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독서의 즐거움과 창작의 스릴을 동시에 맛보는 일이다. 여기에 하나를 더 보탠다면, 독자와 (원)작가를 연결하는 꽤 고급한 중매쟁이의 뿌듯함일 것이다. 하지만 독서가 늘 즐거움만 주는 것도 아니고, 창작의 스릴이란 게 자주 곤혹과 낭패를 불러오기도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잘못 중매를 섰다가는 호되게 뺨을 얻어맞아야 하는 것이 중매쟁이의 운명이란 걸 감안한다면, 번역은 차라리 벼랑에서의 외나무다리 건너기라고 해야 옳을지 모른다. 헤밍웨이를 번역하는 일은, 보통의 번역과는 조금 다른 이유로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일이었다. 그의 작품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 이미 많은 번역서들이 출간되어 있다는 것, 비교적 쉬운 문체와 문장으로 쓰여져 있어 자칫 실수를 했다가는 된통 ‘실력’을 의심받게 될 거라는 것 등이 그런 이유일 터인데, 그래서였을까 분량이 적지 않기도 했지만, 번역하는 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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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네스트 헤밍웨이 (Ernest Hemingway) [출처: 위키피디아] |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작가로서도 한 인간으로서도 보통의 작가나 인간의 그것을 상회하는 역동적 삶을 산 사람이다. 그의 역동성은 때로는 무모함이나 비열함까지 끌어안는 놀라운 포용력을 지닌다. 그는 자신의 시대 거의 모든 전장에 군인과 기자와 작가로 참여했고, 당대의 주요 예술가들과 끈끈하게 교류했으며, 불륜으로 비칠 수도 있는 수많은 여인들과의 사랑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스스로 결정함으로써, 자신의 삶이 지닌 역동성을 드라마틱하게 종결지었다. 단편 소설로는 다소 긴 편에 속하는 「노인과 바다」 와 저 유명한 「킬리만자로의 눈」, 그리고 『우리 시대In our time』 연작 등 이번 단편집에 옮겨진 32편의 단편들은, 헤밍웨이의 이러한 역동적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하지만 그의 단편소설들이 지니는 탁월한 가치는 오히려 역동성의 뒷면에 존재하는, 혹은 그것을 감싸 안는 그의 작가적ㆍ인간적 고뇌와 번민, 가슴 아픈 성찰, 순진성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태생적 인간미, 세계에 대한 연민 가득한 시선들에 있다. 대부분 오래전에 읽었던 헤밍웨이의 단편소설들을 우리말로 옮기며 내가 새삼스레 감탄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경험을 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가령 「킬리만자로의 눈」 에서 보여 준 글쟁이 난봉꾼 해리의 욕망과 허무, 「프랜시스 매컴버의 짧았던 행복」 의 주인공이 보여 준 무모한 몰락, 「노인과 바다」 의 산티아고 노인이 지닌 놀라운 생명력에 깃든 초월에의 의지와 달관은 물론이고 「다리에서 만난 노인」 의 노인이 지닌 투명에 가까운 현실감이나 「청결하고 불빛 밝은 곳」 의 나이 든 바텐더가 슬쩍 보여 주는 여유로움, 「세상의 수도」 속 어린 소년의 순수한 열망과 어처구니없는 스러짐, 「미시간으로」 의 아름다운 아가씨 리즈가 지닌 순정, 「와이오밍 와인」 의 프랑스인 부부가 가진 애틋하고 후덕한 인정은, 내 가슴을 더없이 포근하고 따뜻하게 보듬어 주었다. 헤밍웨이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거친 물굽이와 황막한 야생의 들판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낚시와 사냥의 스펙터클은, 그의 전기를 쓴 작가 제프리 메이어스의 표현처럼 ‘역경 속에서의 우아함’에 다름 아니다. 이는 많은 단편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닉 애덤스’의 섬세한 마음의 갈피 하나하나에서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헤밍웨이의 소설들을 옮기며 내가 느꼈던 모든 것들-가슴 뛰는 열정과 온화함과 따뜻함, 쾌락에 대한 집요한 열광과 관조, 생존에 대한 집착과 극기, 용기와 절제, 쓰라림과 눈물 등이 이 단편집을 읽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전해지기를 바란다. 끝으로, 각종 유럽어들(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을 주석 하나 달지 않고 사용한 헤밍웨이의 ‘고약한’ 작법에 무척이나 애를 먹었는데, 여기에 큰 도움을 준 허밝음양에게 감사를 전한다.
[관련 기사]
-도전이 두려운 마흔들의 멘토, 산티아고 - 『노인과 바다』
-문학사 ‘전설’로 남은 노인, 진짜는 누구인가? - <노인과 바다,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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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문학단편선-01 어니스트 헤밍웨이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하창수 역 | 현대문학
이 책에 실린 32편의 단편들은 역동적인 삶으로 일관했던 헤밍웨이의 삶과 문학을 맛볼 수 있는 작품들이다. 헤밍웨이의 단편소설들은 단편소설이라는 장르 자체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헤밍웨이의 작품들이 실제보다 과대평가되어 있다고 본 평론가나 후배 작가들도 그의 단편소설에 대해서만큼은 최고라고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이 책에 담긴 「노인과 바다」를 비롯해 그가 남긴 30여 편의 단편은 헤밍웨이란 작가를 이해하고 감상하는 데 있어서나 현대적인 단편소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매우 중요하다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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