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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에서 이문구 작가와 이별을

2014년 『관촌수필』 2편 대천해수욕장, 성주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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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사지를 찾기로 했다. 한때는 승려 2,000명이 머물 정도로 컸던 사찰. 지금은 탑 몇 4기만이 자리를 지키며 전성기 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폐사지다. 『관촌수필』이 세월을 이긴 것이 아닌, 세월에 져버린 것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성주사지는 이번 여행의 종착지로 꽤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 1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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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해수욕장으로

 

이제 슬슬 여행의 끝이 다가온다. 대천해수욕장으로 향했다. 주말이나 여름 휴가철에 사람 반 물 반을 이루는 대천해수욕장. 서해안 최대 규모의 해수욕장이다. 사람들이 그리도 많이 찾는데, 정작 소설가는 대천해수욕장을 그리 곱게 보지는 않았다.

 

여름에도 나는 옹점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엿장수하고 엿치기를 해서 이긴 엿으로, 움쌀을 모아 몰래 바꾼 과자 부스러기로 나를 달래면서, 미군들이 먹다 버린 것은 외면한다는 다짐을 받으려 들던 그녀가 떠올랐다.
외국인에 의하여 외국인들의 취미대로 개발된 해수욕장에서, 외국인들이 이루어놓은 풍속과, 그들이 즐기던 분위기를 본받아 갖은 행색으로 설치는 인파 속에 섞여, 그들과 다름없이 지내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싫었던 것이다. (111-1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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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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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적 드문 백사장

 

대천해수욕장에 얽힌 기억은 4번째 이야기 「녹수청산」에 등장한다. 마을에서는 괄시받으나, 소설가는 흠모했던 청년 대복. 그 대복이 본격적으로 타락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지금 대천해수욕장의 일부가 위치한 바닷가였다. 그곳에 군기지가 들어서며 대복은 그곳에서 처음에는 날품팔이를, 나중에는 도둑질을 했다. 기차를 탄 미군은 관촌 아이들에게 가래침 뱉은 먹거리를 던졌더랬다. 이러니 소설가가 대천해수욕장이라는 공간에 품는 감정이 고울 리가. 계획한 일정은 이걸로 끝이다. 이제는 돌아가야 할 때.

 

하지만.

 

일상에서 벗어나는 재미로 여행을 떠난다. 짜놓은 일정 대로 가는 것도 좋지만, 문득 정해놓은 계획에서 벗어나 엉뚱한 곳을 찾는 것도 여행에서만 느낄 수 있는 묘미다. 원래 계획이라면 대천해수욕장이 여행의 끝이었다. 부여의 무량사도 소설가와 인연이 깊은 장소라 가면 좋겠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한 터라 마음에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여행의 끝은 성주사지

 

대신 성주사지를 찾기로 했다. 한때는 승려 2,000명이 머물 정도로 컸던 사찰. 지금은 탑 몇 4기만이 자리를 지키며 전성기 때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폐사지다. 『관촌수필』이 세월을 이긴 것이 아닌, 세월에 져버린 것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성주사지는 이번 여행의 종착지로 꽤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그곳으로 향했다. 성주사지에 관한 글은 아니나, 소설가가 ‘세월’에 관해 써내려간 아름다운 글을 옮겨본다.

 

세월은 지난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이룬 것을 보여줄 뿐이다. 나는 날로 새로워진 것을 볼 때마다 내가 그만큼 낡아졌음을 터득하고 때로는 서글퍼하기도 했으나 무엇이 얼마만큼 변했는가는 크게 여기지 않는다. 무엇이 왜 안 변했는가를 알아내는 것이 더 중요하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촌부락을 방문할 때마다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관촌부락도 어디 못지않게 변했다. 뭉개진 붱재에는 여자중고등학교가 보다 높은 봉우리로 솟아 있었으며, 여우가 길을 잃어우짖었던 개펄은 사철 봇물이 넘실대는 수로를 가운데로 하고 논로와 논두렁이 바둑판으로 그어졌다. 상여가 돌아가던 서낭당터는 라디오 가게가 차지했고, 수백 년을 버티며 견딘 왕소나무 자리에는 2층으로 올린 붉은 벽돌 위에 슬라브 지붕을 인 농지개량 조합 청사가 풀색 새마을 깃발을 드높이 치켜들고 있었다. 서예당터에는 교회 십자가가 우뚝하고, 엉겅퀴와 패랭이꽃이 우북하던 버덩에는 담장에 가시철망이 돌아간 똑 같은 모양의 집장수 집이 대여섯 채도 넘게 들어서 있었으니 산과 바다가 사람보다도 더 못 미더운 동네로 변해버린 거였다. (295쪽)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한 오후, 성주사지에는 작업하는 몇 사람과 나만 홀로 덩그러니 서 있다.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작업은 중단 분위기. 『관촌수필』과, 이문구 작가와 작별하기에 썩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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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영광을 짐작케 하는 광활한 성주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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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사지의 알록달록한 봄 풍경

 

『관촌수필』 예찬

 

앞서도 잠시 말했지만, 『관촌수필』은 망향을 그린 작품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이 이주라고 하지만, 21세기의 이주와 18~19세기 이주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면서 많은 사람이 고향을 떠났다.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만주로 간 사람도 있고, 일제가 실시한 토지조사 사업에서 땅을 빼앗기고 일본으로 돈 벌기 위해 떠난 사람도 있다. 2차 세계대전이 격해지면서는 강제로 징용 끌려간 사람도 많다.

