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윤하정의 공연 세상
손병호, <내 심장의 전성기>에서 헤비메탈 보컬 변신
“무대에 서고 관객이 보이고, 내가 살아있구나 느끼죠!”
불룩한 배에 흰 머리를 휘날리는 50대들이 어울리지 않게 징 박힌 가죽 옷을 입고 고성을 내지르며 헤드뱅잉을 하는데 객석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이 관객들의 심장을 쿵쿵 두드리고 있거든요.
여러분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던 마지막 순간은 언제였나요? 신기하게도 20대의 어느 날을 넘기면 심장이 요동치는 열정은 쉽게 사그라지는 것 같습니다. 현실의 높은 벽을 알게 되면서 평범함이 진리라고 스스로에게 주입하죠. 그런데 가슴을 뒤흔들던 기억은 좀처럼 잊히지 않아서 자꾸 ‘왕년에~’를 읊조리게 됩니다.
100세 시대라는데 어찌 보면 참 서글픈 일이지요. 그런데 여기 386세대가 뜨거운 가슴을 되찾기 위해 헤비메탈 그룹 ‘핵폭발’을 재결성하고 무대에 섰습니다. 불룩한 배에 흰 머리를 휘날리는 50대들이 어울리지 않게 징 박힌 가죽 옷을 입고 고성을 내지르며 헤드뱅잉을 하는데 객석의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그들이 관객들의 심장을 쿵쿵 두드리고 있거든요. 여전히 뜨겁게 살고 싶지 않느냐고요! 그 폭발적인 무대의 중심에는 배우 손병호 씨가 있습니다. 연극 <내 심장의 전성기>에서 헤비메탈 그룹의 리드보컬로 변신한 손병호 씨를 한바탕 폭풍이 지나고 난 뒤 객석에서 만나 봤습니다.
“골이 빙빙 돌아요. ‘그로울링 창법’이라고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가까운데, 비음에 압력을 가해서 내거든요. 30분 정도 하고 나면 어지럽고 속도 메스껍고. 거기다 기타 쳐야죠, 노래해야죠, 대사해야죠. 여러 가지로 아주 죽겠습니다(웃음).”
80년대라는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제대로 빛 한 번 보지 못하고 해체된 헤비메탈 그룹 핵폭발의 리드보컬 최광현. 빛바랜 사진처럼 별 볼일 없는 50대를 보내고 있는 광현을 연기하느라 손병호 씨는 두 달 넘게 음악과 싸워야 했습니다.
“음악이라는 걸 한두 달 안에 마스터한다는 게 불가능하잖아요. 헤비메탈은 많이 접해보지도 못했고. 그로울링 창법이라는데, 처음에는 소리가 나오지도 않았어요. 가르치는 사람들은 두 달 만에 이 정도면 대단하다고 하지만, 욕심에 만족할 만한 에너지가 안 나와서 아쉽죠. 기타도 기본은 쳤지만 일렉은 처음이거든요. 주법도 다르고 소리도 다르고, F코드는 정말 힘들고, 계속 긴장이에요. 그냥 느낌으로 가는 겁니다(웃음). 연극이니까 가능한 거예요.”
보기에도 힘든 이 무대를 손병호 씨는 주 7회, 원톱으로 두 달 동안 강행할 예정입니다.
“제가 하는 게 아니라 무대가 그런 에너지를 만들어줘요. 관객들이 있으면 저도 모르게 에너지가 나옵니다. 관객들의 반응이 좋으면 더 나오죠. 그게 무대의 힘이고, 관객의 힘인 것 같아요. 공연이 오픈하기 전까지는 무척 두려웠는데, 다행히 호응이 좋네요. 가장 큰 소통의 힘은 음악이 아닐까 해요. 헤비메탈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 거기에 드라마가 좋으니까. 관객들의 심장을 자극해서 더 좋아하는 게 아닌가 싶고요.”
