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에서 故 이문구 작가를 기리며
2014년 『관촌수필』 1편 소설가의 생가터와 집필실 그리고 화암서원
관촌마을은 예전에는 갈머리라고 불렸으며, 지금은 대천동이다. 『관촌수필』에는 여러 가지 정서가 담겼는데 그 중 하나가 변해버린 고향에서 느끼는 애잔함이다.
보령, 소설가 이문구의 고향
‘책 속 그곳’의 2번째 장소는 충청남도 보령이다. 보령은 『관촌수필』의 무대로 이제는 고인이 되어버린 이문구(1941~2003) 작가가 태어나 성장한 곳이다. 신라의 화려했던 불교 문화를 짐작하게 하는 성주사지와 드넓은 백사장을 자랑하는 대천해수욕장, 전국적인 축제로 거듭난 머드 축제로 유명하다. 이밖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많지만 필자는 이번 여행의 기승전결을 모두 『관촌수필』과 관련한 장소로 채우기로 결심했다. 그 만큼 책만으로도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중간에 일정이 다소 변경되긴 했다.)
『관촌수필』은 우리 말을 가장 아름답게 썼다는 이문구 작가의 자전적 기록이다. 얼마나 문장이 아름다웠으면 ‘북에 홍명희, 남에 이문구’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물론 토속어보다는 영어가 익숙한 젊은 세대가 보기에 이문구 작가가 쓴 문장은 사전 없이는 읽어나가기 힘들 정도로 어렵게 느껴지기도 한다. 오죽하면 『이문구 소설어 사전』이라는 책이 나올 정도로, 그가 구사한 단어는 다채로웠다. 이렇듯 방대한 단어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했던 이문구. 그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보령을 감상해 보자.
바다와 간석지 논을 가르는 둑성이도 개펄이나 뷩재 골짜기 못잖게 아이들을 부르던 놀이터였다. 봄에는 어쩌자고 삘기가 그리고 많았을까? 둑성이 안쪽의 논배미와 갈대 욱은 수로는 가을이면 참게와 우렁이 바글거리고, 송사리, 붕어, 망둥이, 기름쟁이, 모래무지 따위 어린 고기들이 물 반, 고기 반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들끓어 아이들을 들뜨게 했다. 달 밝은 가을밤에는 하늘을 가르며 날던 기러기 떼가 내려 앉아 노독을 풀었으며, 살얼음이 가는 초동 어름부터 이듬해 해토머리까지는 길고 날씬한 다리 위헤 하얀 비단 깃을 덩실하게 차려입은 두루미가 쌍쌍이 내려, 물닭 사냥 좋아하던 굵은 아이들을 달뜨게 하던 곳이었다. 여름이면 뜸부기 자주 우는 논배미의 백로와 왜가리 틈서리에 섞인 먹황새의 춤, 돛단배를 몰아오며 떠드는 갈매기 수선에 갈밭으로 물러앉던 해오라기와 메추라기 도요의 수줍음, 서릿바람에 구름 엉기는 뷩재 마루에서 보라매를 에워싸고 시끄럽던 까그매 떼, 추수 끝낸 과수원에 모여들어 눈발 그음하기만 기다리던 겨울까치 날 저물리는 소리… 얼마나 잠포록하고 해가 짧던 동네였던가. 타향살이 20여 년에 나이 40이 가깝도록 못 잊고 책 한 권에도 미처 못다 담은 관촌 부락은 마냥 포근하고 기름진 동네였다. (김현정, 『대전 충남 문학의 향기를 찾아서』 347-348쪽에서 재인용 - 이문구, 「남의 하늘에 묻어 살며」)
엄밀히 말하면, 위 글이 가리키는 곳은 보령이라기보다는 관촌이다. 관촌마을은 예전에는 갈머리라고 불렸으며, 지금은 대천동이다. 『관촌수필』에는 여러 가지 정서가 담겼는데 그 중 하나가 변해버린 고향에서 느끼는 애잔함이다. 이미 지금의 대천동에서 관촌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1995년에 한내문학회에서 세운 관촌마을 비나, 집마다 붙은 ‘관촌1길’, ‘관촌2길’이라는 표시가 없이는 이곳이 옛날의 그 관촌이라고 깨닫기란 무리다. 이러한 사실은 작가 생전에도 느끼던 감정이었다.
