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가 뭐길래
바나나와 쇼핑의 미묘한 관계?
재물은 덕을 위해 있는 것이다. 재물에 집중하는 순간 재물은 덕을 잡아먹고 사회는 주관자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큰 사회든, 작은 사회든. 덕과 재물의 미묘하고도 재미난 관계여!
아빠들은 딸을 좋아하고, 엄마들은 아들을 좋아하는 것이 보편적이 현상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다. 대개 맞는 것 같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다. 엄마의 사랑은 오빠에게로 분명히 많이 기울었다. 어릴 때 바나나가 많이 비쌌기 때문에 바나나는 먹기 힘든 과일이었다. 바나나는 그저 가게에 진열된 것만 보고 입맛만 다시라고 있는, 귀하디 귀한 과일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바나나를 한 손씩이나 사 오셨다. 그때 집에 나랑 여동생이 있었는데 우리는 쩍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웬 바나나야?”
“샀어.”
“진짜로? 진짜로 엄마가?”
“응. 바나나 싫어?”
“아니요!”
엄마는 바나나를 뚝뚝 끊어 동생과 내게 한 개씩 주셨다. 아, 고놈 참 달다. 동생과 열심히 맛나게 먹고 있는데 엄마가 바나나를 검은 봉투에 담으시더니 봉투를 들여다보시며 뭔가 계속 말씀을 하신다. 잘 들어 보니,
“아빠 저녁, 오빠 저녁, 아빠 아침, 오빠 아침, 아빠 저녁….”
아, 무슨 이런 분배가 다 있나!
“엄마, 진짜로 우리는 이거만 먹고 마는 거야?”
“응.”
우쒸! 나랑 동생은 주워온 자식인가! 이틀 뒤에 동생이 물어본다.
“엄마 나 바나나 한 개 먹으면 안 돼?”
“응, 안 돼.”
“히, 그럴 줄 알고 이미 먹었지요.”
아하하하! 순간 엄마랑 나랑 빵 터졌다. 귀여운 것.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나는 전주에 잠시 내려와 있었다. 어느 오후 어머니랑 침대 나란히 누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문득 엄마가 물으셨다.
“너 마음에 드는 남자는 없니?”
“(이런 유도심문에 아무렇지 않게 걸려드는 나는야, 쉬운 여자.) 있어.”
“누구?”
“동문회에서 알게 된 오빠들인데, 한 명은 키가 작은 편에 귀여운데 좀 품위가 있어 보이고, 한 명은 키가 크고 디게 멋있어. 둘 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은 것 같아.”
“걔들은 널 어떻게 생각하는데?”
“(정말이지 이런 질문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응? 그 오빠들이 날 좋아할 이유가 있나? 난 남자애 같고 안 예쁘잖아. 꾸미지도 않고.”
진짜 진심을 담아서 참 일상적이고도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정말로 황홀하게 멋진 오빠들의 눈에 내가 보일 이유가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누워 계시던 엄마가 벌떡 일어나셨다.
“가자!”
“응? 어딜?”
“옷 사러!”
바로 백화점으로 직행했다. 나는 그날처럼 쇼핑을 순식간에 고민 없이 많이 하는 엄마를 본 적이 없었다. 치마 정장 한 벌, 바지 정장 한 벌, 치마에 맞는 스타킹, 여기에 맞는 샌들까지. 순식간에 다 샀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엄마의 마음이란 그런 건가. 물론, 오빠들 앞에서 나는 그 옷들을 한 번도 입어 보지 못했다. 그땐 참 자신이 없었으니까. 다만 그동안 내 기억에 엄마는 늘 돈을 아끼기만 하시는 분이었는데, 이 한 번의 일로 엄마에 대한 진짜 멋진 추억을 갖게 되었다. 이후로 이 방법이 다시 먹힌 적은 없었다는 것이 살짝 아쉽다면 아쉬운 점이지만.
의욕 넘치게 심리학과에 지원하여 합격했으나 막상 가 보니 원하던 학문이 아니어서 대학시절 내내 방황했다. 어쩌다 보니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연수원에 입학하여 깊은 고민 끝에 본격적으로 뿌리내렸다. 상임연구원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나름 ‘문자 좀 쓰는 여자’가 되었다. 《일성록》 1권을 공동번역하고 3권을 단독 번역했으며, 《정조실록》을 재번역 중이다.
<임자헌> 저12,600원(10% + 5%)
“하루키보다 공자를, 커피보다 맹자를 사랑한 문자 좀 쓰는 언니의 촌철살인 일상 수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이제는 거의 쓸 일이 없는 한문을 공부하고 사극에서나 볼 법한 옛글을 번역하는 저자는 소위 ‘문자 좀 쓰는 여자’이면서도, 누구보다도 지극히 현대적이고 시크한 요즘 여자이다.이 책은 현대 여성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