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자유여성단체 이야기
분노와 저항의 한 방식, 페멘 Femen
페멘은 외부 세계에 개방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소련 붕괴 이후 구소련 지역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안에서 여성들이 처한 불평등한 여건이나 독재정치에 맞서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다른 나라의 민주화 투쟁에도 기꺼이 연대를 아끼지 않는다.
열넷, 열다섯 살의, 이 어린 소녀들에게 삶은 무료할 따름이었다. 또래 친구들은 거리에서 맥주를 마시고 수다를 떨거나 심한 경우 마약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가난한 외딴 시골 도시에 살던 이 네 명의 우크라이나 소녀 안나 훗솔Anna Houtsol, 인나 셰브첸코Inna Chevtchenko, 옥산나 샤츠코Oksana Chatchko, 사샤 셰브첸코Sacha Chevtchenko는 그런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자기 인생의 의미를 찾아 나섰다.
이들은 소비에트연방에 관한 책 몇 권을 읽고 나서, 조국을 건설한 선구자들과 소비에트 공산당 청년 당원들이 활약하던 시대에 대해 환상을 품게 되었다. 사실, 이들은 그 시대를 경험하지 못했다. 단, 다른 세 사람보다 나이가 위인 안나만이 행복했던 유년기의 밀감과 초콜릿 맛으로 소련 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스탈린Iosif Vissarionovich Stalin이 저지른 범죄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지만, 이들에게는 그저 먼 옛날이야기일 뿐이었다. 소련이 해체되기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이들의 부모는 사회에 기여하며 존경받는 평온한 삶을 살았으니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심한 불평등으로 말미암아 매우 복잡한 상황이어서 장밋빛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1990년대나 2000년대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이 암울한 시대를 겪는 동안 이들의 마음속에는 야만스러운 자본주의에 대한 증오만이 자라났다. 자본주의는 신속하고 파렴치하게 ‘행복한 소수 특권자’의 배만 채워 주고 이들 가정과 같은 서민들의 삶을 파괴했기 때문이다. 소련 붕괴 이후 몰아닥친 자본주의에 대한 혐오로 똘똘 뭉친 사샤와 옥산나, 안나는 고향인 우크라이나 서부의 소도시 크멜니츠키Khmelnitski에서 마르크스주의 성향의 동아리에 가입하게 된다.
이 동아리는 청년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다락방에 보관되어 있던 오래된 소비에트 철학 매뉴얼과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엥겔스Friedrich Engels, 그리고 19세기 독일 사회주의자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독일 사회민주당 창립자의 한 사람으로, 마르크스주의의 뛰어난 선전가이자 이론가였다. . 옮긴이)의 저서를 공부하는 모임이었다. 이 동아리 소속 청년들은 당시의 정치적, 도덕적 합의에 역행하는 입장이었다.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ka 시절이 지나고 소련이 붕괴한 후 몇 년 동안, 우크라이나의 일부 러시아어 사용 지역에서는 러시아 측의 선전과 보조를 맞춰 가며 소비에트연방과 러시아 제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드러냈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건 우크라이나에서건 대부분은 소비에트연방 시절을 비방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다. 이러한 담론이 일면서 우크라이나에서는 국민적 불만이 중첩되어, 소련의 정치, 문화적 제국주의와 소련이 우크라이나에 자행한 범죄를 비난하는 목소리가 고조되었다. 이에 따라 유셴코Vikor Iouchtchenko 대통령은 1932~1933년의 대기근으로 우크라이나인 600만 명이 희생된 사건을 대학살로 인정해 달라고 유엔에 요구했다(스탈린 정권의 강제 식량 징발로 우크라이나인 500~1,000만 명이 굶어 죽는 대참사 ‘홀로도모르’가 빚어졌다.
