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세대와 신세대, 오렌지족(심지어 아류인 낑깡족도 있었죠.), 길게 줄을 늘어선 공중전화, 삐삐. 아날로그 소통이 익숙했던 1990년대. 어릴 때는 그토록 밤을 지새울 만큼 설레던 것들이 이제는 신문이나 TV에서 보여주는 역사의 한 토막이 되어있네요. 기억조차 역사가 되어가니 나조차 지나간 존재가 되는 것 같아 씁쓸할 때가 있지 않나요. 1990년대에 드라마를 보며 꿈을 키우고, 노래방에 가서 주제곡을 열창하고 밥 먹는 것도 잊을 때가 있던 철 없던 나이였건만 이제는 한 순간 낮잠 속 꿈만 같네요.
요즘에는 드라마에 출연하는 아이돌이 대부분 주제가를 부르지만 1990년대에는 주제곡만 부르면 벼락스타가 되던 시절이었답니다. 팝송으로 삽입된 것들마저 잘 팔려나갔으니까요. 때문에 음반제작자나 직배 음반사나 드라마 OST를 흥행의 타킷으로 삼았지요. 하는 김에 노래 제목과 제작자는 물론, 출연진과 제작년도까지 함께 알려드립니다. 최초의 스포츠 드라마 <마지막 승부>, 김민종, 손지창, 이정재의 <느낌>, 이강토 한혜원의 <미스터 큐>는 2편에 계속됩니다.
「질투」-유승범 (작사/최연지, 작곡/김지환)
<질투> MBC 1992年作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라는 도입부만 해도 그때의 기억으로 잠기게 하는 마성의 주제곡입니다. 트렌디 드라마의 포문을 열기도 했죠. (트렌디 드라마란? 일본 방송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인기 배우를 주인공으로 하여 흥미를 끌 수 있는 도시생활, 첨단패션, 신세대의 사고방식 등을 주요 소재로 내세워 젊은 층을 공략하는 영화나 TV드라마를 지칭함.) 당시 후반부에서 주연배우 최수종♥최진실의 키스신을 찍던 획기적인 카메라 무빙을 기억하지 못하시는 분은 없을 것입니다.
OST 앨범 발매가 성황리에 이루어지고 있을 쯤 표절판결(일본 남성밴드 Hound Dog의 「Fly」)이 나서 부분 수정 후 재발매를 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코드진행이 비슷했던 탓에 LP에는 원곡이, CD에는 수정이 되어 기존 곡 보다는 밋밋한 질투가 수록되어있습니다. 당시 아주대 생명공학과 공대생이었던 유승범(본명 김승범)은 드라마 <질투>의 대성공 이후 스타덤에 올랐으며 작곡가로도 변신하기도 했죠. 대표적인 곡으로는 김경호의 「금지된 사랑」, 정일영 「Reason」(드라마 <가을동화> 메인 테마 곡)이 있습니다.
또한 질투로 활동하고 있던 중에도 여가수 이재영의 「실루엣」 을 작곡하면서 작곡가로서의 면모를 일찍이 보이기도 했답니다. 이후 「질투」 는 기억해도 가수 유승범은 잊혀져갈 때 쯤 또 한 번 그가 화제가 된 것은 얼마 전일이지요. 바로 작년에 열렸던 2012년 런던 올림픽의 폐막 시즌이었죠. KBS에서 우리 국민들을 웃고 울렸던 순간을 담은 영상을 내보냈던 적이 있습니다.
