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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그 남자

<태양은 가득히>의 리플리(알랭 들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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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키가 된 리플리는 정말 행복했을까.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계속 또 다른 거짓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비밀과 죄의식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갈구하지만, 누군가와 그만큼 친밀해지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떠나버려야 하는 비극적 아이러니 속에서.

‘사칭자’라는 존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책 한 권을 읽고부터다. 책의 제목은 『세상을 바꿀 수 없어 자신을 바꾼 사람들』(사라 버튼, 공감출판사, 2000). 거기엔 평생 ‘내’가 아닌 ‘남’을 성공적으로 사칭하고 산 여러 명의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소설가에게는 특히) 숨 막히게 매혹적이다. 이를테면 제임스 배리 같은 인물. 배리는 19세기 영국 사람이다. 그는 유럽 최초로 제왕 절개 수술에 성공한 뛰어난 의사였으며 수 십 년 간 명망 높은 군의관으로 살았다. 그의 비밀은 숨을 거둔 후에야 비로소 드러나는데, 시신을 수습하던 부하들이 그 중년 남자가 사실 여성의 육체를 가졌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세상을 바꿀 수 없어…』의 저자는 사칭자들이 제게 주어진 인생의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결단을 내렸다고 말한다. 그들은 자신을 바꾼 모험가였을 뿐 아니라 현실 탈출의 기술자였다. 사회의 큰 금기 중 하나를 깨고 일관성 있게 거짓말할 각오를 하자, 굳게 닫혀있는 듯 보이던 기회의 문들이 열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왜 요 꼬라지로 태어났을까?’ 태생적인 한계에 꺾이지 않고, 내면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발현한 사람들로 읽어내는 독법이 흥미롭다.

출처_영화 <리플리>(좌) <태양은 가득히>(우)

톰 리플리도 그랬다. 알랭 들롱 주연의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 안소니 밍겔라 감독, 맷 데이먼 주연의 헐리웃 영화 <리플리>는 모두 위대한 작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55년 발표한 소설 『재능 있는 미스터 리플리, The Talented Mr. Ripley)』로부터 모티프를 빌려왔다. 그들이 왜 ‘내가 아닌 누군가’를 사칭하며 사는지 리플리를 보면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는 아마도 자신을 소멸시키고 싶어 했을 것이다. 죽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은 지루하고 비루한 진짜 삶, 그 예속의 굴레를.

재주꾼이라는 별명대로 그는 정말 재능 있는 인물이었으나, 우연히 찾아온 기회를 잡기 전까지는 재능을 발현할 기회 자체를 가지지 못했다. 원작의 리플리는 고아 출신으로 나름대로 청운의 꿈을 품고 올라온 뉴욕에서 별 하는 일 없이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아가는 인생이다. 영화 <태양은 가득히>에서는 전사가 거의 생략되어 있으나 이민자 출신의 빈곤층임이 암시되어 있고, 맷 데이먼의 <리플리>에서는 낮에는 피아노 조율사, 밤에는 호텔 벨보이로 일하는 고단한 처지였다. 바쁘게 일하지만 근근이 생활을 유지할 뿐 희망이라는 단어는 그에게 사치스럽다. 호텔에서 손님의 양복 어깨에 묻은 먼지를 조심스레 털어주는 모습은 많은 걸 상징한다. 다만 태생이 다른 것뿐이다. 부자 아버지가 없었을 뿐이다. 그런 그에게 이태리 남부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는 선박회사 상속자를 데려오라는 특명 아르바이트가 들어온다. 그가 선뜻 먼 길에 나선 것은, 단지 유럽에 가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리플리에게는 ‘이곳’을 떠나는 일만이 절실했다.