당시 대기근에 대해 우크라이나 법원은 2010년 ‘학살 범죄’라는 판결을 내렸다. . 옮긴이).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러시아나 우크라이나나 공식적으로는 하버드학파Harvard School(시장의 비효율성과 시장 실패에 대비해 정부가 간섭해야 한다는 하버드대학 주도의 논리로, 시장과 시장의 자원배분 기능이 효율적이므로 정부의 시장 간섭을 반대하는 시카고학파에 반대되는 입장이다. . 옮긴이)에서 주장하는 자유주의 . 즉 권력의 측근으로 있는 소수 지배자가 국가의 부를 차지하는 것 . 를 암울한 공산주의의 유일한 대안으로 선전했다.
그러나 현실을 들여다보면 이것은 지나치게 불평등한 체제에 잘못된 정당성을 부여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대국민 선전의 위력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시대를 역행하는 과거의 유물로 치부된 공산당을 제외하고는 사회정의를 외치는 목소리가 거의 없었다. 자유주의를 강요하는 이 같은 분위기 속에서 현재 세르게이 우달트소프Serguei Oudaltsov가 이끄는 러시아 좌파 전선과 같은 급진파처럼 .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려면 상당한 지적 용기가 필요했다. 그럼에도 크멜니츠키 동아리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훗날 페멘을 이끌게 될 세 사람을 포함해서 몇몇 멤버들은 그동안 습득한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고자 학생 지원 협회Association of Student Aid를 설립했다.
이와 동시에 페멘 창립자 3인방은 꼬박 1년 동안 베벨의 『여성과 사회주의Die Frau und der Sozialismus』(아우구스트 베벨의 주저이자 마르크스주의 여성론의 고전이다. 4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는 태고부터 18세기까지의 과거 여성,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현재 여성, 자본주의 사회의 위기, 미래의 사회주의 사회와 해방된 여성을 다루고 있다. . 옮긴이)를 애독서 삼아 끝없이 파고들었다.
이 책을 통해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페멘 3인방은 여성의 자유를 위한 투쟁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베벨의 사상 속에서 남성 우월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언제 어디서건 여성을 억압하는 종교에 대한 혐오감을 뒷받침해 주는 ‘과학적 토대’를 발견했던 것이다. 이 책을 독파한 안나와 사샤, 옥산나는 학생 지원 협회에서 함께 활동하던 남성 친구들과 결별하고 신윤리New Ethics라는 이름의 새로운 단체를 결성한다.
2008년 봄에 시작한 이들의 활동은 처음에는 순수하고 유치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점차 화려하고 눈길을 끄는 모습으로 변모되었다. 이들은 무엇에 저항할 것이며, 목표물은 어떻게 정할 것인지에 대해 열심히 해답을 찾았다. 그리고 그렇게 브레인스토밍brain storming하는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매음굴이 아니다’라는 첫 번째 대주제를 발견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우크라이나 국내에서 권력의 비호 아래 성업 중이던 섹스산업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와 동시에 우크라이나 여성이라고 하면 빵 한 조각이나 ‘외국에서의 안락한 삶dolce vita’의 대가로 ‘매력적인 왕자님’에게 기꺼이 몸을 바친다고 생각하는 서방세계의 인식에 맞서고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렇게 십여 차례 시위를 벌이며 투쟁하는 동안 이 단체는 제대로 된 모습을 갖추게 되고 페멘FEMEN이라는 명칭도 얻었다. 2009년에는 우크라니아의 케르손Kherson이라는 소도시 출신으로 키예프에서 공부하던 인나가 크멜니츠키 3인방에 합류함으로써 이 모임의 골격을 이루는 4인방이 모두 모이게 된다. 그 후, 머리에 화관을 쓴 반라의 젊은 여성의 모습이 이 단체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트레이드마크로 자리 잡았다. 이 책에서 페멘 4인방은 세계 어느 곳에서건 알아볼 수 있게 이런 ‘기이한 행색’을 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소상히 밝힌다.
2009년에도 오렌지 혁명Orange Revolution(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시민들이 대대적인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통해 평화적 정권 교체를 이뤄 낸 시민 혁명이다. 당시 여당이 부정선거를 통해 대통령선거를 승리해 재집권하자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시위가 벌어졌는데, 이때 시위대는 야당을 상징하는 오렌지색 옷을 입거나 오렌지색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결국 재선거가 치러졌고 야당의 빅토르 유셴코 후보가 승리했다. . 옮긴이)의 결과로 구성된 연정이 여전히 우크라이나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 세계 경제 위기라는 악재까지 작용한 탓에 . 우크라이나 정부가 국가 경제 개선과 부패 척결에 실패했기 때문에, 오렌지 혁명은 많은 우크라니아인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다.
