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그대를 찬양했더니 그대는 그보다 백 배나 많은 것을
내게 갚아주었도다 고맙다, 나의 인생이여!
_미셸 투르니에의 묘비명
내 집에는 날개 달린 존재들이 많다. 활을 쏘는 큐피드, 날개 달린 토르소, 가브리엘 대천사가 도처에 산재해 있다. 천사의 속성과는 거리가 먼 내가 왜 날개 달린 것들을 모으고 있을까? 나는 왜 경계에 선 자들에 매료되었던 것일까?
매일 아침 눈을 뜬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진다. 자주 가수면 상태에서, 내가 눈을 뜨는 곳은 더 이상 이 세상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묘한 공포와 쾌감을 느끼며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나는 이렇게 반복되는 낯선 아침에 문득 스치는 생각이나 이미지를 화두로 삼곤 한다. 며칠 전 아침,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 「벨사살 왕의 연회」에 나오는 글씨처럼 글자 하나가 내 눈앞에 턱하니 나타났다. 그것을 환영 혹은 환상이라고 불러도 좋고, 아니면 착각 혹은 자기 암시라고 해도 좋겠다. 어쨌거나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것은 바로 ‘mediated’(매개된)라는 아주 큰 글자였다. ‘mediator’(중재자)도 아니고 ‘mediated’는 또 뭐람! 이런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하다가, 내가 날개 달린 물건들을 모은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그럼 내가 엔젤?” 나는 쿡쿡 쏟아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아무리 과대망상이라지만 참으로 잘 가져다 붙인다. 그러면서 ‘엔젤이 뭐 별건가? 내 생각이 아닌, 신의 말을 전하는 메신저 아닌가!’ 하고 다시 생각에 잠긴다. 몇 년 전부터 나는 날개 달린 존재들(천사뿐 아니라,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이 날개 달린 동물들로 표현되어 있다)이 많이 등장하는 중세 미술, 그중에서도 로마네스크 미술과 정을 통하고 있다. 그런 것이 절대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나는 항상 내가 비어 있는 그릇 같다고 생각해왔다. 무엇인가를 담지 않으면 별로 쓸모가 없는, 매번 새로운 것을 담아야 하는 용기였다. 그렇게 나는 지금까지 빈 그릇으로 살아왔다. 예술을 전하는 그릇으로 말이다. 그리고 매번 강의 때마다 나는 이 그릇을 정말 아낌없이 비워낸다. 지성이라곤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멍청한 백지상태가 되도록 말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반 이상을 미술과 함께해왔다. 오랜 시간 지속된 대학 강사로서의 삶은 지리멸렬하고 창백했다. 대학 강의를 대부분 접고 대중 강좌로 선회하고 난 후, 내 삶은 훨씬 즐겁고 견고하고 비옥해졌다. 사실 대중사회는 더 치열하고 살벌한 삶의 현장, 즉 광야였지만, 광야에서는 어떡해서든 살아남아야 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생존형 강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일단 대중은 맛깔나지 않는 강의에는 금세 시큰둥해지기 때문이다. 나는 나를 불러주는 곳이면 가능한 한 거절하지 않고 뛰어다녔다. 무엇이든 해내야 했던 나는 뜻하지 않게 무림고수(?)가 되기 위한 실전에 돌입해 버렸다. 덕분에 내 강의의 스펙트럼이 무궁무진하게 확대?재생산되었고, 내 공부의 파장과 차원에 엄청난 진화가 일어난 느낌을 받았다. 물론 순전히 내 생각이다.
현대사회는 사람들을 아프고 병들게 한다. 사람들의 가슴은 차갑고 무감각해졌으며, 머리는 뜨겁고 복잡해졌다. 그런 그들은 자신이 아프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심각한 상태가 되어 버렸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는 시인 이성복의 「그날」 중 한 대목이 떠오른다. 우리는 지금 이런 무감각한 감정의 상태가 어디에서 연원하는지 그 근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자신이 어디에 서 있는지 똑바로 봐야 한다. 감정을 잘 돌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자신에 대한 이해는 물론 타인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문제를 잘 들여다보게 해주기 때문이다.
