나라에서 최고 구류 기록을 가지고 있을 거야.
김도언 : 선생님이 스스로 말씀하신 문학적 내력을 들어보면 선생님에겐, 자의로든 타의로든 문학적 현실로 바로 직행할 수 없게 하는 어떤 시대적인 카오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김정환 : 내가 추모시를 열두 편이나 썼어. 신경림 선생 같은 분들이 펑크를 낼 때도 있었고. 죽은 사람도 있는데 내가 그걸 어떻게 거절하느냐. 그런 생각이 들어서 추모시를 많이 썼지. 그러면서 느낀 게 공적인 죽음이라는 게 무엇일까 하는 거야. 문학이라는 게 어차피 허구인데 죽어봤느냐, 이렇게 물어볼 수는 없는 거잖아. 죽는 사람의 그때 그 심정이 뭘까. 이것하고 문학의 정체성하고, 김수영이 좋은 문학에서는 죽음의 리듬이 들린다고 한 것 하고. 이게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한 10년쯤 지나가지고 내가 여태 거기 매달려 있었구나. 공적인 죽음이란 무엇인가. 당시에는 바빠서 모르다가 약간 시간을 가지니까. 문학이라는 것이 사실 공적인 죽음하고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이야기가 바로 죽음이다, 이런 이야기를 내가 한 적이 있었는데 그건 모르고 한 말이고. 쉽게 이야기하면 죽음이 있으니까 이야기가 생겨난다는 것일 수도 있고, 그게 아니면 이야기 자체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제의다. 더 나아가서 문학이라는 것 자체가 살아있을 때 할 수 있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이다. 그래서 문학이 공적인 죽음하고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돈도 안 되는데 죽으라고 문학을 한다는 게 뭘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이 원고의 앞머리에서 나는 “그는 그냥 있을 뿐인데 사람들이 그를 마음대로 사용했다. 신기한 것은 수많은 이들의 손을 탄 이후에도 그는 그대로, 처음처럼 닳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는데, ‘팔자’라는 참으로 세속적인 말 속에서도 운명과 긴장감 있는 조응을 추구하는 단독자의 빛나는 태도를 갖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자기전망을 통해 화석화되는 정신을 갱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나는 그의 회고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카오스 상태로 자신을 끊임없이 회귀시키는 능력 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기념비적인 저작물인 『음악의 세계사』 서문에서 그는 “까마득한 날에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시간은 언제 태어났을까. 그리고 만물은 어떻게 생겨났을까.”라고 묻고 있다. 그것은 문학평론가 황광수가 그의 장시들을 분석하면서 섬세하게 지적한 대로 “그 시대의 생의 범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혼돈처럼 밀어닥칠 때 그것을 언어로 수습할 수밖에 없는 시적 주체의 내적 필연성”에 의한 자연스러운 물음이었을 것이다.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으로서는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자본주의, 그리고 다시 공적인 죽음, 파르티잔의 욕망.
김도언 : 시인들이 자본이라는 것에 굉장히 취약하잖아요. 이게 되게 고약하잖아요. 어쩐지 시인이면 계산도 느려야 할 것 같고, 자본 앞에서도 서툴러야 할 것 같은 게 있잖아요. 현실적인 계산이 빠르다는 것이 문학적 감수성이나 상상력을 지체시키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시인들이 자본 앞에서 복잡한 태도를 가지게 되더라고요. 드러내놓고 탐욕도 못하고 그렇다고 포기도 못하고. 이런 이중적인 태도가 있는데, 이렇게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시인이 있는가 하면 또 진짜 자본 앞에 속수무책인 시인들은 삶이 황폐해지잖아요. 이혼도 하고 폐인처럼 살죠. 지금 21세기 첨단의 자본이 지배하는 시대에서 시인의 가장 이상적인 방어 전략은 무엇일까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이런 상황에서요.
김정환 : 글을 열심히 쓰는 거지. 자본주의라는 게 그렇잖아. 자본주의를 우리가 극복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도망칠 수는 없잖아. 들뢰즈가 탈주 어쩌고 하더니 결국 자살하잖아. 탈주를 못해서. 결국 죽음까지 삶의 영역에 끌어들인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살을 했지. 철학의 결론인거지. 탈주가 불가능하니까. 누구나 자본주의 속에서 살고. 그건 일제 강점기도 마찬가지야. 친일파들 너무 야단치는 것도 내가 싫어하거든. 내가 보기에는 박정희 때 열심히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이 전두환으로 바뀌니까 그 중에 2/3가 포섭이 되고, 전두환 때 열심히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이 노태우로 바뀌니까 2/3가 또 포섭이 되고. 정치권까지 포섭된 걸로 치면 99%가 포섭이 된 거지. 그래서 내가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일제는 36년인데 내가 민주화 운동 10년 딱 보니까 저거 포섭이 안 되는 사람이 없는 거야. 그렇게 10년 살아보니까 욕할 것도 아니더라고. 그래서 아주 나쁜 놈 말고는. 그렇게 사는 거지. 그렇게 사는 게 모멸인 거지. 모멸이잖아. 그런데도 왜 사나, 그런 질문을 쓸데없이 던지는 게 문학이다. 그것도 남이 아니라 자기한테.
김도언 : 열심히 쓰면서 그런 질문을 계속 던져라.
