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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봄날은 간다> |
‘연애’에 관한 단 한 편의 한국 영화를 고르라면, 나는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선택하겠다. 그 영화를 보고 나왔던 오후를 기억한다. 하늘은 아직 밝았고 강남역 거리는 인파로 가득했다. 낯선 사람들 속에서 나는 한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걷는 방법을 잊어버린 듯이. 그때 계절이 어땠던가. 나는 코트를 걸쳤던가, 반팔 원피스를 입었던가.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지나간 내 삶에 어떤 ‘봄들’이 있었다는 것, 환하게 반짝였던 그 날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가버렸다는 것, 그리고 지금 내 안의 깊은 봄도 서서히 저물어 가리라는 것. 담담한 회한과 명료한 예감. 그 가운데에서 나는 잠시 길을 잃었는지도 몰랐다.
말하자면
<봄날은 간다>는 그때까지 내가 보아 온 모든 한국 영화들 중에서 가장 ‘진짜’ 같은 영화였다. 사랑 때문에 운명을 걸거나 부모를 버리거나 홀로 죽어가는 인물들은 거기 나오지 않는다. 우연하게 시작된 사랑이 어이없도록 금세 달아오르는 과정, 그리고 일상이 설렘을 덮는 순간, 천천히 빛을 잃어가는 모습이 서늘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속도 차이였다. 정점의 순간은 기적적으로 일치하였으나 너무 짧았다. 은수(이영애)의 마음이 더 빨리 부식되어 가는데 비해 상우(유지태) 쪽은 몇 발자국 느렸고, 어쩌면 비극은 그 차이로부터 비롯되었다. 현실에서 사랑이 끝날 때에 우리는 은수이거나 상우이다. 처음의 사랑에서는 상우였다가, 그 다음 사랑에서는 은수가 되는 경우도 많다. 아무려나 관객의 마음을 먹먹하게 하는 쪽은 뒤에 남겨진 사람, 상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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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봄날은 간다> |
사랑이 어떻게 변하느냐며 분노하던 상우의 모습이 아주 오랫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 덩치 큰 소년을 떠올리면 가슴이 답답해져왔다. 그가 내 친구였다면 나는 가만히 퉁을 주었을지도 몰랐다.
상우가 눈망울을 천천히 끔뻑인다면, 나는 또 이렇게 덧붙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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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처음이니 모르는 게 당연하겠지. 누구나 처음엔 그렇거든. 하지만 너도 머지않아 알게 될 거야. 어쩌면 바로 다음 연애에서 너에게도 그런 느낌이 찾아오겠지. 영원히 달콤할 것만 같던 첫맛이 사라지고 입안에 시큼털털한 침이 고이는 그 순간, 사람들이 ‘환멸’이라고 부르는 순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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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그에게 한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사랑을 잃는 것이 모든 것을 잃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이렇게 중얼거리는 어떤 남자에 대하여. 그 남자는 서른다섯 살이고, 2008년 이상문학상 수상작인 권여선의 단편 「사랑을 믿다」 의 주인공이다. 그가 진술한 저 한 문장 안에 숨은 속뜻은 분명하다. 사랑을 잃는다 해도 결코 모든 것을 잃는 건 아니라는 것. 시간에 맡기라는 경구는, 사랑을 잃어본 적 있는 모두가 씁쓸히 끄덕일 수밖에 없는 조언이다. 또한, 그러므로 어떻게든 꾹 참고 견뎌보라는, 결국 지금은 그 무모한 방법 말곤 모든 게 무용하다는 실용적인 충고이기도 하다.