특히 ‘1초 논란’으로 플로어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던 펜싱 국가대표 신아람 선수의 장면에 깔려있던 뭉클한 음악은 한 편의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했답니다. 이른 바 ‘신아람 송’으로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기도 했죠. 이 곡의 제목 「U're the champion」 의 제작자가 바로 20년 전 「질투」 를 부른 가수 유승범이었답니다. 직접 부르진 않았지만 아쉬움과 환희의 순간이 영상과 함께 교차하는 모습에 보는 이들을 짠하게 했습니다. 현재 유승범은 관동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로 재직해 후배양성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장미의 미소」 - 신인수 (작사, 작곡 이남우)
<내일은 사랑> KBS2 1992年作
1990년대 초반에는 방송3사가 앞 다투어 캠퍼스 드라마를 제작했습니다. MBC에 <우리들의 천국>이 있다면 KBS에는 <내일은 사랑>이 있었죠. 지금은 헐리웃 스타가 된 이병헌(건축과 2학년 신범수 역)의 인기가 대단했습니다. 고소영, 박소현도 출연했죠. 특히 박소현은 남자 선배들을 ‘형’이라고 부르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청춘, 청소년 드라마는 시트콤(남자 셋 여자 셋, 논스톱, 사춘기 등)으로 옮겨가면서도 인기를 끌었지만 요즘에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든 점이 안타깝네요.
‘오늘은 그대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여요~ 그대의 두 손에 담겨진~ 빨간 장미가 함께 웃네요~♩♪’ 1990년대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노랫말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 시절 그때의 기억으로 조용히 이동하고 있나요? 주제곡을 불렀던 스물네 살의 신인이었던 신인수는 일약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후 1집 활동을 마무리하고 새 음반을 준비하는 동안 여러 작곡의뢰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웬 걸, 반응이 좋았습니다. 그 결과 본업도 바뀌었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가요계에 몸을 담고 있습니다. 다만 가수에서 작곡가로 전공을 바꾸었을 뿐입니다. 그의 작품이 굉장히 많아 살짝 정리해봅니다.
영턱스클럽 - 훔쳐보기
핑클-블루 레인(데뷔 곡), Feel your love(3집 나우 후속곡), 나의 왕자님께
SES-비가, 애인찾기
H.O.T. - 하나라는 아름다운 느낌
김범수-가슴에 지는 태양
플라이투더스카이-가슴 아파도
다비치-남자도 우나요, 한 사람
이처럼 다수의 곡이 인기를 끌면서 히트곡 메이커 반열에 오르게 됐죠. 특히 영턱스클럽의 「훔쳐보기」 는 이효리가 솔로 2집에서 리메이크하기도 했지요. 드라마 OST에도 뛰어들어 <겨울연가>, <발리에서 생긴 일>, <패션70s>, <아일랜드>, <아이리스>, <대물>, <닥터진>, <스파이 명월> 등 그의 손을 거쳐 간 드라마 OST 또한 수십 장에 달하죠. 발라드, 댄스, 알엔비, 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하게 된 것은 편애를 거부하는 음악성향 덕분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작년에는 데뷔 20주년 기념 앨범 < The S>를 통해 그의 음악인생을 말해주는 자전적 음반을 발매하기도 했습니다.
아껴둔 사랑을 위해 - 이주원 (작사/박주연, 작곡/손무현)
<우리들의 천국> MBC 1993年作
캠퍼스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 1990년, 1993년 시즌 1, 2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시즌1 : 염정아, 최진실, 유호정, 홍학표 등
시즌2 : 장동건, 김찬우, 전도연, 이승연 등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탤런트 홍학표 주연의 시즌1이 막이 내리고 시즌2에서는 김찬우, 장동건을 투톱으로 내세웠습니다. 드라마, OST, 그리고 출연진까지 인기몰이가 계속됐죠. 당시 톱스타들만 출연한다는 <토토즐>(다들 아시겠지만 MBC 음악 쇼프로그램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의 준말이지요)에 김찬우, 장동건이 출연해 라이브 무대를 보여주기도 했답니다. 당시 청춘스타 장동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드라마 중반부에는 장동건이 부른 「너에게로 가는 길」이 더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주제곡을 부른 가수 이주원의 데뷔 동기가 독특하답니다. 방위 복무 중 가수 김민우와 함께 MBC <우정의 무대> 제작에 차출되면서 방송, 가요와 인연을 맺게 됐다고 합니다. 이주원의 노래실력을 눈여겨보았던 김민우는 이주원을 손무현에게 소개시켜 가요계에 첫발을 내딛었다고 합니다. 손무현 작곡의 데뷔 곡 「아껴둔 사랑을 위해」로 신인가수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데뷔 앨범은 이승철, 윤상, 최태원(조용필의 위대한 탄생 건반연주자) 등이 편곡, 연주에 참여해 주목을 끌기도 했죠. 이후 뚜렷한 활동 없이 지내다가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 드라마 <별을 쏘다>의 주제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영화 <과속 스캔들>에 박보영이 라디오에서 노래를 할 때 심사위원이 출연하죠? 그 중 한명이 가수 이주원이랍니다.