김정환 : 그렇지. 그런 게 문학인 것 같다. 내가 옛날에 『ㄱ자 수놓는 이야기』이라는 소설을 쓴 게 있는데. 거기에 그렇게 썼어. 왜 살아남은 이야기만 할까. 왜 죽은 사람 이야기는 안 할까?
김도언 : 네, 처음에 말씀하신 죽음이 또 나오네요.
김정환 : 다시 그 이야기로 돌아온 거야. 공적인 죽음이라는 게 사실 그거거든. 자진에서 죽은 게 공적인 죽음 아니야. 왜 공적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왜 안할까. 그게 이제 왜 사나, 하는 것과 공적인 죽음이 뭘까. 그래서 삶이랑 죽음에 대한 연결이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처럼 흥미진진한 주제가 없잖아. 죽은 사람한테는 미안하지만.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렵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만 하는 거야. 헤르타 뮐러인가 노벨상 받았다고 책을 보냈길래 읽었는데, 그것도 살아남은 이야기야. 사형당하는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더군다나 우리나라는 정말 놀라운 일이지. 분신으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보통 일이야. 종교도 아닌데. 그 쇼크랄까. 깊은 골이랄까. 우리가 친구나 친척이 죽어도 문상 가서 어느 정도 죽음을 생각하잖아. 그러다가 까먹지. 그런데 이건 공적인 죽음이야. 문학은 공적인 죽음의 의미를 계속 물어야 해.
시인 김정환은 공적인 죽음의 의미를 묻는 ‘인문주의적 파르티잔’이다. 인문과 예술과 문학의 모험을 감행하며 통합된 세계의 회복과 그 가능성을 인민에게 보급하는 유격대원이다. 인민은 파르티잔을 사용하지만, 이 파르티잔은 놀라운 회복능력으로 언제나 인민 앞에 다시 나타난다. 그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 소속되어 있으며 자신의 명령과 요구에만 복종한다. 어쩌면 가장 완벽한 파르티잔이란, 가장 완벽하게 자신에게 소속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일 테다. 완벽하게 자신에게 소속되어 있어야만, 다른 곳에 편입되거나 편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편입되거나 편제될 가능성을 지워내는 것이야말로 파르티잔이 치러야 할 가장 격렬한 전투일 것이다. 정규적으로 편제되는 순간, 파르티잔의 전투력은, 위대한 존재의 가능성은 상실된다. 아울러 공적인 죽음의 가능성도 소멸된다.
나는 지금 시인 김정환을 파르티잔에 빗대 말하고 있지만, 파르티잔을 묘사하는 것은 언제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삶의 전선에서 목격된 그의 정신력과 외모를 파르티잔의 실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시인 김정환은 언제나 목격된 곳에서 목격되지만, 또한 우리가 목격할 수 없는 곳에서 끊임없이 재현된다. 자가증식한다. 그 자폐가 허용하는 우주의 크기를 누가 짐작할 수 있겠는가. 김정환은 자기자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 이야기들이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오히려 더욱 모호해지는 이상한 존재다. 파르티잔은, 서류에, 데이터에, 파일 속에 자신의 행적을 남기지 않는다. 우주적 직관으로 카오스의 한복판을 가로지를 뿐. 공적인 죽음을 삶 속에서 미리 경험하는 것, 그것만이 파르티잔의 유일한 욕망이겠지. 그 삶과 죽음의 우주가 내 앞에, 그리고 당신 앞에 있다.
시인 김정환은 1954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계간 ‘창작과비평’에 시 ‘마포, 강변에서’ 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2007년 제9회 백석문학상, 2009년 제8회 아름다운 작가상을 수상했다. 노동자문화운동연합회 의장, 한국작가회의 상임이사,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사무국 국장, 한국문학학교 교장을 지냈다.
『지울 수 없는 노래』 『하나의 2인무와 세 개의 1인무』 『황색예수전』 『회복기』 『좋은 꽃』 『해방 서시』 『우리 노동자』 『사랑, 피티』 등 19권의 시집을 냈다. 산문집으로는 『발언집』 『고유명사들의 공동체』 『김정환의 할 말 안 할 말』 『김정환의 만남, 변화, 아름다움』 『이 세상의 모든 시인과 화가』 등이 있다. 평론집 『삶의 시, 해방의 문학』, 음악교양서 『클래식은 내 친구』 『음악이 있는 풍경』 『내 영혼의 음악』 『음악의 세계사』, 역사교양서 『20세기를 만든 사람들』 『한국사오디세이』, 희곡 『위대한 유산』 등을 썼다. 『셰이머스 히니 시전집』과 『필립 라킨 시전집』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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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언
199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이후 여섯 권의 소설책과 세 권의 산문집, 한 권의 평전을 펴냈다. 지금은 문학적 관점을 다양한 형식의 글쓰기, 시각적 이미지 작업과 연계해 세계와 타자를 읽어내는 실험을 하고 있다. 좋은 인터뷰는 인터뷰이의 실존적 조건에 대한 통찰과 아울러 삶의 총체성에 대한 상상력과 감수성이 들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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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흥렬(사진)
중앙대학교 사진학과와 밀라노 IED 사진학과 졸업.
인물사진과 나무사진을 주로 찍고 있으며 최근의 작업은 '푸른 나무(Blue Tree) 시리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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