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리에 꼬리를 물어 고리 〈악의 연대기〉
〈악의 연대기〉
꼬리를 물린 첫 번째 놈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문 마지막 놈의 꼬리를 물어버리면 거대한 하나의 고리가 되는 법이다. 일단 고리가 되어버린 악은 그 시작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 모르게 순환한다.
※ 조심했지만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꼬리를 물린 첫 번째 놈이 꼬리에 꼬리에 꼬리를 문 마지막 놈의 꼬리를 물어버리면 거대한 하나의 고리가 되는 법이다. 일단 고리가 되어버린 악은 그 시작이 어딘지 끝이 어딘지 모르게 순환한다. 맞물린 자양분으로 근근이 버텨지는 이 순환의 고리들은 살아남기 위해 끈끈하게 연대해야 한다. 누군가 나서 입을 풀어버리면 당장 내가 죽어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백운학 감독의 <악의 연대기>는 제목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 악행이 연대를 이뤄 거대한 고리가 된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그리고 그 거대한 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는 첫 번째 놈이 입을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야기 한다.
승진을 앞둔 최반장(손현주)은 회식 후 괴한에게 납치를 당한다. 납치범과 혈투 끝에 최반장은 살인을 저지르게 되고, 승진을 위해 사건을 은폐하기로 한다. 하지만 다음 날 최반장이 죽인 시체가 경찰서 앞 공사장 크레인에 매달린 채 발견된다. 국민적 관심을 끄는 사건이 되고, 자신이 저지른 살인사건을 담당하게 된 최반장은 점점 좁혀지는 수사망에 불안해한다. 그의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오형사(마동석)은 그를 끝까지 믿고 따른다. 동생처럼 살가운 신참 형사 차동재(박서준)은 몇 가지 단서 때문에 믿음과 의심 사이에서 갈등한다. 서장의 도움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려는 순간, 마약 복용으로 전과가 있는 배우 김진규(최다니엘)가 자신이 진범이라며 경찰서에 나타난다. 최반장의 이야기로 흘러가던 사건이 뿌리 채 흔들리는 건 이때부터다. 사건의 판을 짠 또 다른 인물이 외부에 있다는 것을 관객들이 알게 된 순간, 영화는 하나의 복수극이 된다. 이때부터 영화는 결승전을 향하는 레이싱 경주처럼 질주하고 그 속도에 맞춰 배우들도 전력질주를 한다. 영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누가 범인인가 맞춰 보는 관객의 시간은 충분하지 않다.
관객들이 백운학 감독의 영화를 처음 만난 건 2003년 <튜브>에서 였다. 1999년 <쉬리> 이후 촉발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핏줄을 잇기 위해 제작된 영화 중 ‘지하철’을 소재로 한 작품이었다. 세련된 CG 기술로 꽤 공을 들이고, 김석훈, 배두나 등 믿을만한 배우들이 출연하는 기대작이었다. 게다가 백운학 감독은 <쉬리>의 조감독 출신이었다. 하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에 인색했던 평단의 반응도 미적지근했고, 관객들의 기대도 크게 충족시키지는 못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12년 만의 복귀작 <악의 연대기>는 감독이 그 동안 얼마나 절치부심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만큼 <악의 연대기>는 그 모양새가 꽤 튼튼하고 짜임새 있는 스릴러 영화다. 굳이 설명하자면 인물의 구성과 이야기의 짜임새, 영화가 진행될수록 고조되는 긴장감과 거듭되는 반전 등을 보고 있자면 한국형 스릴러 영화의 교과서라 불러도 될 법하다. 딱히 악인도 선인도 없는 등장인물 사이의 이야기를 통해 ‘악’을 이야기 하는 주제 의식도 좋고 특별히 잔인하지 않은 씬들 덕분에 징그러운 장면을 싫어하는 관객들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영화의 최대의 장점들은 반대로 아쉬운 점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잘 짜인 이야기와 인물의 구성은 너무 익숙해서 반전이 쉽게 드러날 수 있고, 반전을 위해 깔아둔 복선 역시 조금 도식적인 느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에도 흔들림 없이 제 몫을 해내는 배우들의 연기는 주연과 조연의 구별이 없이 촘촘하다. 손현주는 위풍당당하던 초반 모습에서 살인사건이 드러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최반장의 내면까지 눈빛과 몸짓으로 오롯이 소화해낸다. 늘 단단한 배우 마동석, 냉혈한 서장 정원중을 비롯해서 비밀의 열쇠를 쥔 최 다니엘의 등장도 강렬하고 신참 형사 역할로 영화 데뷔한 박서준 역시 잘 짜인 이야기 속에서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더욱 설득력 있게 만들기 위해 진심어린 연기를 선보인다. 세련된 시나리오와 좋은 배우들이 만난 셈이다. <악의 연대기>는 어느 하나 빠지지 않은 훌륭한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 덕분에 단단한 스릴러 장르 영화라기보다, 섬세하게 빠져드는 드라마로 읽힌다. 사실 악인과 선인의 구별이 없어 누구 하나 마음 붙일 사람이 없어 허전할 법도 한데,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별이 없는 만큼 더 섬세해진 배우들의 연기 덕분에 모두 가련하고 동정이 가는 인물로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논리가 아닌, 인물들의 정서로 이끌고 가는 감성 스릴러가 되었다. 소재의 유사성 때문에 <끝까지 간다>와 비교되지만, 그 영화의 결이 너무 달라 섣부른 비교는 필요 없을 것 같다. 물론 각각의 영화에 대한 만족도는 취향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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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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