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바다 소년의 포구 이야기
거제도의 대구, 새해면 어김없이 찾아오면 귀한 손님
거제도 장목면 외포
새 해를 맞아, 일출이 아름다운 포구로 떠나볼 작정이었다. 동해안과 경남의 몇몇 포구가 떠올랐지만 금세 계획수정이다. 따지고 보면 뜨는 해는 어느 곳에서 보건 다 비슷한 기분인 것만 같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도, 한적한 겨울바다에 나가서도, 높은 산에 올라서도 결국에는 같은 태양이다.
아차, 대구를 잊고 있었다
새 해를 맞아, 일출이 아름다운 포구로 떠나볼 작정이었다. 동해안과 경남의 몇몇 포구가 떠올랐지만 금세 계획수정이다. 따지고 보면 뜨는 해는 어느 곳에서 보건 다 비슷한 기분인 것만 같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도, 한적한 겨울바다에 나가서도, 높은 산에 올라서도 결국에는 같은 태양이다. 새 해의 일출을 보러가지 않을 이유를 구질구질하게 적고 있는 까닭은, 그렇다 추위 때문이다. 이렇게 무뎌진 감각의 연유를 추위 탓으로 돌리려 한다. 당연한 진리지만 매년 해가 바뀌는 날은 한겨울이고, 무지 춥다. 12월 31일이 여름일 수 없을까. 한국의 사계절을 축복하다가도 유독 한 해의 마지막 날만 되면 일출은 무슨, 하며 이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발가락으로 이리저리 틈새를 봉쇄하고, 목 끝까지 이불을 덮는다. 천장이 점점 낮아지고 세상은 고요해진다. 울려 퍼지는 제야의 종소리와 환호하는 사람들과 이리저리 사랑과 우정을 찾아 날아다니는 전파들, 술잔을 기울이는 손과 달력을 찢는 손. 여러 이미지와 기분 좋은 소음들이 두둥실 떠다니며 천정에 달라붙는다. 어둠 속에서도 눈은 자꾸만 무언가를 찾아낸다. 모서리에 닿으니, 아차 잃어버렸던 그 장갑이 국밥집에 있었구나. 전등을 바라보며, 아차 어머니 구식 폰을 새 걸로 바꿔 드려야 하는데. 반쯤 열어둔 방문에는, 아차 포구 에세이를 빨리 써서 보내줘야 하는데. 아차를 거듭하면 할수록 밤은 깊어만 가고, 그러다 다시 아차. 이 시간에도, 이 날씨에도, 바다에 나가 그물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차, 대구를 잊고 있었다.
외포의 바깥
가덕도와 거제도를 잇는 거가대교를 지나, 십여 분을 더 달리면 한적한 포구 마을로 들어가는 이정표를 발견할 수 있다. 포구는 동쪽의 대금산과 서쪽의 망월산이 감싸 안고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도 안정적이다. 한 팔씩 나란히 뻗어 포구를 안은 두 산이 어떤 거센 파도라도 막아줄 것만 같다. 뒤돌아보면, 여러 섬을 잇는 거가대교가 보이고, 해저침매 터널 위로 바다를 가르는 대형 선박도 볼 수 있다. 바다 위에는 색색의 부표가 떠 있다. 크고 작은 섬 사이로 배들이 지나간다. 햇살이 나의 눈길을 따라서 바다 위로 금빛 수를 놓아준다. 도심에서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왔을 뿐인데도 세상은 온통 초록과 파랑으로 물들어 있다. 남해안의 포구들은 멀리서 보아도 아름답다. 리아스식 해안의 복잡한 지형 탓이겠지만 포구들은 저마다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 곳으로 들어가고 싶어진다.
그런데 왜 외포(外浦)일까. 외따로 떨어져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어쩌면 외가(外家)처럼, 이제는 꺼칠해진 외할머니의 손처럼, 부르면 아련한, 만지면 눈물 나는, 그런 이름인 것일까. 나는 아직 외포의 바깥만 봤을 뿐인데.
대구가 온다
대구는 12월부터 2월까지, 그러니까 가장 추운 겨울에 산란을 위해서 진해만을 회유하는데, 외포는 대구의 최대산지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포구 곳곳에는 생대구를 판매하는 좌판이 줄을 잇고 있었다. 방파제에는 내장을 빼고 깨끗하게 손질된 대구가 볕에 말라가고 있었다. 집집마다 옥상의 빨랫줄에는 빨래가 없었다. 해풍을 쐬는 대구가 빨래 대신 줄맞춰서 흔들거렸다. 건대구는 찜과 마른안주, 탕을 만들어 먹을 수 있기 때문에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양에 비해 값도 싸고, 품질도 좋아서 전국으로 팔려나간다고 했다. 다른 생선에 비해 비교적 비린내가 나지 않아서 깔끔하고 담백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뱃속에 한약재를 넣은 약대구도 볼 수 있었다. 오래먹기 위해서 대구의 뱃속에 소금을 넣어 절였던 옛 조상들의 지혜는 비싼 값으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귀한 상품으로 발전했다. 한약재를 배불리 먹은 약대구도 말라가는 건대구도 펄떡이는 생대구도 모두 외포의 살아있는 풍경이었다.
