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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혹적일 정도로 평범한 통속의 삶을 사랑한 작가

독일 문화가 제시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를 보여 준 세계문학의 대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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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단편선에 수록된 토마스 만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열두 편의 작품은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니체, 작곡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깊이 있는 것들로, 역시 가장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주제는 예술성과 시민성의 대립이다.

토마스 만(Thomas Mann) [출처: 위키피디아]

좋아하는 작가야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이겠지만, 한창 문학과 철학에 빠져 있을 때 나는 토마스 만의 책을 별로 가까이하지 않았다. 나 자신이 세상을 폭넓게 바라볼 만큼 성숙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시대 흐름을 거스르는 듯한 그의 수구적 사고가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토마스 만은 젊은 시절 군주제와 국수주의, 반유대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물론 나중에는 민주주의와 휴머니즘으로 돌아섰지만, 과거의 글 속에 배어 있을지도 모를 반역사적 사고에 대한 의심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 토마스의 중단편을 번역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작품을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어 내려가면서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작품은 작가의 삶과 떼어 놓고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작품은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것이기에 둘은 결코 떨어뜨려 놓아서는 안되는 것일까? 이는 문학계의 해묵은 논쟁거리이기도 하다. 일례로 노르웨이의 크누트 함순은 노벨문학상까지 받았지만, 말년에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나치에 동조함으로써 전후 그의 작품들은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다.

그렇다면 작품을 작품으로만 보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일까? 도덕적으로 비난받는 사람은 그 작품도 함께 비난받아야 할까? 반대로 ‘작가는 작품으로만 말한다’라는 원칙이 반드시 옳다고만 할 수 있을까? 예술 작품을 작품 외적인 요소로 재단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지만, 작품도 결국 사람이 만들고 사람이 감상하는 것이기에 작가에 대한 독자의 취향 역시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토마스 만의 작품을 우리말로 옮기는 내내 따라다닌 단상이었다. 그만큼 그 자체로 문학적 풍미와 향취를 가득 느끼게 하는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리라.

여기에 소개된 열두 작품은 대체로 토마스 만의 초기작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여덟 편은 그간 국내에 소개된 것들이고, 네 편은 처음 소개되는 작품이다. 이야기 하나하나에마다 독특한 색과 결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주제는 역시 예술성과 시민성의 대립이다. 이 대립은 토마스 만의 태생적 뿌리에도 극명하게 드러난다. 뤼베크 시 재무 담당 장관이었던 아버지는 독일 시민계급의 전통적 도덕률을 엄격히 따르는 전형적인 북부 독일인이었지만, 라틴계의 피가 흐르는 어머니는 도덕이나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고 음악을 좋아하는 예술가적 기질의 소유자였다. 이와 관련해서 한 재미있는 조사가 있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천재들의 집안을 조사해 본 결과, 부모의 성향과 혈통이 판이할수록 천재가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다름의 미학’이 천재성과 창의력의 모태일까? 이것이 사실이라면 토마스 만도 예술가의 유전자를 듬뿍 안고 태어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만의 자전적인 소설 「토니오 크뢰거」 에도 이런 대목이 나온다. “내 아버지는 북국의 기질을 타고난 분이었소. 청교도 정신에서 나온 신중함과 철저함, 올바름이 몸에 배어 있고, (……) 반면에 어머니는 정체 미상의 이국적인 피에 아름답고 감각적이고 순진하고, 좀 너저분하면서도 정열적이고, 충동적이고 방종한 성격이오. 이런 두 분의 결합은 의심할 바 없이 굉장히 이례적인 가능성과 이례적인 위험성을 내포한 혼합이오.”

시민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내포한 토니오 크뢰거는 끊임없이 보통 사람들의 건강한 세계를 동경한다. 그들은 단정하고 성실하고 명랑하고 도덕적이다. 주어진 것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하찮은 것에도 즐거워하고, 남들과 어울리는 법을 안다. 토니오는 그런 그들이 부럽다. 자신은 아무리 애를 써도 그렇게 살 수 없고, 그들에게 다가가려고 해도 다가갈 수가 없다. 가질 수 없는 애인처럼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어둠 속에서 지켜보며 괴로워하고 갈망할 뿐이다. 일반인들은 그를 이질적인 존재로 본다. 그가 자기들과는 다른 세계에 살면서 자신들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자신들을 경멸하고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선뜻 그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물론 겉으로는 그에게 존경과 신의를 보내지만, 속으로는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하다. 그건 토니오도 마찬가지다. 늘 일반인들의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정작 그들과 함께 있으면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하고 불편해한다. 일반인들의 편협함과 고루함, 속물근성이 속속들이 보이기 때문이다. 보지 않으려 해도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더 괴롭다. 어쩌면 이 상황을 이렇게 비유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민사회의 대중은 주인에게 자유를 맡기고, 그 대가로 천진한 행복을 얻은 에덴동산의 노예다. 삶의 원칙을 스스로 찾을 필요 없이 주인이 정한 원칙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되기에 본질적인 번뇌와 걱정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대적인 의미로 환원하면 매너리즘에 빠진, 길들여진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토니오는 에덴동산에서 선악과, 즉 인식의 열매를 따 먹었다. 그 대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고독과 번민 속에서 살아간다.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부럽고 그립지만, 그리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곳 삶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 몹시도 분명히 알기에 그곳 사람들처럼 주어진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며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토니오가 예술 세계로 쉽게 받아들여진 것도 아니다. 오직 미美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숭배하는 예술가들은 시민적 양심을 가진 그를 감동도 도취도 없는 인간이라 여긴다. 미의 숭배자들은 현실적 인간들을 경멸하고 깔본다. 그러나 토니오는 ‘예술적인 것, 비범한 것, 천재적인 것 속에도 모호하고 수상쩍고 의심스러운 것이 담겨’ 있음을 깨닫는다. 이런 날카로운 지성의 눈을 가진 사람을 미적 허영기에 빠진 사람들이 고이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는 외롭다. 어느 세계도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시민 세계는 그를 ‘체포하려’ 들고, 예술가들은 그를 ‘길을 잘못 든 시민’이라 부르며 경원시한다. 그가 안주할 곳은 없다. 그저 자기 속에 유폐된 채 현실의 변두리에서 삶을 동경할 뿐이다.