관촌마을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표식
한내문학회에서 세운 관촌마을비
그것은 왕소나무의 비운 버금으로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었다. 이제는 가로세로 들쑹날쑹, 꼴값하는 난봉난 집들이 들어서며 마을을 어질러놓아, 겨우 초가 안채 용마루만이 그럴듯할 뿐이었으며, 좌우에서 하늘자락을 치켜들며 함석지붕 날개와 담장을 뒤덮었던 담쟁이덩굴, 사철 푸르게 밭마당의 방풍림으로 늘어섰던 들충나무의 가지런한 맵시 따위는 찾아볼 엄두도 못 내게 구차스런 동네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실향민. 나는 어느덧 실향민이 돼버리고 말았다는 느낌을 덜어버릴 수가 없었다. 고향이랬자 무덤들밖에 남겨둔 게 없던 터라 어차피 무심하게 여겨온 셈이긴 했지만, 막상 퇴락해버린 고향 풍경을 대하니, 나 자신이 그토록 처연하고 헙헙하며 외로울 수가 없던 것이다. (13쪽)
고인의 생가터를 찾다
실향, 고향을 잃어버리는 경험은 한국에서만이 아니라 전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하는 공간에서는 흔히 발견된다. 다만 한국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 실향을 아주 격렬하게 겼었다. 일본 식민지 시절에서 이루어진 강제 이주의 경험, 공동체 구성원 모두로부터 물리적인 자원은 물론 정신적인 자원까지 깡그리 파괴해버린 한국전쟁, 전쟁 이후 압축적으로 진행된 도시화 등.
이러한 여러 역사적 경험이 중첩되어 실향은 공동체 구성원 대다수가 겪게 된다. 이문구의, 『관촌수필』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회 보편의 경험을 가슴 속에 묻어둔 게 아니라, 글로써 표면으로 끄집어냈다는 점. 소설에서도 고백하듯, 그는 실향민이었다. 휴전선으로 가로막혀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북에서 온 실향민과는 처지가 다르겠으나,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공간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점에서 소설가 역시 실향민이었다. 급격한 도시화, 산업화로 관촌은 예전의 관촌이 아니었다.
관촌마을 전경, 왼쪽 소나무 숲 아래 집이 생가가 있던 곳
등산 등성이로 오를수록 내가 첫돌을 맞은 뒤로 십팔 년 동안이나 살았던 옛집의 전모가 조금씩조금씩 드러나보이기 시작했다. 대천읍 대천리 387번지. 할아버지가 만년을 나고, 어머니가 기울어진 가운에 끝까지 시달리다 지쳐 운명을 한, 그러나 내 손에 모든 것이 청산되어 이젠 남의 집이 된 옛집. 대지 삼백오십여 평에 건평 칠십여 평의 ㄷ자로 된 그 집은, 솔수펑이 기슭 잔디밭을 뒤꼍 장독대로 하여 남향받이로 정좌한, 덩실하고 우아한 옛날의 풍모를 조금쯤은 간직하고 있는 듯도 했다. (25쪽)
엄밀히 말하자면, 소설가의 생가라기보다는 생가터라고 보는 게 맞을 테다. 지금 저 집에는 다른 사람이 산다. 듣기로는, 이문구 생가를 찾아 왔다고 하는 손님에게는 집 안을 보여준다는 넉넉한 인심의 주인 분이 살고 계시다고 한다. 하지만 부러 초인종을 누르면서까지 집 안을 보는 건 민폐인 것 같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다.
소설가의 집필실, 그리고 화암서원
소설가가 태어나고 자란 관촌을 먼저 이야기하느라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보령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간 곳이 관촌마을은 아니었다. 서울에서 가다 보면 소설가의 생가터를 찾는 것보다는 북쪽에 위치한 집필실을 찾는 게 먼저다.
