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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스킨> 별에서 온 노동자

암흑 같은 블랙홀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언더 더 스킨>은 몽환적이고 동시에 공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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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측하건데, 로라는 살기 위해 지구인을 죽이는 노동을 하고 있다. 그 노동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 미친 노동, 어느 순간 해답도 질문도 없는 그 노동을 하는 것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외계인이 괴력도 초능력도 없이, 그것도 별 볼 일 없는 노동자의 모습을 하고 살아간다면 어떨까? 듣기에 따라 흥미진진하기도, 맥 빠지기도 한 이야기, 스칼렛 요한슨이 외계인 역할을 맡은 <언더 더 스킨>이 그렇다. SF의 외피를 겨우 뒤집어쓰고 있지만, 딱히 내세울 것이 없어서인지 영화 홍보는 줄곧 스칼렛 요한슨의 노출을 주요 화두로 꺼낸다.

 

 하지만, 그녀의 노출만으로 홍보하기에 <언더 더 스킨>은 조금 더 가치 있는 영화다. 하지만 스칼렛 요한슨을 빼 버리면 <언더 더 스킨> 또 달리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이기도 하다. 찰스 디킨슨에 비견되는 극찬을 받는다는 원작자 미헬 파버르 역시 국내에선 익숙하지 않다. 하지만 영화의 개봉과 함께 처음 소개되는 그의 장편 소설은 영화만큼이나 매혹적이고 논쟁적이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원작 소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지 않는다. 원작에 상세히 드러난 구체적 정황들을 모호하게 숨겨두었기 때문에 영화는 다큐와 픽션 사이를 오가는 실험극처럼 보인다.

 

 

지구인의 신체를 강탈한 외계의 침입자라는 소재만 놓고 보자면, 외계에 맞서 싸우는 인간의 사투쯤을 그려볼 법도 한데, <언더 더 스킨>은 무척 느슨하다. 자극적인 장면도 사건을 파헤치는 미스터리나 박진감도 없다. 대체 왜, 라는 질문과 주인공 로라(스칼렛 요한슨)의 입장이 뭔지 궁금하지만, 영화에서 해답을 찾을 수는 없다. 외계에서 온 로라는 아름다운 지구인으로 가장한 채 밴을 몰고 다니면서 남자들을 유혹한다. 로라에게 매혹되어 끌려온 남자들은 피부가 벗겨진 채, 어딘가로 운송된다. 계속되는 유괴와 살인의 목적은 단서도 없이 모호하게 끝난다. 관객들은 단지 로라의 배후에 거대한 조직이 있으리라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추리와 해독의 과정은 온전히 관객에게 툭 던져졌지만, 그나마도 흥미진진하진 않을 것이다. 

 

스칼렛 요한슨은 전라노출도 불사하는 과감함을 보인다. SF를 가장한 이 실험 가득한 영화에서 스칼렛 요한슨에게 치명적 매혹의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기대해선 안 된다. 그녀는 솔직히 어떤 캐릭터도 보여주지 않는다. 조나단 글레이저 감독은 로라라는 캐릭터가 성격과 감정이 없이 텅 빈 그 상태로 머물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이고, 스칼렛 요한슨은 아무런 의식도 감정도 없는 기계처럼 공허한 로라를 재현해 낸다.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로라에게 납치되는 남자들을 몰래 카메라를 통해 즉흥적으로 촬영했고, 그 필름을 영화에 그대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극중 로라가 된 스칼렛 요한슨은 밴을 타고 다니며 거리의 일반 남성들을 유혹한다.

 

스칼렛 요한슨은 길을 잃었다거나, 우체국이 어디냐는 질문을 던지고, 일반인 남성들은 대답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극 속으로 들어온다. 이 장면을 위해 일주일 동안 스칼렛 요한슨은 직접 거리를 운전했고, 보이지 않는 카메라가 차량 안팎에 숨겨져 있었다. 몰래 카메라로 진행된 장면 중에서 길을 걸어가던 스칼렛 요한슨이 갑자기 쓰러지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쓰러진 그녀를 도와 일으키는 장면들은 마치 사전 연습된 것처럼 매우 자연스럽다. 몰래 카메라의 흔들리고 연출되지 않은 장면은 로라라는 외계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지구인의 낯선 모습, 일종의 외계인을 위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인다. 낯설지만 일반인들을 포착해 내는 순간들은 매우 사실적이다.

 

암흑 같은 블랙홀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언더 더 스킨>은 몽환적이고 동시에 공허하다. 실체를 알 수 없는 저 검은 구멍이 텅 비어 있을지, 아니면 세상 모든 것을 다 흡수해 버릴 만큼 강렬한 자기장을 품고 있을지 겉에서 지켜보는 동안은 전혀 알 수가 없다. 당연히 그 공허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는 끝내 속 시원히 밝혀지지 않는다. <언더 더 스킨>은 타인의 껍질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생명체의 내면을 파헤치지 않는다. 지구라는 낯선 곳에 툭 떨어져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무언가를 끝없이 수행해야 하는 외계 생명체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그토록 모호한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체가 없이 내면은 텅 비어 있고, 그럴 듯하게 포장된 껍질로 세상을 부유하는 로라의 모습은 이미 그 실체가 불분명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는 지구인들의 지금 현재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추측하건데, 로라는 살기 위해 지구인을 죽이는 노동을 하고 있다. 그 노동은 살기 위해,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 미친 노동, 어느 순간 해답도 질문도 없는 그 노동을 하는 것은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인간과 전혀 다르지 않은 외계인. SF에서 판타지를 제거하니, 리얼하게 사람 사는 이야기가 된 셈이다.

 

언더더스킨

영화 <언더더스킨> 스틸컷

 

미헬 파버르의 『언더 더 스킨』

 

영화 속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는 미헬 파버르의 책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 파버르의 소설 속 주인공은 영화와 달리 조금 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이야기도 영화에 비하면 매우 명료하다. 주인공 이설리가 사는 행성은 공기와 물, 식량이 부족한 척박한 땅이 되었다. 식량을 구하기 위해 지구로 파견된 그녀는 인간과 같은 외모로 바꾸고, 식량 조달을 위해 매일 매일 열심히 일을 한다. 우선 식량이 될 남자는 덩치가 커야 한다. 그녀는 매일 남자들을 마취 시켜 농장으로 데리고 오고, 농장에 갇힌 남자들은 사육되다가 도축되어 행성으로 보내진다. 인간고기는 행성에서 비싼 값에 팔린다.

 

매일 열심히 일하지만 이설리는 일을 하는 것이 즐겁지 않다. 지구에서의 삶은 가치 없고 의미 없는 노동일뿐이다. 정말 이게 끝이야, 할 정도로 허무한 결말은 영화와 다르지 않다. 영화 속 로라가 그 실체가 불분명한 공허함을 보여주었다면, 소설 속 이설리는 밑바닥 인생을 사는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오직 생존을 위해 타인을 죽일 수밖에 없는 외로운 외계인, 잔인하지만 동정하게 되는 주인공의 인간 사냥은, 착취하지만 동시에 착취당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도시인의 쓸쓸한 현실을 반영하는 것 같다. 미헬 파버르는 이 소설을 통해 영국 최고 권위를 가진 문학상 ‘휘트브레드 상’ 최종심에 올랐고, 이후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쌓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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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재훈

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언더 더 스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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