 

해방을 맞았지만 전 국토가 전선으로 변했던 한국전쟁 때도 많은 사람이 고향을 잃었다. 전쟁이 끝나도 더욱 공고해진 휴전선으로 고향을 다시 찾지 못한 사람도 생겼다. 전쟁이 끝나고 대한민국은 고도성장 시기에 접어든다. 자본주의에서 경제 발전의 다른 말은 도시화다. 도시로 몰려든 많은 사람들이 농촌을 등졌다.

 

이렇듯 이전 세대에게 망향이란 주로 농촌을 떠남을 의미했다. 그에 비해 도시화가 어느 정도 끝난 시기에 태어난 세대에게 고향을 떠나는 일은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이주를 뜻한다. 그런 의미에서 농촌문학이라 불리는 『관촌수필』은 앞으로는 한국사회에서 쉽게 나올 수 없는 고전일지도 모르겠다. 많은 사람이 도시에서 태어나서 도시에서 생활하고 도시에서 죽기 때문이다.

 

시대가 변했다고 『관촌수필』의 의의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당시에는 공동체 구성원의 보편적인 감성을 어루만졌고, 토속어와 표준어가 적절하게 어울린 그의 아름다운 문장은 지금 읽어도 아름답기만 하다. 이러한 형식적인 면 외에도 『관촌수필』이 앞으로도 고전으로 읽힐 이유는 확실하다. 다소 추상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휴머니즘’이 그 이유가 아닐까 싶다.

 

『관촌수필』은 관촌이라는 공간에 관한 이야기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관촌에서 부대꼈던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단편마다 소설가가 추억하는 인물이 한 명씩 있다. 그가 이상적인 인간상으로 꼽았던 옹점이나, 뺀질거리긴 하지만 작가에게만은 다정했던 대복, 꿋꿋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어린 소설가에게 귀감이 된 석공 등.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고향도 없었을 터. 그런 의미에서 결국 소설은 인간에 관한 작품이다.
 
어지간히 반성을 하고 보니 나는 결코 남들의 근거 없는 짐작처럼 냉혹 잔인 난폭한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했고, 그런 짓을 두둔하거나 감싸준 적도 없음이 뚜렷했다. 그러나 대인 관계만은 다소 별쭝스러웠으니, 냇자갈처럼 야무지고 매끄러운 알로 깐 자와, 말 많고 잔주접 잘 떠는 되다 만 인간, 단작스럽고 근천맞은 좀팽이 따위에게 박절하게 대해온 사실은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이해하기 거북할는지 모르나 나는 어쩐지 나와 비슷한 성격을 가진 사람은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 곁에 있으면 사뭇 불안하기까지 했다. 따라서 내가 좋아한 사람은 아무 이해 관계 없이 자기 성격에 의해 나를 좋아하던 사람임에 두말할 필요가 없다.

더러 예외가 없을 수 없겠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아무 타산 없이 자기 천성으로 나를 좋아한 사람을 좋아한다. 애초 이렇다 할 인연도 없었고, 재산 권세 이해득실 따위를 개떡으로 알면서 그냥 그저 그렇게 명목 없이 좋아할 수 있던 사람.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알고 있다. (178-179쪽)

 

소설가가 좋아한 인간은 ‘재산 권세 이해득실 따위를 개떡으로 알면서 그냥 그저 그렇게 명목 없이 좋아할 수 있던 사람’이었다. 어린 시절 비극적인 개인사로 정치적인 입장은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던 이문구였으나, 그도 바라던 이상적인 세계가 있었다. 바로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회다.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로서, 역사를 이끌어가야 할 이 땅의 주역은 당연히 서민 대중이다. 그러나 오늘의 대중들은 자기의 위치를 앗긴 채 변두리로 밀려나가 구경꾼 노릇밖에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구경마저도 목숨의 보전 및 본능의 연장전이라는, 절등의 뜻을 품고 있을 정도로 외롭다. (183쪽)

 

당연하겠지만 소설가는 필부가 이끌어가는 세상을 바랐다. 『관촌수필』에 등장하는 그런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세상 말이다. 계산에 밝지는 않아도 정 많고 수더분한 사람과 함께 사는 삶. 어떻게 하면 그런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는 소설가의 표현처럼 ‘참고서와 사서(辭書)가 있을 수 없는(234쪽)’ 물음일 테다. 여타 문학 작품이 그러하듯, 답은 독자에게 주어진 몫이다.