나 역시 내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접하면서 잘 알게 되었지만, 그중에서도 예술가들의 삶과 예술작품을 통해서 더 깊이 있게 이해하고 통찰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치유였겠지만, 그 다음 단계는 성찰이라는 어마어마한 진화가 일어났다. 이는 세상의 어떤 체험보다 강력한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내 언어와 행동의 무의식적 패턴을 십분 이해하지는 못한다. 어떤 때는 더 이상 나 자신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들의 심리와 감정에 대한 천착은 인간 보편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할 수 있게 하였고, 무엇보다 나 자신이라는 인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주었다. 나를 제대로 아는 길만이 타인에게 온전히 도달할 수 있는 길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작년, 오랜 갈망 끝에 ‘유경희예술처방연구소’라는 작업실 겸 연구소를 만들었다. 이곳에서 나는 주로 예술과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미술사적, 미학적, 문학적, 심리학적,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들려준다. 내 연구소의 예술 처방, 즉 예술적 치유의 방법이 우선 예술가와 예술가의 삶을 다각도로 이야기해주는 것에 치중해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의 기본 핵심은 사실 ‘토킹 큐어talking cure’다. 정신분석이라는 말의 사용에 거부감이 느껴질 때는, 나는 저 오랜 시원始原의 주술사를 떠올리곤 한다. 글이 없었던 시절, 고대의 주술사들은 몸과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그들을 치유했다. ‘이야기’는 그만큼 막강한 치유의 힘을 지닌다. 지금도 여전히 원시적 습속이 남아 있는 마을에서는 마을의 어른이 마치 마법사처럼 아이들 혹은 병든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야기가 곧 치료’인 셈이다. 나의 일은 예술가의 유년시절, 재능과 학업, 무의식과 트라우마, 인간관계, 시대정신, 예술작품 등을 문학, 영화, 드라마와 같은 타장르와 접목하여 입체적으로 들려주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스펙터클하고 드라마틱한 예술가들의 인생에 동승하여 자신을 투사하게 된다. 결국 그들의 셀프-힐링Self-healing 모멘트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처럼 녹록지 않은 삶을 보낸 예술가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자체로도 자신의 상처와 절망과 권태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며, 심지어 지금껏 자기 손가락에 박힌 가시를 제거하는 일에 너무 집착했다는 생각에 미치기까지 한다. 다시 말해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내 손가락만 아픈 것이 아니며, 심지어 내 손가락이 아픈 것을 참 다행스럽게 여기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치유에 근간한 성찰이 발생하는 지점이다. 내가 진정 원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내 연구소의 초석이 될 첫 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수 있는 감정,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라는 일곱 가지 기본 감정으로 예술가들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예술가들만큼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들은 기쁘고 즐겁고 사랑하는 감정도 넘치게 표현하고, 슬프고 밉고 욕망하는 것도 과장되게 표현한다. 이렇게 감정의 기복이 크다는 것은 그들이 만족할 줄 모른다는 점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술가들에게 불만족은 신성한 것이다. 그것이 예술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물론 감정에 충실하다는 것,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이 그다지 긍정적이지만은 않을 때도 있다. 분노와 혐오 같은 부정적인 감정일 경우에 그렇다. 예컨대 예술가들은 감정을 과격하게 드러내어 피해를 보는 경우가 많았고, 때론 감정을 숨기는 듯할 때조차도 작품 속에서 더욱 극단적으로 자기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
여기 소개된 예술가들은 모두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탁월한 예술가들이지만, 삶 속에서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서툴고 미숙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소심하고 비겁하며 때로는 강박적이고 이기적인 나르시시스트에 가까웠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데에도 과잉과 결핍을 오락가락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자기감정에 몰입했으며, 자기표현에 충실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그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감정을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사랑, 증오(혐오), 욕망 등으로 정리해보면서, 조금은 혼돈스러운 용어를 나름대로 구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예컨대 기쁨과 즐거움의 차이, 증오와 분노의 차이와 같은 것이다. 먼저 기쁨과 즐거움의 차이는 기쁨이 영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의 행복한 느낌이라면, 즐거움은 감각적 차원의 행복이라고 정의하였다. 따라서 기쁨은 영혼에 대한 사랑과 결부된다. 벗과의 만남, 독서를 통한 초월적 세계와의 교우, 그림 보는 일과 같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만남을 최고의 기쁨으로 간주했다. 이에 반해 즐거움은 보고, 만지고, 오리고, 그리고, 쓰다듬고, 맛보고, 냄새 맡는 등 오감을 사용한 감각적인 체험에 몰입하면서 생기는 쾌락으로 보았다.