하늘 끝까지-정연준 (작사/정연준, 작곡/윤상)
<파일럿> MBC 1993年作
시청률 50%를 넘긴 <질투>의 대대적인 성공 이후 야심작이 있었으니, 국내 최초의 항공드라마 <파일럿>입니다. 대한항공의 공식협찬으로 당시 제작환경으로는 생각지 못했던 스케일을 선사하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미국 등 현지 촬영을 하기도 했죠. 출연진으로는 최수종, 채시라, 김혜수, 한석규 등 화려한 캐스팅을 자랑하죠. 드라마 인기 덕에 당시 학교에서 장래희망조사를 하면 비행기 조종사 혹은 스튜어디스를 꿈꾸던 학생들이 많았답니다. 생소한 주제로 항공에 관해서 대중들의 관심을 키우는데도 일조했다고 봅니다.
‘그것이 끝이라고 우린 믿지 않았지~’로 시작되는 이 곡 역시 1990년대 특유의 감성이 젖어있습니다. 인트로는 군악대의 행진곡처럼 웅장하지만 ‘너를 뜨겁게 안고서 두 팔이 날개가 되어 언젠가 네게 약속했던 저 달로’라는 노랫말이 지금 보면 살짝 민망하기도 하죠. 사운드는 화려하지만 연약하면서도 곱게 불러내는 목소리. 소박함이 느껴지는 노래가 그 시절 그 감성으로 더욱 빠져들게 하는 것 같습니다.
시청률과 함께 주제곡을 부른 정연준 역시 화제를 모았지만 드라마 인기에 무임승차를 하기가 싫어 당시 방송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1집 발매 후 듀스의 1집부터 3집까지 보컬 디렉팅을 맡았으며 그 후 자신이 속한 1세대 힙합그룹 ‘업타운’을 제작하면서 제작자와 가수의 길의 중도를 영리하게 걸어갑니다. 그가 리더로 있는 업타운의 데뷔곡과 히트곡 「다시 만나줘」, 「내 안의 그대」 를 썼고요. 이외에도
타샤니-하루하루
핑클-Don't go away(4집 후속곡)
서인영-너를 원해, 가르쳐줘요 (솔로 1집 타이틀, 후속곡)
조관우 - 사랑했으므로
솔비-두잇 두잇 (솔로1집 타이틀)
투샤이-러브레터 (DSP Ent. 신인 데뷔 곡)
이삭N지연-원 (과거 SM소속 알앤비 여성듀오의 1집 후속곡)
등 흑인 체취를 풍기는 사운드뿐 아니라 슬픈 발라드, 발랄한 댄스 풍의 분위기 곡도 제작했죠. 또한 업타운 멤버 스티브 김, 솔리드의 이준, 정재윤과 함께 2007년 ‘솔타운’이라는 콜라보 그룹을 만들기도 했답니다. (타이틀곡은 「My lady」로 이준의 중저음을 기대한다면 꼭 들어보세요!) 정연준이 작곡한 곡들로 가을을 한껏 느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글/ 허보영(stylishb@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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