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내, 유년기를 다독이던
보령이라는 지명은 내게 낯설다. 아니, 아주 낯설지는 않다. 보령군 대천읍이라는 지명은 내가 주소를 적기 시작한 이래 나와 함께했다. 그러나 내게는 보령보다는 대천이 익숙하고, 그보다는 ‘한내’가 더 편하다. 한내, 큰 내. 그곳에서 보낸 유년기를 떠올릴 때면 그 기억의 한중간을 가로지르는 내. 내가 첫 기억이라고 생각하는 기억에도 그 내는 어김없이 등장한다.
물이 마른 내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가득 엎어져 있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킨다. 쨍, 귀가 울리는 듯한 정적. 움직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잔 바람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무섭다. 하얀 옷더미가 햇발을 반사한다. 눈이 금방이라도 멀 것처럼 부시다. 나는 그 하얀 시신들 사이를 비집으며 걷는다. 누굴 찾는 것일까. 단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던 걸까. 그때, 우렁찬 노랫소리가 허공에 번진다. 배를 저어 가자 험한 바닷물결…… 눈부시게 흰 옷을 입고 집단학살을 당한 듯 겹쳐 쓰러진 사람들 위로 노래는 우렁우렁, 위협하듯 쏟아진다. 정적일 때와 또 다른 공포가 엄습한다. 나는 그 위협에서 벗어나려 허둥거리다 잠에서 깨어난다. 집엔 아무도 없고, 옆집 전파사의 스피커에선 <희망의 나라로>가 커다랗게 울려퍼지고 있다.
다섯 살 무렵의 그 꿈은 어쩌면 아이 때엔 기억한다는 전생의 한 장면이었을까. 어쩌다 라디오에서 울려나오는 <희망의 나라로>를 듣게 되면, 지금도 내 속 깊은 곳에서 두려움이 진동한다. 거짓된 희망으로 선동하는 이를 볼 때와 같은 두려움이.
어린 시절, 마음을 어쩌지 못할 때면 나는 냇가로 향했다. 집을 나서면 바로 국도가 나오고, 그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 사거리를 지나면 이내 내가 나온다. 그러나 홀로 평안을 찾기 위해 갈 땐 큰길로 나서지 않는다. 부엌 뒤쪽의 뒷문으로 나서서, 공동우물을 한 번 들여다보고 내처 걷는다. 푹 꺼진 눈두덩이 날카로워 보이는 화교 아주머니의 중국음식 식료품상이 있는 골목을 지나 다시 큰길을 지나면 냇둑에 이른다. 행상 아주머니들이 펜치로 삶은 다슬기의 끝을 톡톡 분지르며 삶을 견디는 곳. 원뿔형으로 만 종이에 담아준 다슬기를 옷핀으로 콕 찔러 빼먹으며 냇둑을 어슬렁거린다. 짭조름하고 쌉싸래한 다슬기를 씹으며 냇둑에 앉아 물비늘이 반짝이는 냇물을 오래 지켜보다보면, 보이지 않는 손이 내 작은 가슴을 가만가만 다독여주었다.
먼 곳에서 온 아이와 처음 만난 것도 그 내에서였다. 이방과의 자발적인 첫 접촉으로 기억하는 만남. 열 살 무렵의 겨울방학이었다. 내에서 스케이트 타는 오빠에게 점심 먹으라는 말을 전하러 집을 나섰다. 냇물이 얼어붙은 걸로 미루어 아주 추운 날씨였을 것이다. 징검다리를 건너 오빠가 있는 곳으로 가는데, 내 또래로 보이는 한 아이가 징검돌 위에 오롯이 쪼그리고 앉아 곱돌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곧 가겠다는 오빠를 두고 먼저 돌아올 때에도 아이는 여전히 거기 있었다. 그 아이에게 말을 건 나는 그 애가 입을 떼자마자 그만 반해버렸다. 축축 늘어지는 고향 말투에 익숙한 내게, 그 애의 언 입에서 나온 당차고 감칠맛 나는 경상도 사투리라니. 무슨 말로 그 애를 일으켰는지 모르지만, 스케이트를 수습한 오빠가 돌아왔을 때 밥상머리엔 이미 그 애가 앉아 있었다. 사기공장 기술자인 아버지를 보러 대구에서 온 혜옥이. 그 겨울, 우리는 날마다 붙어다녔고, 개학 무렵 그 애가 돌아간 뒤에도 몇 번 편지가 오갔지만, 그 또래의 열정이 그러하듯 흐지부지 소식이 끊겼다. 그러나 하얗게 얼어붙은 내의 한가운데, 징검돌 위에 외롭게 쪼그리고 앉아 있던 그 애의 영상은 내 기억 속에서 환하다.
