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고 싶을 때 듣는 음악
블론드 레드헤드 <Misery is a butterfly>
블론드 레드헤드(Blonde Redhead)에 대해 글을 쓰자니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울고 싶을 때만 듣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자판에 콧물이 떨어질라 조심하고 있다.
론드 레드헤드(Blonde Redhead)에 대해 글을 쓰자니 모니터가 잘 보이지 않는다. 울고 싶을 때만 듣는 음악이기 때문이다. 자판에 콧물이 떨어질라 조심하고 있다.
울고 싶은 순간이 많아봤자 좋을 게 없는데 원하지 않아도 감정이 슬픔을 와락 호소할 때가 오는 법이다.
나는 터프가이인 척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울기 싫어서 주성치 영화라든가 박상 소설이라든가 가급적 웃긴 것들을 찾아본다. 오버해서 배꼽을 잡고 바닥을 뒹굴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러는 자신이 또 비참하게 느껴진다. 감정이란 놈은 한 번 찌그러지면 통제할 수 없는 양철 밥통 따위인가 보다. 심지어 꼰대처럼 강요까지 한다.
“쯧쯧 그러지 말고, 자 눈물이 필요하단 말이야. 어서 울어봐. 착하지?”
“뭐야. 이유나 알고 울잔 말이다.”
연기파 배우가 아닌 이상 눈물이 수도꼭지처럼 틀면 나오는 게 아니지 않나. 그렇지만 찬찬히 되새겨 보면 울고 싶은데 참고 넘어간 때가 얼마든지 있다. 통장을 스치고 사라진 월급을 아쉬워할 때(크흑), 출근하려고 신발을 신는데 몸이 배추절임처럼 축 처질 때(어흑), 지친 몸으로 돌아와 하나 남은 라면을 끓여먹다 실수로 엎었을 때(아옳옳), 화장실 휴지가 떨어졌는데 부를 사람이 없어 엉거주춤 가지러 나오다 혼자라는 게 사무치도록 외롭고 더럽게 느껴질 때(끄아아아) 일단 한 번 미뤄놨던 순간들이 와르르 쏟아지며 콧등에 딱밤을 맞은 것처럼 얼큰한 최루성 감상이 밀려든다.
어휴, 희망적이어야 할 앞날은 황사와 초미세먼지로 뒤덮인 듯 뿌옇기만 하고, 힐링 어쩌고 하는 개념들은 사이비 종교처럼 같잖고, 나라 돌아가는 꼬라지는 후진기어를 넣고 질주하며, 인생의 지리멸렬함은 말라빠진 멸치대가리 같고, 아니 대체 행복이 뭐였는지, 언제 한 번이라도 행복했었는지 기억조차 안 나는 것이다. 그쯤 되면 울적함의 늪에 하반신을 빠트리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질질 짜지 않고 쿨하게 개기면서, 시크하게 버티고 참으면서, 남들도 다 견디는데 혼자만 약해 빠졌구나 다그쳐도 보고, 아 궁상 좀 떨지 말라고 얼레리꼴레리 해본다.
- 역시 울고 싶어진다.
터프한 척, 쿨 시크한 척엔 한계가 있는 거다. 공교롭게도 울상이 되는 순간 욕실의 세면대 배관이 터졌다. 낡아서 불안했는데 올 게 온 것이다. 쉐엑 소리를 내는 물 분수를 맞으며 꼭지를 잠그고 나왔더니 눈시울이 축축해졌다. (키힝 물이 하필 눈가에만 튀었어) 순간 세면대 배관이든 사람의 눈물샘이든 한계에 다다르면 터져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다. 할 수 없다. 블론드 레드헤드의 음악을 듣는 수밖에.
우울할 땐 더 슬픈 음악을 들어 마음을 차분하게 만드는 게 효과적인지, 반대로 신나는 음악을 들어 마음을 밝은 쪽으로 인도하는 게 장땡인지 잘 모르겠다. 우울한데 어떤 학설이 옳은지 따질 겨를도 없으니까.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떠오르는 대로 듣고 싶은 음악을 들으면 좋다는 생각이다. 그렇지만 슬픔이나 우울의 스펙트럼도 사람마다 굉장히 다양해서 자기 상태에 맞는 음악을 고르지 않으면 아무런 효과가 없기도 하다. 나는 우울한 기분을 고조시키기도 싫고 차분하게 가라앉히기도 싫어서 블론드 레드헤드의 <Misery is a butterfly>를 골랐다. 블론드 레드헤드의 음악들은 기본적으로 암울한 마이너 톤인데 리듬감은 뛰어나다. 그런데 리듬이 빠른 곡도 감정을 차분하게 만들거나 축축 처지게 한다. 그러니 이들의 음악은 여행을 출발할 때 듣거나, 막 시작된 연인과 스테이크를 썰면서 들으면 곤란하고, 우울이 집적거려 귀찮아 죽겠을 때 들어야 그저 그만인 것이다.
오랜만에 <Misery is a butterfly>뮤직 비디오를 틀자마자 감정의 울림처럼 울적한 키보드 멜로디와 함께 그리 급할 것 없는 드럼비트가 우수의 심장처럼 공명한다. 쌍둥이인 페이스(Pace이탈리안 발음으론 파체) 형제의 똑같이 진지한 곱슬머리 페이스와 그들의 리듬에 이끌리다 보면 어느새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보컬 카즈 마키노의 고음이 가늘게 떨며 밀려나온다. 진지하게 연주하는 두 명의 이탈리아 쌍둥이 남자 사이에서 몸치에 가깝게 흐느적거리며 이상한 춤을 추는 일본인 여자 한 명이 삼각관계처럼 존재하는 기묘한 밴드멤버의 조합이 이 곡의 묘한 몽환적 분위기와 슬픔을 증폭시킨다. 음악은 고통스럽게 흘리는 눈물처럼 고조되다 중반부에서 부드럽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한 번 쓰윽 올라갔다가 차분하게 정리되며 어느 순간 뚝 멈춘다. 아니 이건 마치 사람이 울어재끼는 과정과 흡사하다.
울고 싶을 때 듣는 음악이라고 주제를 잡았지만 이 음악을 들으면서 펑펑 울게 되지는 않는다. 그저 울고 싶은 감정이 그대로 눈에 보이고 소리로 들리며 내 감정을 바로 눈앞에서 직면하게 되는 기현상이 일어나고, 멋진 아티스트들이 내 슬픔에 공감하며 대신 울어주는 듯한 환상을 보고 만다. 등을 두드려 준다거나 누군가 따듯하게 안아준 듯 음악으로 이해 받고 위로받는 기분까지 든다. 아아 역시나 이런저런 우울과 고통을 한 마리 나비처럼 승화시켜 날려주는 명곡이다. 음악이 끝나자 해소감을 느낀 감정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며 말한다.
“그래, 울고 싶은 건 없었던 일로 하지.”
감정은 그렇게 해결했고 다음은 세면대. 사람을 부르자니 출장비가 없어 직접 갈아본다. 빵꾸난 배관을 로킹 플라이어로 제거하고 연휴에도 문을 연 철물점을 끝내 찾아내 새 파이프를 사왔다. 배관은 처음인데다 자세가 안 나와 낑낑거렸지만 볼트를 단단히 죄자 수도관은 더 이상 새지 않는다. 울고 싶은 기분도 완전히 사라진다.
찬물을 틀고 어푸어푸 세안을 하자 기분이 갓 갈아입은 팬티처럼 뽀송뽀송해진다.
그래, 울고 싶었던 건 바로 이 기분이 되기 위해서였어. 이제 말끔하게 다시 또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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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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