이런 가운데 2009년 말 대통령 선거를 앞둔 우크라이나는 양분되고 말았다. 2005년에 승리했던 야누코비치Viktor Ianoukovitch 후보는 임기를 마치는 유셴코 대통령뿐만 아니라, 과거 오렌지 혁명의 주역이었고 그동안 유셴코 대통령의 대항마이자 라이벌로 성장한 율리야 티모셴코Ioulia Timochenko와도 맞서게 되었다. 예전과 마찬가지로 야누코비치 후보는 러시아 정권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있었다. 마침 페멘은 전통적인 ‘페미니즘’ 영역을 넘어서 그 이상으로 활동 영역을 넓히려던 참이어서 대선을 계기로 정치 싸움에 뛰어들기로 결심하게 된다. 이들은 야누코비치를 우크라이나 동부지방 소수 거대 자본의 꼭두각시로 간주하고 그가 이끄는 ‘블루’ 진영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그렇다고 정치, 경제적 실패를 야기한 (유셴코나 티모셴코를 추종하는) ‘오렌지’ 캠프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이 같은 양비론적 입장을 취하자 우크라이나 일부 여론으로부터 큰 질타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들은 특히 2007년 12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총리로 재임했던 우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티모셴코 전 총리를 혐오했다. 섹스산업을 퇴치하고 여성들이 처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집권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명백한 사실이 드러나게 된다. 즉 오렌지 혁명이 비록 결점은 있었지만 그래도 자유를 가져왔었다는 점이었다. 반면, 그 뒤를 계승한 야누코비치 정권은 점차 억압의 강도를 높였다.
바로 이 시기를 기점으로 페멘은 정치적으로 급진화되었다. 독재를 새로운 적으로 규정하고 공격 대상으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면서 경찰과 사법당국, (소련 시대의 KGB에서 유래한) 우크라이나 안보국SBU에게 쫓기는 처치가 되었다. 그리고 첫 재판을 받고, 첫 투옥생활을 하고, SBU 요원으로부터 첫 심문을 받게 된다. 마침내 이들은 이런 우크라이나에서는 여성의 권리를 위해 싸우기보다는 우선 공안국가에 항거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또한 러시아가 ‘푸틴 체제’ 하에 있는 한 우크라이나는 결코 자유를 얻지 못할 것으로 보고, 도의적 의무감에서 2011년 러시아 의회선거에서 자행된 대규모 불법선거를 규탄하는 러시아 야당을 지지한다. 이렇듯 페멘은 키예프에서는 야누코비치 정권에 대항하고, 모스크바에서는 푸틴 정권에 맞서는 시위를 벌여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페멘은 외부 세계에 개방적이라는 특성 때문에 소련 붕괴 이후 구소련 지역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 안에서 여성들이 처한 불평등한 여건이나 독재정치에 맞서기도 하지만, 이와 함께 다른 나라의 민주화 투쟁에도 기꺼이 연대를 아끼지 않는다. 이들은 푸틴 정권에 저항하는 시위를 벌인 후 . 그러나 이 시위는 좀처럼 러시아 야당의 구미에 맞지 않았다. ‘어린 우크라이나 여성들’의 대담한 행동이 폐쇄적 성향을 지닌 야당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이다. 유럽의 마지막 독재자로 간주되는 벨라루스Belarus의 알렉산더 루카셴코Alexandre Loukachenko 정권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2011년 12월 벨라루스에서 벌어진 일은 아마도 지금까지 이들이 겪은 상황 중에서 최악의 경우인 것 같다. 그곳에서 이들은 흉포한 현지 KGB가 치밀하게 준비해 둔 함정에 빠지고 결국 이 사건은 비극적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벌거벗은 몸에 신랄한 내용의 슬로건을 적은 이 젊은 여성들은 불과 이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 만에 경찰봉을 휘두르는 경찰과 맞서 싸우는 정예 투사가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페멘은 새로운 투쟁에 뛰어든다. 청소년 시절부터 무신론자였던 이들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에 전적으로 동조했다. 이들이 보기에 종교란 가부장제가 여성을 지배하는 데 필요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이에 따라 페멘은 이슬람교이건 기독교이건 모든 교권주의를 공격하기로 한다. 왜냐하면 모든 종교를 망라하고 그 안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늘 여성이기 때문이다.