혜옥이 떠난 뒤에도 나는 자주 그 내를 건너야 했다. 우리 집 개가 내 건너편 마을의 개와 정분이 났기 때문이었다. 집에 늘 개를 키우고 있었으므로, 메리거나 케리, 아니면 똘이거나 쫑으로 불렸을 그 개. 그런데 그 한 쌍은 어디서 눈이 맞은 것일까. 그들이 사는 집 사이엔 꽤 긴 골목이며 자동차가 다니는 큰길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몬터규 가와 캐풀렛 가의 높은 담장 못지않게 너른 내가 있었는데. 열정에 사로잡힌 우리 집 개는 호시탐탐 대문간을 노리다가 누군가가 들어오거나 나갈 때면 문틈을 비집고 쏜살같이 뺑소니쳤다. 저녁밥을 먹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으면 그 집으로 가서 데려와야 했다. 그 집에 이르면, 정작 그 집 개는 목줄로 마루기둥에 묶여 있고, 우리 개는 쌀쌀맞은 그 집 주인의 된소리가 언제 날아올지 몰라서 눈치를 보아가며 멀찌감치 엎드린 채 연인 아니 연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달래고 어른 끝에 개를 데리고 물빛 어두워진 내를 건널 때면 내 마음도 가뭇해졌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그렇게, 자기를 낮추고 모멸을 감수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하며 나는 내를 건넜다.
서해, 물썬 갯벌그 내는 남서로 흘러서 서해바다에 이르렀다. 조개껍질이 물살과 세월에 바스러져 모래가 되어 깔린 대천해수욕장이 멀지 않은 곳이었다. 여름이면 대천역 앞은 그 읍에선 파격으로 느껴지는 옷을 입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그러니 소읍의 엄격한 부모들에게 여름철의 해수욕장은 아직 생각이 덜 여문 자기 자녀가 가서는 안 되는 곳, 갔다간 허파에 바람 들기 십상인 곳이었다. 더 자랐다고 쉬 허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미군부대가 있고, 군부대가 주둔한 곳이 으레 그러하듯 유흥가가 형성된 곳이었으므로.
해수욕장에 가서 처음으로 바닷물에 몸을 담근 건 초등학교 6학년 무렵이었다. 해양훈련인가 하는 명목으로, 학교에서 단체로 갔다. 벗은 옷은 개어서 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백사장에 가방으로 눌러두고,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준비운동을 마치고 바닷물에 조심조심 발을 담갔다. 발가락 사이로 쓸려나가는 모래의 감촉. 수영을 배운 적이 없어서, 물이 가슴팍으로 차오르는 곳에 들어서기만 해도 무서웠다. 물속에 있는 시간보다는 조개껍질을 줍는 시간이 더 많았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옷을 갈아입으려고 벗어둔 옷을 집어든 순간, 옷 아래서 볕을 피하던 굵다란 갯지렁이가 툭 떨어졌다. 놀란 내 눈엔 뱀이나 다름없는 크기였다. 엄마야, 나는 그만 펄쩍 뛰며 물러났다. 그 뒤로 한동안, 나는 그 갯지렁이가 내 몸에서 나온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로 알려진 관촌에서 살던 어린 날, 둑길을 가로막은 염소를 피하려다 논에 빠졌을 때 다리에 붙은 거머리를 보며 그랬던 것처럼.