그러나 예술 세계가 반드시 일상과 동떨어진 천재적이고 비범한 것에 국한된 게 아니라 다른 길로도 나아갈 수 있음을 깨닫는다. 토니오는 말한다. “작가를 정말 작가답게 만들어 주는 것은 인간적인 것, 살아 있는 것, 평범한 것에 대한 시민적 사랑”이고, “일상의 환희에 대한 동경보다 더 감미롭고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없다”고. 여기서 평범한 인간과 유혹적일 정도로 통속적인 삶을 사랑하는 예술가가 나온다.

이런 식으로 삶에서 배제된 채 평범한 삶을 동경하고 꿈꾸는 것은 예술가만이 아니다. 「키 작은 프리데만 씨」 에서 난쟁이 프리데만이 그랬고, 「굶주리는 자들」 에서 구걸하는 거지가 그랬고, 「루이센」 에서 제 몸 하나 가누기 힘들 만큼 뚱뚱한 야코비 변호사가 그랬다.

그 밖에 현실의 삶 앞에 허무하게 무너진 예술가의 허영심을 다룬 「어릿광대」, 디오니소스적 예술에 힘없이 무릎 꿇고 만 아폴론적 예술을 다룬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현실과 언어의 채울 수 없는 간극을 그린 「환멸」, 의지와 삶의 문제를 다룬 「행복에의 의지」 등, 소설 하나하나가 곱씹어 볼 문제를 던지고 있다.

해설이랍시고 이런 작품들을 몇 줄로 줄이는 것은 어쭙잖은 짓이다. 마치 저 바다 깊은 곳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이 물 밖으로 나오는 순간 칙칙한 돌멩이로 변해 버리는 느낌이라고 할까? 사람과 인생을 몇 마디로 평한 모든 말이 헛소리이듯 하나의 세계인 소설을 몇 마디로 축약하는 것 역시 값진 보석을 투박한 돌로 만들어 버리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줄거리랍시고 해설이랍시고 어설프게 몇 마디로 정리하는 그 자체가 통속이다. 진정한 보석은 저 바다 밑에 있다. 평이나 해설로 오염되지 않은 작품 자체가 그것이다. 그저 작품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자신의 눈으로 느끼고 감상하기 바란다.

끝으로 번역 이야기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번역을 업 삼아 오면서 완벽한 번역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절실히 깨닫고 있기에, 지금까지는 다른 이의 번역에 이러쿵저러쿵 토 다는 것을 계면쩍고 주제넘는 짓이라 여겼다. 그런데 수많은 고전 번역이 그렇듯, 그간 번역된 토마스 만의 여러 작품도 문학적 풍미는 차치하고라도 기초적인 자료 조사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명백한 오역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으며, 우리말 자체에도 심각한 결함을 보였다. 전문가랍시고 대학교수들이 번역한 책들이 그랬다. 부끄러운 일이다. 독자들은 함량 미달의 번역본을 읽으며 좀처럼 이해가 안 되는데도 그것을 자신의 이해력 부족으로 돌리거나, 아니면 원서가 원래 그렇겠거니 하고 넘긴다. 독자들의 이런 너그러운(?) 오해를 핑계로 수준 미달의 번역서를 버젓이 내놓는 것은 작가는 물론이고 독자에게도 참으로 민망한 일이다. 아무리 번역이 반역이 된 시대라고는 하지만 이는 더 이상은 용납될 수 없다. 옮긴이, 출판사, 독자 할 것 없이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아야 할 때라 믿는다. 이 비판이 내게도 고스란히 돌아올 것을 각오하기에 번역을 대하는 마음이 새삼 엄중해진다.


[관련 기사]

-역동적 삶의 순정, 순정한 삶의 역동 -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거인의 손금, 발자국, 입김 - 윌리엄 포크너(William Faulk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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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단편선-03 토마스 만 토마스 만 저/박종대 역 | 현대문학
사상적인 깊이, 높은 식견, 연마된 언어 표현, 짜임새 있는 구성 등을 보여 주는 만의 단편들은 서구 부르주아지 문화의 본질을 향해 시종 의문의 시선을 던진다. 그리고 이 서유럽 문화의 불안정성과 붕괴의 위협에 대한 끊임없는 의식은 그 문화의 정신적 업적에 대한 인정과 세심한 관심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중심 주제는 현실과 사고와의 관계, 사회와 예술가와의 관계, 현실과 시대의 복잡성, 정신성의 유혹, 에로스, 죽음 등 그와 관련되는 일련의 문제들을 둘러싸고 계속 다른 형식으로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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