1989년 1월, 서울에서 활동하던 소설가는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의 폐가를 얻었다. 고향 가까이로 온 셈이다. 이 시기에 쓴 작품이 『매월당 김시습』이다. 고인 사후 집필실을 보령시에서 사들여 기념관으로 보존하려 한 시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진에서처럼 방치되어 있다. 혹시 고인의 집필실을 찾고 싶다면 화암서원을 오른쪽에 끼고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왼쪽 건물이 집필실
집필실 앞 청천저수지, 청송 주산지를 연상하게 한다
집필실 근처에 위치한 화암서원에 들렀다. 화암서원은 이지함을 모시는 사원이다. 많은 사람에게 이지함보다는 ‘토정’이라는 이름이 더 익숙할 것이다. 매년 초에 인기가 높은 ‘토정비결’을 지었다고 전해지는 토정 이지함. 화암서원 근처에 소설가의 집필실이 위치한 건 우연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이애야, 이 왕솔은 토정 할아버지께서 짚고 가시던 지팽이를 꽂아놓셨는디 이냥 자란 게란다. 그쩍에 그 할아버지 말씜은, 요 지팽이 앞으루 철마가 지나가거들랑 우리 한산 이씨 자손들은 이 고을에서 뜨야 허리라구 하셨다는 게여…… 그 말씜을 새겨들어 진작 타관살이를 했더라면 요로큼 모진 시상은 안 만났을지두 모르는 것을……” (11쪽)
조부가 소설가에게 했던 말이다. 『관촌수필』에서 사람을 향해 그리워하는 정서가 드러나는 대목은 여럿이지만 그중에 압권이 아마 첫 작품인 「일락서산」일 테다. 신정을 맞아 조부의 묘를 찾은 소설가의 회상으로 이루어진 이 이야기에는 할아버지를 그리는 마음이 진득하다. 소설가의 조부는 생전에 토정 이지함의 이야기를 자주 했나 보다. 토정비결 저자로 알려진 이지함은 성리학의 관념주의에 빠지지 않고 실제 농민의 삶을 걱정하는 경세론을 고민했다고 한다.
성리학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도통이다. 도통이란 도가 어디에서 어디로 전해지는지를 뜻하는 말로, 시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뿌리를 강조한다. 일반적으로 조선 성리학은 공자에서 시작한 도가 맹자를 거쳐 정호 정이 형제 그리고 주희까지 이어져 왔고, 그 도를 조선 성리학이 계승한다고 생각했다. 관념적인 성격이 강한 도통이 드러나는 계기는 제사다. 소설가의 조부는 그래서인지 어려운 시절에도 꿋꿋하게 화암서원의 일을 도맡아 했다. 이런 할아버지를 추억하는 소설가였기에 화암서원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을 집필실로 선택했는지도 모르겠다.
화암서원은 주변 경관으로만 보면 한국의 3대 건축이라 칭송받는 안동의 병산서원에 전혀 밀리지않는다. 사원 앞에는 청천저수지가 초록 빛을 뿜어 대고, 뒤에는 경사가 그리 급하지 않은 숲이 사원을 포근하게 안아준다. 그럼에도 화암서원은 규모나 전통 면에서는 병산서원에 비할 바 아니다. 청천저수지가 생기며 수몰지역에 있던 화암서원을 옮겨 온 것이라, 지금 건물은 1959년에 세워졌다. 서원의 구조는 2단이다. 앞에는 동재, 서재, 강당, 관리사가 있다. 뒤에는 사당이 있다. 이런 방식을 전학후묘식이라 한다.
내려다본 경관은 장쾌하나 마당은 답답하게 느껴진다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모르는 필자이지만, 사당 앞의 마당은 다소 아쉽다. 한옥에서 중요한 공간이 마당이다. 원래 고급 한옥에는 마당에 하얀 흙이나 모래를 깐다고 한다. 햇볕을 직광으로 받는 게 아니라 반사광으로 받기 위해서다. 이러한 점을 가리켜 한국적인 미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고, 대놓고 드러내지 않고 은은함이라고 하기도 한다. 한국적 미가 무엇인지에 관한 논의는 차치하고라도 마당을 콘크리트로 메꾸면 보는 사람이 다소 갑갑하다.
서원을 나서자 호랑나비가 맞아준다
* 2편으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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