증오와 분노의 차이를 보면 증오는 아주 사무치게 미워함 혹은 그런 마음을 뜻하며, 분노는 분개하여 몹시 화를 내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증오의 전제조건은 무진장 사랑했던 존재와의 갈등이다. 혐오의 경우에는 인간 혐오, 여성 혐오와 같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감이 전제되기도 한다. 예컨대 모든 여자에게 예의를 지키며 거리를 유지하는 드가의 태도는 증오라기보다는 혐오에 가깝다. 그리고 분노는 증오로 넘어가기 전前 단계라고 해야 할까? 아직 몸서리쳐질 정도로 상대를 싫어하는 단계는 아니다. 분노는 상대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아쉬움이 아직 남아 있는 상태, 아직 상대를 포기하지 않은 단계다. 예컨대 로댕에 대한 카미유 클로델의 마음은 분명 증오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을 확신하고 있는 클로델의 입장에서 보면 여전히 분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그다지 정교해보이지 않는 일곱 가지 감정의 잣대로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을 재단하는 일은 오류투성이일 가능성이 많다. 인간에게는 이런 감정 말고도 수백, 수천 가지의 감정이 서로 스미고 겹쳐 있으며, 감정 그 자체가 너무나 다양한 에너지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미국 일리노이대학에서 모나리자의 미소를 미소 분석 알고리즘을 통해 분석해 보았더니, 행복한 느낌이 83퍼센트, 혐오감이 9퍼센트, 두려움이 6퍼센트, 분노가 2퍼센트로 나왔다고 한다. 이것만 보아도 인간의 감정은 한순간도 하나의 감정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처럼 인간에게는 수많은 감정의 레이어가 존재한다.
결론적으로 감정과 치유의 관련성에 대해 말한다면, 감정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치유가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풍요로워진다. 물론 이런 감정이 휴머니즘에 근간하는 적절한 수준에서 이루어진다면 말이다. 감정을 표현할 줄 아는 종족만이 살아남았다고 하듯, 감정을 작품 속에서 표출할 줄 알았던 예술가들만이 살아남았다고 해야 옳다. 그들은 삶 속에서 직접적인 감정 표출보다는 작품 속에서 간접적이지만 더 드라마틱하게 표현할 줄 알았다. 이런 예술가들의 삶과 작품에 전율하는 스스로의 감정을 마주하면서, 나 역시 아직 생생히 살아 있음을 느끼곤 했다. 이런 감정 상태를 맛보는 것은 그 어떤 기쁨보다도 더 크고 경이로웠다. 마치 에피파니epiphany(신의 현현)와도 같은 체험이라고나 할까! 다시 한 번 강조하자면, 나는 내 책의 가장 큰 수혜자다.
이 책을 내면서 특별히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참 많이 떠오른다. 먼저 한 번도 공식적으로 감사의 메시지를 전한 적이 없는 내 가족에게 더할 나위 없는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미심쩍은 딸의 행보를 무심히 넘겨주신 모든 사랑과 베품의 근원인 엄마, 특히 우리 가족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큰오빠와 새언니, 그들의 전폭적인 지원과 배려가 없었더라면 오늘날의 나는 아마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내 가족은 나를 마치 수도원에 보낸 신의 종처럼, 집안의 모든 대소사에서 배제해주었다. 그런 까닭에 나는 계속 철부지처럼 하고픈 일만을 지속하며 이기적으로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흠모의 대상인 나의 영적 파트너인 유영준 선생님, 멋지고 견고한 지원군이셨던 강성훈 선생님과 이인화 선생님, 늘 기막힌 재치로 활기 넘치는 삶의 롤모델이 되어주신 화가 김원숙 선생님, 오랜 세월 말없는 응원과 힘을 보태주신 가람화랑의 송향선 선생님, 연구소의 첫돌을 놓는 데 큰 도움을 주신 주인옥 선생님, 언제나 귀한 책을 대가 없이 내어주신 최석태 선생님, 미미한 대중 강사로서의 경력에 소중한 터닝 포인트를 마련해준 살가운 하민회 대표님,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어 자연의 경이로움에 눈뜨게 해주신 민예사랑 장재순 선생님, 이 모든 분들게 싶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마지막으로 언제나 내 삶의 가장 가까운 발치에서 나를 지켜주는 사랑하는 내 친구들 조현주, 박연옥, 원보희, 이영숙, 홍수연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까칠하고, 독설가이며, 게다가 히스테릭한 나를 친구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해준 그들이야말로 내 인생의 가장 빛나는 숨은 보석이요, 아름다운 조력자들이다. 이 책은 이 모든 이들에게 바쳐져야 옳다.
아찔한 햇살과 바람이 지나가는 평창동 작업실에서
유경희
치유의 미술관유경희 저 | 아트북스
책은 작품 뒤에 가려진 예술가의 진짜 모습을 일곱 가지 감정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그들을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충분히 돕는다. 책장을 넘기며 우리가 예술가들을 만난 시간은 그들의 감정과 삶에 우리 자신을 비추게 만든다. 더불어 넌지시 내 감정을 돌보고 당당히 표현하는 것, 그 자체가 나 자신에 대한 치유이자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방법이라 알려준다. 어쩌면 그것이예술가들이 작품을 남긴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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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희> 저15,200원(5%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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