관객들의 연령층이 좀 높은 것 같은데, 극중에서도 나온 얘기지만 나이가 더해지면 꿈보다는 현실을 선택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스스로는 포기한 것들을 이 무대에서는 다시 찾아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게 아닐까요.
“그렇죠, 대부분 현실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잖아요. 그래서 다들 ‘꼭 내 얘기 하는 것 같다’고 해요. 그런데 이런 감성이 20대까지도 아우르더라고요. 내가 꿈꾸고 내 심장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용기, 해야겠다는 맹세를 하는 것 같아요.”
극중 광현은 헤비메탈 리드싱어입니다만 연극배우도 만만찮게 힘든 꿈이잖아요. 작품 준비하면서 젊은 시절 생각 좀 하셨겠어요.
“아, 힘들었죠. 그런데 저는 연극을 배우고 알게 되면서 ‘무대가 이렇게 아름답구나!’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돈은 생각하지 않았어요. 요즘 세대와는 달라요. 요즘은 ‘한 회 개런티 얼마예요?’ 물어보더군요. ‘한 회? 요즘은 회로 따지냐?’ 옛날에는 주면 받고, 돈 안 줘도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 좋았거든요. 그만큼 열정이 있었던 거죠. 또 연극을 좋아하게 되니까 이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 머리에는 도대체 뭐가 있을까 궁금했죠. 그렇게 만난 분이 오태석 선생님이고 극단 목화고. 저는 완전히 미쳐서 걸레질 할 생각하고 갔어요. 오 선생님에게 배운 무대, 놀이, 연극이라는 게 제 인생에 큰 작용을 했고, 이렇게 좋은 스승들을 만난 건 제 복이죠. 그분들 덕분에 내가 있을 수 있었고, 그분들이 생각하는 배우로 남아 있고 싶어요.”
그렇다면 배우 손병호 심장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요?
“무대에 서 있는 순간이죠, 어느 무대든. 지금 이 무대를 통해서 더 느끼는 것 같아요. 관객이 오면 심장이 뛰기 시작하고 떨려 죽겠어요. 저는 무대에 서는 시간이 배우에게 최고의 순간이라고 생각해요. ‘내가 배우구나, 살아 있구나!’ 느낄 수 있거든요. 무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두 시간 동안 긴장의 연속이잖아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 조심해야 하고, 앞뒤 눈이 열 개는 있어야 해요. 그렇게 무대를 끝내고 나면 뭔가 해낸 것 같은 성취감이 있죠. 관객 앞에 서 있고, 그 관객들이 날 배우로 인정하고 박수를 보내주는 순간. 무대만큼 좋은 게 없는 것 같아요. 무대가 경제적인 것까지 도움을 준다면 저는 방송 안 합니다.”
그러게요, 이렇게나 좋은 무대는 어째서 꾸준히 배고픈 걸까요?
“구조적인 문제죠. 브로드웨이도 마찬가지예요, 오프(Off-Broadway : 상업적인 뮤지컬로 대표되는 브로드웨이에 비해 소극장 위주의 공연)가 따로 있잖아요. 문화라는 건 경제적인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연극무대는 적은 돈이 흐르니까. 그렇지만 무대를 놓치지 않겠다는 꿈이 있어요. 가족이 있고 그래서 가장으로서 역할을 해야 하니까 드라마나 영화를 하면서 먹고 살지만, 무대가 노다지라는 꿈이 있어요. 대학로를 보세요. 작품 하나가 터지면 열 개 팀을 운영하며 롱런하잖아요. 그건 작품의 힘이거든요. 좋은 문화를 창출하면 돈도 쏟아집니다.”
두 딸이 이 힘든 길을 걷겠다고 하면 어떨까요? 연극하는 분들에게 여쭤보면 대부분 말리겠다고 하시던데요.
