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마흔 고전에게 인생을 묻다
도전이 두려운 마흔들의 멘토, 산티아고 - 어니스트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인간은 패배하지 않는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 않는다.”
십대 시절에는 1,500파운드가 넘는 청새치를 잡고도 고기 한 조각도 얻지 못한 노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빈손으로 돌아온 노인보다는 그 노인을 비웃고 조롱하는 젊은 어부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산티아고 노인은 그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경험이 쌓인 지혜로운 자와 미숙한 자를 구분할 줄 알게 된 덕분이다.
“히말라야를 올라본 사람이나, 평생 산에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나 평지를 걸으면 똑같아 보이지. 정상에 올랐을 때 찍은 증명사진을 가슴에 달고 다닌다면 모를까.”
취재 중 만났던 산악인 엄홍길 씨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히말라야와 같은 험준한 산을 올랐던 사람과 오르지 못했던 사람 모두 평지에 서 있으면 구별할 수 없다고. 이처럼 평소 우리는 경험이 쌓인 지혜로운 자와 미숙한 자를 구별할 수 없다.
등산뿐만이 아니다. 처음 붓글씨를 배울 때 스승은 힘주어 쓰라고 가르치지만,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면 다시 힘을 빼고 글씨를 쓰라고 가르친다. 수영도 마찬가지다. 처음 시작할 때는 팔과 다리에 힘을 빼라고 가르침을 받아도 자꾸 힘이 들어가지만, 수영 고수가 되면 자연히 힘을 뺀 몸으로 물고기처럼 수영을 한다. 그러고 보면 유명한 화가의 추상화를 보고 유치원생 그림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는 것은 영 틀린 말이 아니다. 서예가나 수영 선수, 또는 큐레이터가 아니라면 고수와 초보의 그 보이지 않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으니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그렇다면 열심히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허탈함을 느꼈다. 물론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고수와 초보자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하긴 고수가 되기까지 거쳐야 했던 극한 경험은 내면에 차곡차곡 쌓여 있으리라.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엄홍길 대장을 떠올린 것은 허망한 줄거리 때문이었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는 매우 단순하다. 오랫동안 단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어부가 평생 한번 만날까 말까 하는 거대한 청새치를 잡았다. 그러나 그는 사투 끝에 잡은 청새치를 상어에게 전부 뜯어 먹히고 결국 앙상한 뼈만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는 출발할 때와 다름없이 여전히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다.
십대 시절에는 1,500파운드가 넘는 청새치를 잡고도 고기 한 조각도 얻지 못한 노인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내심 빈손으로 돌아온 노인보다는 그 노인을 비웃고 조롱하는 젊은 어부들의 편에 서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다시 만난 산티아고 노인은 그때와는 확실히 다르다. 경험이 쌓인 지혜로운 자와 미숙한 자를 구분할 줄 알게 된 덕분이다.
다시 만난 일흔의 노인 산티아고
노인은 멕시코 부근에서 조각배를 타고 홀로 고기잡이를 한다. 84일 동안 노인은 빈손이었다. 결국 친한 벗이자 동료였던 소년도 떠나버렸다. 소년의 부모가 노인이 최악의 불운을 만날 것이라며 소년으로 하여금 다른 배를 타게 한 것이다. 85일째 되던 날, 노인은 여느 때보다 일찍 바다로 나간다.
노인의 독백에서 84일 동안의 불운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다짐을 읽을 수 있다. 저녁이 다가올 무렵, 노인은 드디어 거대한 청새치와 조우한다. 길이가 무려 5.5미터나 되는 청새치였다. 이처럼 큰 청새치를 노인은 난생 처음 보았다. 노인은 작은 배를 끌고 도망가려는 청새치와 밀고 당기며 사투를 벌였다. 밤낮으로 싸우던 노인은 뼛속까지 지쳤지만, 나약해질 때마다 끊임없는 독백으로 스스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누가 알아? 오늘이라도 운이 트일지?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인 걸. 운이 있다면야 물론 더 좋겠지. 하지만 우선 정확하게 하겠어. 그래야 운이 찾아왔을 때 그걸 놓치지 않을 테니까.”
마침내 사흘째 되던 날, 노인은 작살로 대어의 심장을 찔러 배에 붙잡아 맸다. 평생에 걸쳐 가장 도전적인 작업에서 노인은 승리했다.
“이보게, 늙은이, 자네나 두려워 말고 자신감을 갖게.”
“고통쯤이야 사내에겐 별거 아니지.”
“난 견딜 수 있어. 아니, 반드시 견뎌내야 해.”
희망을 버린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하고 그는 생각했다. 더구나 그건 죄악이거든.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자, 하고 그는 생각했다. 지금은 죄가 아니라도 생각할 문제들이 얼마든지 있으니까. 게다가 나는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않은가. 난 죄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데다 죄를 믿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아. 고기를 죽이는 건 어쩌면 죄가 될 지도 몰라. 설령 내가 먹고살아 가기 위해, 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한 짓이라도 죄가 될 거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죄 아닌 게 없겠지. 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기로 하자.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는 이미 때가 너무 늦었고, 또 죄에 대해 생각하는 일로 벌어먹고 사는 사람도 있으니까 말이야. 죄에 대해선 그런 사람들에게 맡기면 돼. 고기로 태어난 것처럼 넌 어부로 태어났으니까. | ||
노인의 모든 것이 늙거나 낡아 있었다. 하지만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바다와 똑같은 빛깔의 파란 두 눈은 여전히 생기와 불굴의 의지로 빛나고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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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주
열심히 살면 행복하다는 신념을 가진 전형적인 워커홀릭. 마흔을 앞두고 열심히 뿐 아니라 잘 살고 싶다며 고전을 들었다. 속독과 다독을 통해 며칠이고 마음을 빼앗길 명문장을 캐내는 것을 즐긴다. 현재 서울신문 경제부 기자. 연세대에서 영문학·심리학을 전공했고, 동국대학원에서 광고홍보학 석사를 받았다. 2012년 7월부터 1년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UNC) 저널리즘대학에서 방문연구원(visiting scholar)으로 지내고 있다.
우경임
읽기를 놀이 삼아 자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절박한 학습이었다. 딱히 잘못된 것은 없는데 인생의 실타래가 꼬인 것만 같았다. 이리저리 용을 써 봤자 더욱 복잡해질 뿐이었다. 행간에서 답을 찾고자 빨간 줄을 정성껏 그어가며 읽었다. 정독을 즐기는 작가는 현재 동아일보 사회부 기자. 연세대에서 사회학·심리학을 전공했고, 연세대학원에서 사회학 석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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