출처_영화 <리플리>

리플리는 이태리에서 만난 디키에 매료된다. 리플리가 사랑한 것이 디키라는 인물의 (경제력으로부터 비롯되었을) 자유로운 영혼일까. 아니면 그 자유를 현시할 수 있는 생활방식일까. 리플리와 비교해 디키는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이다. 멋진 외모, 많은 돈, 아름다운 여자친구, 평생 남의 위에 군림해온 사람에게만 있는 거만하고 무심한 눈빛까지. 그런 디키를 리플리가 끔찍하게 동경하고 미워하고 사랑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몰래 옷장을 뒤져 디키의 옷으로 휘감고 거울 앞에 선 리플리의 모습은 섬뜩하다. 더 슬픈 건 그 비루한 열망을 디키에게 들키고 만다는 것. 동경과 자기혐오는 같은 거울에 비친 빛과 그림자다.

변덕스러운 디키와 헤어지면, 곧 이 일이 끝나면, 리플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 뜨겁게 내리쬐는 지중해의 태양을 한 번 맛본 자는 음침한 골목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어차피 그에겐 돌아갈 집도 없었지만. 하늘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평생 도시의 그늘을 떠돌아야 할 처지다. 그는 직접 하늘의 일에 관여하기로 결심한다. 하늘을 무너뜨릴 수 없다면, 갈아치우기로 말이다. 이 세상을 바꾸겠다는 게 아니라 내 머리 위의 하늘만 슬쩍 갈아 끼우겠다는 건데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그는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리플리가 진심으로 원했던 것이 디키의 삶을 그대로 복제하는 거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리플리라는 이름의 모든 걸 완전히 버리고 싶은 게 먼저였을 것이다. 숨소리도, 마음도, 감정까지도. 그건 불가능하므로 인형 옷을 입듯 타인의 인생을 뒤집어썼다. 물론 둘의 출발선이 아예 달랐다는 것, 디키에게 부자 아버지가 있고 리플리에게는 없다는 것이 그의 범죄를 정당화시키지는 않는다.

출처_영화 <태양은 가득히>

내가 궁금한 건 따로 있다. 딕키가 된 리플리는 정말 행복했을까, 하는 문제다. 거짓말을 감추기 위해 계속 또 다른 거짓말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비밀과 죄의식을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를 갈구하지만, 누군가와 그만큼 친밀해지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떠나버려야 하는 비극적 아이러니 속에서. 모든 것을 제 손으로 파괴하고 혼자 남은 그의 마지막 모습에 처연한 연민이 솟아오르는 걸 어쩔 수 없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고 싶었던 그 남자는 우리 모두의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스런 욕망의 그림자를 닮았다.

나는 제임스 배리의 ‘최초의 순간’에 대해 상상해보았다. 간절한 꿈을 가졌던 빅토리아 시대의 한 소녀는 언제 처음 ‘거짓말’을(거짓말이라도!) 꾸며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을까. 소녀는 왜 그토록 의사가 되고 싶었을까. 기발한 방식으로 금기를 깨기로 결정한 그때,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자신이 평생에 걸쳐 그 ‘거짓말’을 열연해야 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자신이 선택한 그 배역의 실체, 그건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까지 순간순간, 온몸과 마음으로 진짜인 척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인데. 어떤 진심도 바깥으로 털어놓을 수 없다는 말인데.

지금 그 어리고 똘똘한 소녀가 내 앞에 있다면 한 번만 꽉 안아주고 싶다. 속삭여주고 싶다. 얘야, 너의 계획은 성공하게 된단다. 거의 모든 불안과 거의 모든 행운과 거의 모든 영광과 거의 모든 슬픔이 ‘너라는 존재’를 천천히 통과할 거야. 그리고 마침내 다 흘러가 버린단다.



앞으로 매주 화요일, 정이현 작가의 칼럼 <정이현의 남자 남자 남자>를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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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이현(소설가)

1972년 서울 출생으로 단편 「낭만적 사랑과 사회」로 2002년 제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후 단편 「타인의 고독」으로 제5회 이효석문학상(2004)을, 단편 「삼풍백화점」으로 제51회 현대문학상(2006)을 수상했다. 작품집으로 『낭만적 사랑과 사회』『타인의 고독』(수상작품집) 『삼풍백화점』(수상작품집)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풍선』『작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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