“저는 말리지는 않을 거예요. 대신 자기가 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건 아니죠. 밀어주거나 이끌어주지는 않을 겁니다. 스스로 만들어가지 않으면 예술은 되지 않거든요. 어려운 길이면 어려운 걸 겪어야죠. 용돈을 벌든 극단을 말아먹든 알아서 하라고 할 겁니다. 자기가 땀 흘리고 터지고 박아봐야 ‘이렇게 서는 게 맞구나’ 깨닫는 거잖아요. 아니면 그런 척 하는 거예요. 나도 그랬고 선배들도 그랬는데 왜 걔들은 못해요? 뭐, 저도 지금에야 이렇게 말합니다만(웃음).”
참, 이 분이 ‘손병호 게임’의 그 손병호 씨입니다. 연기하는 것만 봐서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게 상상이 안 됐는데, 인터뷰를 하다 보니 무척 유쾌함이 쉽게 전해져 오네요.
“저는 예능 나가면 MVP죠(웃음). 사실 배우는 예술에 대해 논하고 말할 때도 좀 지적이어야 하는데, 생각해보니 예술이나 예능이나 ‘예’는 똑같더라고요. 그런데 ‘손병호 게임’은 예능이라서 터진 게 아니라 이 시대, 모바일 시대가 필요로 하지 않았나 싶어요. 요즘 술자리에 가면 얘기가 안 되잖아요, 다들 스마트폰 보느라. 예전에는 통기타 치며 노래 부르고 수건 돌리고 그랬는데. 그런 감성을 되살린 게임이었죠. 다시 뭉쳐지고 재밌고 술맛도 나고. 새벽 4시가 되도 집에 안가요 사람들이. 그게 무슨 대단한 게임이라고. 그만큼 외로웠던 거예요. 사회적으로 필요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즐기고 인정해주지 않았나 생각해요.”
50대에도 얼마든지 심장이 뜨거워질 수 있다는 걸 이번 무대를 통해 보여주셨는데, 손병호 씨는 50대 배우로서 어떤 길을 완성해 가고 싶은가요?
“제가 무대를 통해 첫 발을 내딛었고, 그걸 통해서 카메라 앞에 서게 될 기회가 생겼고, 그것 때문에 경제적인 혜택을 얻었지만, 내 심장에 있는 하나의 고민은 나를 놓친 거예요. 가족도 나에게 중요하지만, 가장 노릇을 하느라 나를 놓쳤고 그게 무척 힘들었어요. 친구들 만나면 다 똑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외로워지고, 나는 뭐하고 살았나 싶죠. 그러면서 다시 친구들끼리 뭉치고, 자기의 길을 찾고. 그때 문화라는 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배우로서 무대가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땀 흘리고 싶어요. 공연으로 관객들의 기억에 남고 싶고, 관객들이 자꾸 찾을 수 있도록. 그러면 무대에 설 배우들도 줄을 서지 않을까요?”
50대에도 지금 이 순간이 ‘내 심장의 전성기’라고 말하는 손병호 씨가 부럽지 않나요? 극중 사경을 헤매던 50대의 광현이 20대의 자신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을 똑 떨어졌습니다. 그렇게 높은 꿈을 마음껏 품을 수 있는 것도 젊음의 특권이라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죠. 하지만 젊은 날의 푸른 꿈을 모두가 지킬 수는 없습니다. 꿈이 항상 같아야 하는 것도, 거창해야 할 필요도 없죠. 무서움을 모르고 달리던 그 청춘에 흰머리가 나고 주름이 생겼는데 어떻게 같겠습니까? 하지만 심장마저 식는 건 정말 슬픈 일인 것 같아요. 의무만 가득한 무미건조한 삶은 우리가 꿈꾸던 모습은 아니잖아요? 봄꽃도 흐드러지게 피었는데, 무언가 심장을 쿵쾅쿵쾅 뛰게 할, 가슴을 요동치게 만들 일들 궁리해 보시죠. 50대의 드리머 손병호 씨를 만날 수 있는 연극 <내 심장의 전성기>는 6월 1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됩니다.
[관련 기사]
"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