2010년, 사키네 모하마디 아슈티아니Sakineh Mohammadi Ashtiani(간통죄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이란 사법당국으로부터 투석 처형 선고를 받은 여성으로, 2014년 현재까지 이란 교도소에 수감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옮긴이)를 돌로 쳐 죽이라는 이란 사법당국의 판결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후, 반교권주의 투쟁은 2011년부터 페멘의 시위활동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지금도 바티칸, 키예프, 모스크바, 이스탄불, 파리, 런던에서 이들의 시위는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페멘이 종교에 대해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시류에 역행하는 입장을 보이는 이유가 무엇인지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 소련 시절 박해받던 그리스 정교는 소비에트연방 해체 이후 잿더미 속에서 다시 불꽃을 피우더니 사실상의 러시아 국교가 될 정도로 국가와 밀착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에 따라 페멘은 교회의 낡아 빠지고 반동적인 가르침과 부패한 정권과의 결탁을 규탄하고 나서게 된 것이다. 이들의 비난 강도는 그 유명한 푸시 라이엇Pussy Riot(러시아의 반푸틴 운동을 벌이는 록그룹 . 옮긴이)보다 훨씬 더 높다. 이들은 기독교에 대항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슬람 율법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버젓이 자행되는 중세적 관행에 대해서도 단호히 공격을 가한다. 이들은 서방사회의 관용 정신을 건드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맞으면 맞고 틀리면 틀리다고 거침없이 직설화법을 구사한다. 예를 들자면, 유럽에서는 니캅niqab(전신을 가리고 눈 부분만 가리지 않은 이슬람교 여성의 의복 . 옮긴이)이나 부르카burqa(여성의 신체 전 부위를 가리고 눈 부분까지 망사로 되어 있는 의복 . 옮긴이) 착용을 수용해서는 안 된다며, “이슬람 여성들은 옷을 벗어라!”라는 주장을 편다. 이 슬로건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이슬람 여성과 특히 서방세계에 살고 있는 이슬람 여성들에게 보내는 페멘의 호소다.
이렇듯 반교권주의 운동을 벌이면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페멘의 이데올로기는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이들은 섹스산업과 독재, 교권주의를 가부장주의가 발현된 3대 악惡으로 규정하고, 이에 반기를 들기 위해 이목을 집중시키는 시위의 위험 수위를 점차 높여 가고 있다. 이 밖에도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in Davos(세계 여러 나라의 전현직 대통령들과 총리, 경제장관, 중앙은행 총재, 초국적기업의 총수들과 지식인, 언론인들이 스위스 동부 휴양지 다보스에 모여 세계 경제에 대해 토론하는 세계경제포럼 형식의 민간 회의이다. . 옮긴이)에서 시위한 것처럼 순전히 반자본주의적인 성격의 활동도 벌인다. 페멘은 세계 강대국들이 야기한 비참한 현실의 첫 번째 희생자가 바로 여성들이라고 주장한다.