중학교 시절, 나와 가장 친했던 아이는 해수욕장에서 북쪽으로 한참 올라간 주포면의 바닷가에서 살았다. 겨울이면 김을 뜨느라 벌겋게 언 손등이 쩍쩍 갈라지던 사람들의 마을, 은포리. 그 애에게 우편물을 보낼 때면 주소 아래 ‘남양군도’라고 써야 했는데, 그때마다 남양군도라는 지명이 왠지 겉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남태평양 어디쯤에나 있을 법한 지명이 반도 서해안 작은 마을에 왜 거창하게 달라붙은 걸까. 오랜 궁금증은 뒷날, 향토사학자인 친구의 남편이 보내준 『보령의 지명』이라는 책을 통해 풀렸다. 중심 마을인 은포리에서 남쪽 바닷가라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남양군도에 있는 친구네 집에 가려면 간석지의 농수로 옆으로 난 길을 오래 걸어야 했다. 그 길의 흙은 개흙이어서 유난히 보드라웠다. 이따금 나는 그 길을 운동화도 양말도 벗은 맨발로 걸었다. 맨발을 간질이는 마른 개흙이 일깨운 관능은 물이 썬 갯벌에 이르면 그만 가슴이 턱 막히는 막막함에 밀려났다. 뒷날, 한 선배 시인은 동해와 서해를 비교하다 말했다. 뻘도 없는 것이 무슨 바다여. 젊은 시절엔 동해가 좋더니 나이 들수록 서해와 남해가 좋아진다고 말한 사진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어린 눈에 비친 갯벌은 그저 짙은 콘크리트 빛깔이어서, 보면 볼수록 굳어가는 콘크리트처럼 가슴이 딱딱해졌다. 그 시절, 냇물이라면 얼마든지 오래 바라볼 수 있었지만, 갯벌은 되도록 고개 돌리고 싶은 무엇이었다.
그 애의 집에는 큰어머니가 있었다. 백모가 아니라 아버지의 본처였다. 본처와 소실과 소실의 소생이 한집에서 사는, 그런 일들이 그 시절에는 아주 드물지 않았다. 아이를 낳지 못한 큰어머니와 한집에서 사는 일이 어찌 편안했을까. 처진 입매에 설움을 달고 지내던 그 애는 학교에서 날마다 보면서도 자주 편지를 보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잦게 쓴 편지였다. 사랑에 주린 아이였으므로, 그 애는 그 단어를 자주 썼을 것이다. 그때, 내가 보낸 편지에 나도 사랑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사랑이라는 단어는 예나 지금이나 입에 올리는 순간 마음에서 꽁무니를 빼는 듯하니, 아무래도 안 그랬기 쉽고 안 그랬기를 바란다. 그 애는 집 ?편의 야산에서 찾은 자수정을 자주 내게 선물했는데, 우정의 징표였던 자수정들은 다 어디로 흩어진 것일까. 대천읍이 보령시로 변하는 동안 많이 바뀐 시가지의 어느 땅 아래 묻혀 있는 거나 아닐까.
갯벌을 오래 지켜볼 수 있을 만큼 세월이 흐른 뒤, 나는 바다를 혼자 찾기 시작했다. 장항선 열차를 타고 고향역에서 내리면, 고향집으로 향해야 할 발걸음은 자주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바다가 보고 싶은 것뿐이야,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그러나 실상은, 집에 머무르는 시간을 단축시키려는 의도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아코디언 연주를 들으면 몸 안의 피가 쏠리는 듯하고 걸핏하면 맨발로 땅을 딛고 싶어하는 걸로 미루어 전생의 어느 한때는 집시였을 거라고 스스로 믿던 내게, 토박이들이 살고 있는 고향의 견고한 질서는 버거웠다. 이미 떠돌이의 기질이 몸에 배기 시작한 나는 집을 코앞에 두고도 철 지난 해수욕장이나 고깃배들이 정박한 어항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곤 했다. 해안을 어슬렁거리다보면 집으로 갈 용기가 생기고, 그러면 바다를 등지고 읍내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성주산, 검은 물이 흐르던그리고 그곳엔 산이 있다. 초등학교 교가 첫머리에 등장하던 봉황산은 읍 가까이 나지막하게, 성주산은 멀리서 우뚝하게. 초등학교 시절, 봉황산 아래 학교를 벗어난 아이들은 청천저수지 근처까지 열을 지어가며 길가에 꽃을 심었다. 아니면 코스모스 씨앗을 뿌렸던가? 그 길은 또 성주산과 이어지는 길이기도 했다.