 

소설가 이문구의 생애

 

명천 이문구는 1941년 4월 12일 충남 보령군 대천군 대천리 387번지(현재 보령시 대천2동)에서 태어났다. 5남 1녀 중 4남이었다. 『관촌수필』에 나온 것처럼 조부는 조선사회를 그리워하던 유생이었다. 한산 이씨의 핏줄을 강조하던 조부와 달리 소설가의 아버지는 전통 사회에 미련이 없었다. 남로당 보령군 위원장을 지낸 아버지는 미래에 꾸려갈 공동체를 고심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전력으로 이문구 집안은 몰락한다.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예비검속되어 살해되었고, 둘째 형과 셋째 형도 비극적으로 숨졌다. 이런 여파로 조부마저 운명한다. 한 해에 3대에 걸쳐 가족 네 명이 죽었으니, 어린 소설가에게 충격이 컸을 테다. 이때의 참담한 경험 때문에 이문구는 어떤 위치에서나 ‘중립’을 지키고자 했다는 분석도 있다.

 

『관촌수필』이 농촌소설이지만, 정작 소설가는 농사를 두려워한 면이 있다. 이러한 그의 면모는 작품 속에서도 나타나는데, 「일락서산」의 한 장면이다.

 

“원 아이 손마디가 이렇게 무뎌서야…… 천상 연장 들고 생일이나 헐 손이구나……”
아, 그 아뜩하던 순간을 어찌 잊으랴. 아버지는 단 한 마디, 할아버지 귀에도 안 들렸을 만큼의 한탄 아닌 푸념을 했건만 나에게는 뇌성벽력이나 다름없은 거였다. (58쪽)

 

아버지로부터 인정받지 못한 이 때의 경험으로 농사일에 두려움이 생긴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후에 그가 고향을 떠난 이유로는 농사를 해도 끼니조차 떼우지 못했다는 점, 사상범으로 처형된 아버지와 연계된 감시를 들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그가 평생을 ‘연장 들고 생일’을 하고 싶지 않았던 점은 분명하다.

 

그렇게 그는 서울로 떠났다. 처음에는 장사를 했다. 좌판을 펼쳐놓기도 했고, 떠돌이 행상도 했다. 마침 친척이 토목공사 하청업을 했는데, 그곳에 취직했다. 거기서 도로포장하는 일을 했다. 이때 남로당 간부였지만 구명된 이호우 시조시인 기사를 접한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문인들의 구명운동 덕분에 살아난 것이다. 이문구는 문학을 하면 빨갱이 아들이라도 살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기 시작한다.

 

1961년 소설가가 평생을 사부로 모신 김동리를 만난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한 이문구는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조연현, 김구용 등으로부터 배운다. 김동리가 특히 이문구를 총애했다.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김동리가 시험문제로 이문구가 쓴 습작 소설을 낼 정도였다. 아직까지 변변한 작품이 없었던 한 대학생의 습작소설을 말이다. 재밌는 건 당시 동기생들 중에 조세희, 박상륭, 한승원 등 한국문단을 장식한 기라성 같은 작가들도 시험 문제를 풀기 위해 이문구의 습작소설을 읽었다는 사실이다.

 

명천은 대학 졸업 후에도 일을 했다. 부지런히 습작도 이어갔다. 마침내 1967년 1월 당시 권위있는 문예지였던 『현대문학』으로 등단한다. 스승 김동리의 추천으로 「다가라 불망비」를 포함해 세 편을 발표했다. 1970년대는 농촌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그가 나고 자란 보령에서의 경험이 창작하는 원동력이었다. 창작 활동과 잡지사 일을 병행하던 중 1976년, 36세 때 임경애 여사와 만나 결혼한다. 1977년, 그동안 발표했던 단편을 모아 문학과지성사에서  『관촌수필』을 냈다. 염무응 평론가는 이 작품을 두고 “잃어진 육친과 쫓겨난 고향에 대해 바치는 최대의 문학적 헌사요 낳아 길러준 땅에 되돌리는 가장 귀한 앙갚음”이라고 호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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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유해가 뿌려진 부엉재

 

경기도 화성군으로 잠시 이사를 했지만, 곧 서울로 돌아왔다. 하지만 1980년 정치쇄신특별법 해당자로 묶여 정치활동규제대상에 오르며 운신의 폭이 좁아졌다. 1983년 해금되었고 다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시작한다. 1989년 1월, 이문구는 자신의 고향 관촌으로 돌아온다. 이 시기에 쓴 『매월당 김시습』이 반응이 좋아 서울 송파구에도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2003년 2월 25일 지병으로 타계했다. 그의 유해는 작품에는 ‘뷩재’라고 써진 부엉재에 뿌려졌다. 대표작인 『관촌수필』 외에도 『장한몽』, 『산너머 남촌』 등의 장편소설과 『이 풍진 세상을』, 『해벽』, 『우리동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등의 작품집을 남겼다.

 

* 이문구 소설가에 관한 이야기는 김현정 교수가 쓴 『대전 충남 문학의 향기를 찾아서』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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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엉재에서 바라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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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손민규(인문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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