젊은 선장님의 호의로 대구 잡이를 체험하는 행운을 얻었다. 겁도 없이 배에 올라탄 나는 십여 미터도 가지 않아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멀리서 보았을 때 잔잔했던 바다는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이 거침없이 배를 밀어냈다. 방향 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 때문에 잡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잡아야만 했다. 나는 긴 항해를 예감하며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았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배의 시동이 꺼졌다. 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어업을 진행하려면 족히 한 시간 이상은 나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로 옆으로 거가대교가 보였다. 심지어 포구를 감싸던 망월산은 눈앞에 있었다. 나는 선장님에게 여기서 멈춘 이유를 물었다. 그는 어느새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더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니에요. 대구가 들어와요.”
“예?”
“대구가 지금 바로 아래에 있다고요.”
선장은 밤새 던져두었던 그물을 건졌다. 미끼를 넣는 것도 아니었고, 특별히 잡는 방식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던져둔 그물을 제때 올려내기만 하면 충분했다. 그물 속에는 싱싱한 대구가 펄떡거리고 있었다. 살아서 입을 쩍 벌리는 대구를 보자, 그렇게 이름이 붙은 까닭을 단번에 유추할 수 있었다. 대구(大口)는 어른 주먹 정도는 거뜬히 삼킬 수 있을 정도로 입이 큰 생선이었다. 길이는 족히 70cm가 넘어보였고, 알을 품고 있어서인지 양 팔로 들기에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해장으로 대구탕을 몇 번 먹어본 적이 있었지만 대구가 이렇게 큰 생선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더군다나 포구 가까이에서 잡힐 거라고는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대구탕 한 그릇
바다에서 돌아온 후, 포구 제일 안쪽에 있는 식당을 찾았다. 말로만 듣던 대구의 참맛을 보기 위해서였다. 소금 외에는 간을 하지 않는다는 오래된 식당이었다. 도자기 그릇에 맑은 국물이 가득 담겨 나왔다. 올라오는 하얀 김 위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누구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추위에 얼었던 얼굴이 서서히 온기를 찾았고, 감각을 잃었던 코가 미세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그릇 안에는 미나리와 대구의 하얀 살, 그리고 파와 떡이 보였다. 숟가락으로 국물을 살짝 저어보자 감춰져 있던 생선의 알(고니, 곤이라고 하나 바른 말은 아니다)이 보였다. 알만 찾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그 맛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곤을 입 속에 넣자 쫀득쫀득했고, 살짝 비린 듯싶더니 금세 녹아버렸다. 양은 작았지만 맛이 진해서 오래도록 입 안에 남아 있었다. 국물은 처음에는 조금 싱거운 느낌이었다. 어쩌면 여태껏 먹은 자극적인 대구탕 맛에 익숙해진 건지도 몰랐다. 먹다보니 담백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감칠맛도 우러났다. 이제는 대구의 살이었다. 탱탱한 대구 살을 입에 넣자 미나리가 향을 더해서 코가 뻥 뚫렸다. 살이 부드러워 몇 번 씹지 않아도 입 속에서 사라졌다. 나는 어느새 그릇을 양 손으로 들고 국물을 마시고 있었다. 한 겨울의 추위가 대구탕 한 그릇으로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왜 이곳으로 왔어야 했는지 그 답은 비어있는 도자기 그릇으로 대신 말할 수 있었다.
대구는 매년 이맘때 즈음 외포 앞바다를 찾아온다. 그러니 한 해의 시작을 손님맞이로 시작한다는 말이 된다. 고향을 찾아 대구가 오고, 대구의 참 맛을 찾아서 각 지의 손님들이 외포로 몰려온다. 물론 겨울이 싫어서 이불 속 상상 여행만 떠나려는 나도 슬그머니 일어나 본다. 그래, 새 해부터 가야할 곳이 생겼다. 생각만 해도 벌써, 침이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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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사랑하는 사람
씨네필
문학청년
어쿠스틱 밴드 'Brujimao'의 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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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 저5,500원(0% + 5%)
이방인의 머리 속에, 고만고만한 배들이 들고나는 포구의 어스름은 스산함이나 적막함으로 각인돼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시인 곽재구는 먹빛 바다를 바라보며 술잔을 기울이는 거친 사내들의 왁자함이나 마치 등대처럼 노란 불빛을 밝히고 있는 여염집을 바라보며 '인간의 따뜻함'을 발견해낸다. 작가는 전국 곳곳의 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