그 남자는 삼 년 전에 이별했다. 왜, 무슨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이별에 닿았는지 남자는 구태여 밝히려 들지 않는다. 사랑을 믿은 적이 있고 (믿었기에 / 상대가 아닌 사랑에) 당한 적이 있다고 진술하는 게 전부다. 그리고 소설은 삼 년 전 그가 실연당했을 때,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아는 여자’를 오랜만에 다시 만나 술 마셨던 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아는 여자’는 실연의 고통에 허덕이는 남자에게 자기의 실연 극복기에 대해 들려준다. 아니, 극복이란 말에는 무언가를 이겨내거나 굴복시켰다는 뉘앙스가 들어있으므로 온당하지 않다. 실연이 유발한 어떤 통증의 터널을 지나 시시한 일상의 세계로 마음의 각도가 살짝 기울여졌던 시절의 고백쯤이라고 해두는 게 적당하겠다. 맥주와 섞인 안동소주를 마시며, 제육과 해물을 반반씩 볶은 안주를 먹으며, 남자는 여자의 덤덤한 고백을 듣는다. 돼지고기를 씹으면서 세상에는 비슷한 종류의 고통들이 많다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이윽고 여자의 이야기가 끝나고 나서, 남자는 어느덧 자신의 아픔이 서서히 무뎌져 버린 것을 느낀다. 그건, 고통은 고통을 알아본다는 것, 그리고 자기 안의 괴로움에만 오롯이 집중하고 있을 때는 죽어도 안 보이던 타인들의 하찮으며 지독한 아픔들을 향해 눈을 돌리게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기적인 치유법이라 해도 좋다. 그 이기적인 약을 복용하고 나서, 비로소 목으로 밥알을 넘길 수 있고 밤에 얕은 잠이라도 들 수 있다면……. 타인과 내가, 세상과 내가, 투명하고 가느다란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실감. 그 남자도 우리도 극한 환란 중에서나 그걸 깨닫는다. 그 남자의 마지막 독백은, 그 이상한 연대의 밤으로부터 삼 년이 흐른 뒤다. ‘괜찮아졌다. 모든 것이 소소한 과거사가 되었다. 그녀는 오지 않고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위로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다. 사랑이 보잘것없다면 위로도 보잘것없어야 마땅하다. 그 보잘것없음이 우리를 바꾼다. 그 시린 진리를 찬물처럼 받아들이면 됐다.’
이제 그는 더 이상 사랑이라는 이름의 신神을 믿지 않는 인간이 된 것이다. 그 마음이 너무 잘 이해되기도 하고, 아리기도 하고, 괜스레 화가 나기도 한다. 은수와 헤어진 삼 년 쯤 뒤에 상우도 분명 그런 남자가 되어 있으리라고 오랫동안 나는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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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봄날은 간다> |
얼마 전, 아주 오랜만에
<봄날은 간다>를 다시 봤다. 그 영화는 십여 년 전 스크린에서 보았던 것과 사뭇 달랐다. 그때는 보이지 않았던 것들, 무심코 스쳐 지났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나는 상우가 분에 못 이겨 은수의 차를 열쇠로 긋는 장면이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연애’에 관한 단 한 편의 한국영화를 고르라면 여전히
<봄날은 간다>를 선택하겠지만, 이제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가 마지막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별 후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 아무렇지도 않게 상우를 찾아와 다시 시작해보자는 뉘앙스를 풍기는 은수, 그런 은수가 선물한 작은 화분을 그녀의 품에 되돌려주고 담담히 뒤돌아서 가는 상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맨 마지막 씬은 언젠가 은수와 같이 간 적이 있는 억새밭 한가운데에 혼자 서 있는 상우의 모습이다. 바람 소리 안에서 그는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제야 상우에게는 하나의 시대가 끝났다. 내 맘이 이미 저만큼 진저리내며 멀어졌다는 걸 외면한 채 상대방에게 애정과다증의 혐의를 덮어씌우는 이들은, 집착을 버리는 순간 그 상대방이 쨍하니 맑아지고 그리하여 갑자기 극도로 차가워진다는 걸 알지 못한다. 은수는 상우가 자신의 손짓을 거절한 이유를 영원히 모르는 채 살아갈 것이다. 그녀가 결국 자신의 원래 모습으로 돌아간 것처럼, 마지막 신scene은 상우도 길고 힘겨웠던 여행을 마치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는 전보다 한층 더 단단한 사람이 되었을 것 같다.
은수와의 이별을 겪어낸 상우에게 ‘이젠 너도 별 수 없지? 쿨한 척하는 소심쟁이의 세계에 들어오신 걸 환영합니다.’라던 십년 전의 나를 반성한다. 바보 될 때 바보 되더라도 딱지 앉은 상처에 다시 멍드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곪아가는 사랑 앞에서 아무렇지 않다는 듯 썩은 냉소를 날리지 않는 순수함, 떠나는 사랑을 끝까지 붙잡아 보고 부끄러워도 커다랗게 울부짖을 수 있는 진정성. 은수와의 사랑에서 상우는 최선을 다 했으며 마지막까지 성실했고 아무도 속이지 않았다. 하나의 여행이 어땠는지는, 여행자의 자세가 어땠는지에 달려 있는 법이다. 십 년 전의 내가 놓쳤던 건 바로 그 점이었다.
2013년에 상우는 몇 살이나 되었을까. 삼십대 후반? 그는 어떤 아저씨가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그 뒤로 그가 몇 번의 여행을 더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도 여전히 누구의 사랑도, 특히 자신의 사랑이라면 더더욱, 조롱하지 않는 그런 남자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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