성주산에는 백제 법왕 때 창건되어 신라 때 중창된 성주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큰 절 어귀의 계곡이면 어김없이 있는, 쌀뜨물로 계곡 물이 하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 쌀뜨물이 가라앉아 뽀얗던 계곡 물이 탄가루 내려앉은 검정 물로 바뀌어 흐르는 동안, 융성하던 절은 국보와 보물 몇 점, 그리고 도 지정 문화재 몇 점이 드문드문 흩어진 폐허가 되었다. 그 폐허 귀퉁이에 일반 주택처럼 허술하게 지은 법당에 몇 번 간 적이 있다. 그곳은 한때 내 정신적인 스승이었던 스님이 머물던 곳이다. 6?25전쟁 중에 북에서 단신으로 내려온 그분은 대처승이었다. 일제시대 신사였던 읍내의 대승사에 계시던 그분이 그곳을 내주고 성주산에 깃들이게 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처승인데다 신도 집에서 식사를 할 때면 비린 반찬도 드셨지만, 그분은 그 시절 내가 만날 수 있었던 남자 어른들 중에서는 유일하게 연민을 가진 분이었다. 어린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내가 만난 스님 가운데 진정한 스님을 꼽으라면 나는 그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사람이 정신적인 아버지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그분의 딸이 되려 했을 것이다. 성주사지의 절마저 내놓고 더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 뒤에도 새벽이면 어김없이 도량석을 돌던 스님의 목탁 소리가 귓전에 쟁쟁하다.
성주산에는 무연탄탄광이 있었다. 탄광에선 사고가 잦았고 읍내의 정형외과는 호황이었다. 탄광사고로 다치거나 죽은 광부의 가족과 탄주 측이 보상금을 놓고 많네 적네 싸우는 과정에서 살인이 벌어지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담임과 반장, 그리고 내가 성주산으로 문상하러 간 적이 있다. 그 친구의 아버지도 광산에서 일하다 돌아가신 것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상가에서 먹은 애호박볶음의 향기만 남아 있을 뿐.
문상 온 여중생이 기특했던지 아니면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조카 생각 때문이었는지, 친구의 삼촌은 밥을 뜬 내 숟가락에 애호박볶음을 올려놓았다. 아주 맛있다면서. 그가 가장 좋아하는 반찬인 듯싶었다. 새우젓을 넣고 볶은 애호박볶음은 우리 집 밥상에도 자주 오르는 음식이었지만, 나는 그때까지 입에 댄 적이 없었다. 애호박의 풋내 때문이었는지 새우젓의 비릿한 냄새 때문이었는지 모르지만 못 먹는 음식이라고 치부해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그 자리에선 못 먹는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나는 냄새를 들이마시지 않도록 숨을 조절하며 입에 넣고 급히 씹어 삼켰?. 그 삼촌은 밥상머리를 지키고 앉아 내가 밥을 뜨기 무섭게 애호박볶음을 올려놓았고 나는 생목 오르는 걸 참으며 꾸역꾸역 먹었다. 문상을 마치고 나오는 길, 산간의 변덕스러운 날씨는 소나기를 뿌렸다. 길가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담임은 우리를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무던한 성품으로 반 아이들의 신망을 얻던 반장과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담임을 짝사랑하던 그때의 나로선 담임과 단둘이 앉아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름도 유구한 정다방에서 마신 게 사이다였던가 칼피스였던가. 몇 년 전, 버스를 타고 그곳을 지나다 그때까지도 남아 있는 정다방 간판을 보는 순간, 마른땅이 소나기에 젖어들며 피어오르던 흙냄새와 비릿하던 애호박볶음의 냄새가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삼십여 년이 한순간에 지워졌다.
보령을 떠나온 지 삼십여 년, 내가 살았던 집은 남녘 끝자락의 항구도시에서 인도양의 섬에 이르기까지, 삼십여 군데가 넘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에는 호적을 옮겼으니 이제 본적지도 아니다. 그런데도 식구들이 꿈에 나타날 때면 대개 고향집이 배경이 된다. 유년기를 보낸 태생지의 기억은 그리도 독해서, 나는 아직도 그곳을 떠나오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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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혜경 1960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먼 곳으로 전학 가거나 전학 온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보령을 떠났다. 떠났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못 떠난 것 같다. 소설집
『그 집 앞』『꽃그늘 아래』『틈새』, 장편소설
『길 위의 집』이 있다. 현대문학상, 이수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