현재 유럽의 미디어뿐만 아니라 수많은 나라의 언론매체에서 페멘의 활동을 앞다퉈 취재하고 있다. 그런데 내용만큼이나 이를 담고 있는 그릇도 언론의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시위자들의 위험을 불사하는 공연 같은 장면을 보며 시청자들의 열기가 고조되는 모습은 매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그러나 페멘을 다루는 보도 내용 중에 눈길을 사로잡는 사진은 넘쳐나지만, 정작 이들이 견지하는 입장을 소개해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당연히 다큐멘터리 감독들에게도 이 젊은 여성들은 다루기에 좋은 소재가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사정이 달라질 수 있을까? 이 여성들은 키예프 대성당 종탑에서 경종을 울리고, 다보스포럼 개최 장소의 지붕에 잠복하고 있는 저격수들 앞에서 성벽 위로 기어오른다. 또한 이스탄불 대사원 앞에서는 가슴을 드러낸 채 시위를 하고, ‘매우 도발적인’ 모습의 수녀로 가장해서 가슴 위에 ‘우리는 게이를 지지한다’는 글귀를 써 놓고 시비타스civitas 등 가톨릭의 극단적 보수주의자들을 공격한다. 이들이 경찰이나 보안 당국과 대치하는 ‘장관’은 우리에겐이미 익숙한 모습이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새로운 현상이 생겨났다. 페멘이 순전히 정치적인 목적으로 급진적인 예술적 시위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스스로 예술가가 아님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이 용감한 여성들이 자신들이 표방하는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양심에 거리낌 없이 지불하는 대가다.
2012년 가을, 페멘은 키예프 사무소는 그대로 유지한 채 프랑스에 둥지를 틀었다. 필자가 이들을 알게 된 것이 바로 이 시기다. 이들이 파리에 들렀을 때 가장 먼저 인나를 만났고, 그 후 나머지 세 명의 창립 멤버들을 만났다. 이 책은 이들과 수십 시간 동안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래서 모든 내용이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다면 필자가 이들을 위해 책을 쓰고 싶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러시아와 구소련 지역 전문 기자다. 그런데 이 지역에서는 급진적인 젊은이들이 과거 소련 시절의 비극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를 전파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런 모습에 필자는 수년 전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이 네 명의 여성들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바로 이런 생각 . 소수가 지배하는 냉혹한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젊은 이상주의 여성들의 생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필자는 남다른 용기를 지닌 창의적이고 현대적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세상 모든 곳에 있는 비참한 상황에 처한 여성들에게 공감과 연민을 느끼는 네 명의 젊은 여성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감이 진실되기에, 고통을 야기하는 자들을 그토록 심하게 증오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이들은 위대한 혁명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페멘은 베라 자술리치Vera Zassoulitch(마르크스주의적 노동 해방단을 창립하고 레닌과는 이론적으로 반대 입장을 취하였다. 2월 혁명 후에는 극우 멘셰비키 그룹에 들어가 지도자로 활동했다. . 옮긴이), 베라 피그네르Vera Figner(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암살을 주도했으며, 테러리즘을 지향하는 인민 의지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 옮긴이), 예카테리나 브레코 브레코브스카이아Ekaterina Brechko Brechkovska.a, 알렉산드라 콜론타이Alexandra Kollonta.(혁명주체로서 여성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론화시켰으며 여성해방을 혁명 완성과 함께 이루고자 했다. . 옮긴이) 등과 같은 차르 시대의 위대한 여성 혁명가들의 계보를 잇는 것 같다. 다만, 인터넷과 쇼 비즈니스show business의 시대인 지금, 그들의 맹렬한 기세는 과거와는 크게 다른 양상으로 드러난다.
페멘 운동가들은 급진적 성향의 소유자들이지만 테러라는 방법에 기대는 대신 유희적인 동시에 고도로 상징적인 방식으로 그들의 적을 공격하는 법을 터득했다. 총이나 폭탄 대신 바로 나체를 무기로 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가 이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을 도와주기로 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필자와는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상당히 이견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지만(필자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고, 무신론자라기보다는 불가지론자다), 그럼에도 이들의 투쟁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증스러운 악행 그 자체인 섹스산업에 대한 이들의 분노를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 부분은 독재에 맞서 싸우는 페멘의 모습이었다. 필자는 일관되게 소련 시절에는 정권에 반기를 드는 사람들을 지지했고, 오늘날에 와서는 푸틴Vladimir Vladimirovich Putin 정권과 구소련 지역의 독재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 편에 있다.
필자는 러시아 야권과 반정부 세력의 몇몇 주요 인사들, 예를 들면 안나 폴리코브스카야Anna Politkovska.a(러시아의 저널리스트로, 반민주적 푸틴 정권에 반대하였고 체첸사태 이후 러시아가 저지른 만행을 세상에 알린 러시아의 양심이었다. 하지만 전직 모스크바 경찰관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 옮긴이), 엘레나 보네르Elena Bonner(시민운동가이자 구소련 반체제 인사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의 부인이다. 꾸준히 러시아 정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활동을 벌여 왔다. . 옮긴이), 알렉산더 긴즈부르그Alexander Ginzburg(러시아 저널리스트 겸 시인으로 반체제 인사이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 옮긴이), 블라디미르 부코프스키Vladimir Boukovski(러시아 작가이자 반체제 인사로, 옛 소련 시절 12년간 감옥에서 복역하였다. . 옮긴이), 세르게이 코발레프Sergue. Kovalev(러시아 반체제 인사이자 인권운동가로 활동했다. . 옮긴이) 등과 가까운 사이였으며 안타깝게도 이 세상을 떠난 몇몇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의 위대한 반정부 인사로서 현재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레오니드 플리우츠크Leonid Pliouchtch와도 우정 어린 관계를 돈독히 하고 있다.
이제 이 글을 끝맺으면서 페멘의 반교권주의에 대한 필자의 입장을 정리하겠다. 페멘은 모든 종교가 여성을 억압한다는 확실한 신조를 지닌 무신론자들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봤을 때 틀리지 않은 주장이긴 하지만, 수많은 다양한 종교들이 모두 같은 방식으로 변화하지는 않았다. 예전부터 프로테스탄트와 자유주의 유대교도들은 여성에게도 남성과 동등한 위치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과거 십자군과 종교재판, 화형대로 얼룩졌던 가톨릭교회도 지금은 변화의 길을 가고 있다. 비록 그 속도가 더디긴 하지만 변화 일로에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비잔틴과 차르 시대의 전통에 충실한 러시아 정교는 푸틴 정권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다. 수 년 전부터 야당과 자유 언론을 탄압하고 있는 푸틴 정권은 결정적으로 지난 총선에서 대규모 불법선거를 저지름으로써 정권의 정당성을 상실했다. 그러더니 전에 없이 교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이를 등에 업은 교회는 이것을 세력 확장의 기회로 삼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도 넘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KGB 출신이 일부 고위직을 장악하고 있는 푸틴 정권과 가부장주의가 결탁하는 것을 가만히 손 놓고 보고 있어야만 할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필자의 답이다. 페멘이 전개하고 있는 전투적인 무신론주의나 일부 시위 활동에 동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 정교회의 입장을 규탄하는 이들의 활동은 존경할 만하고 정당한 것이다.
이 네 명의 젊은 우크라이나 여성들이 펼치는 모험은 이들이 벌이는 요란한 소동 이상의 가치로 알려지고 이해되어야 한다. 비록 우리가 모든 면에서 이들의 사상이나 활동 방식을 공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전적으로 유럽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이 열정적인 젊은 여성들은 유럽이라는 오래된 대륙에 희망의 상징이 될 수 있다. 활기차고 용감한 이 전위부대가 존재감 없던 동유럽에 상륙했던 것처럼 말이다.
자, 그렇다면 앞으로 페멘의 미래는 어떠한 모습이 될 것인가? 파리에 있는 페멘 교육 센터는 전 세계의 모든 운동가에게 문을 열어 두고 있다. 이곳은 여성을 억압하는 자들을 공격하고 여성들이 자유롭고 자아를 실현하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페미니즘 ‘전사’를 양성한다는 사명을 가지고 운영된다. 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페멘이 소망하는 세계 여성 혁명의 첫걸음이 아닐까? 부디 그렇게 되기를 기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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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멘> 저/<갈리아 아케르망> 편/<김수진> 역13,500원(10% + 5%)
『분노와 저항의 한 방식, 페멘』은 프랑스의 저명한 저널리스트이자 구소련 전문가인 갈리아 아케르망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를 통해 페멘의 4인방 각자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배경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어떤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소개한다. 또한 페멘이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는 모습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