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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를 정복했던 야구 천재 이종범 - 응답하라 1994

1994년을 열광케 했던 스포츠, 그리고 스타들 오, 나의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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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에 나는 막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다.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들어간 사립중학교에서는 체벌이 횡행했고, 부모를 자주 나오라 하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에 심취했고, 심은하가 두각을 나타냈고, 최진실이 주가를 올렸다. 사실 나는 몰랐다. 1994년, 그해부터 본격적인 나의 ‘학창시절’이라는, 길고 긴 투쟁과 체벌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힘들었다. 그저, 짧게 잘라버린 머리가 어색했을 뿐이다. 보여줄 사람은 없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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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영어듣기, 손등을 아프게 잘 때리던 담임선생, 동네에 출몰하던 무서운 형들, 엄지발가락을 거치고 신던 일본식 슬리퍼, 줄무늬 팬티 그런 것들을 인지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1994년에 나는 막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다.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들어간 사립중학교에서는 체벌이 횡행했고, 부모를 자주 나오라 하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에 심취했고, 심은하가 두각을 나타냈고, 최진실이 주가를 올렸다. 사실 나는 몰랐다. 1994년, 그해부터 본격적인 나의 ‘학창시절’이라는, 길고 긴 투쟁과 체벌의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는 힘들었다. 그저, 짧게 잘라버린 머리가 어색했을 뿐이다. 보여줄 사람은 없었지만.


1. 몬주익 언덕에서 히로시마 공원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언덕’은 몬주익 언덕일 것이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황영조는 몬주익 언덕에서 경쟁자를 따돌리고, 올림픽 스타디움까지 그대로 1위로 입성했으며 라인을 통과하고 트랙에 그대로 누워버린다. 하필 언덕에서 황영조에 뒤쳐진 선수의 국적은 일본이었고 우리는 베를린 올림픽에서 일본 국적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손기정의 스토리를 몬주익에 오버랩하며 감격스러워했다.




한국은 80년대의 여러 우여곡절을 뒤로하고 있었다. 곧 선거가 치러질 것이고, 더 이상 군인 출신 대통령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결승점을 통과한 황영조처럼 중력에 완전히 몸을 기대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몬주익에서 황영조는 모리시타 고이치를 제치고 월계관의 주인공이 되었다. 우리의 고난도 그렇게 끝날 것만 같았다. 그러나 2년이 지난 1994년, 원폭의 도시 히로시마에서 황영조는 다시 레이스에 돌입한다. 끝났다고 끝난 것이 아니었고, 우리 앞에는 또 다른 몬주익이 몬주익 보다 더한 경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1992년 몬주익 영웅을 TV로 지켜보던 수많은 작은 영웅들의 운명일지도 몰랐다.

마라톤의 42.195Km는 기나긴 인생과 역사의 일부분에 불과했다. 히로시마에서 황영조는 또 다시 금메달을 땄다. 그리고 레이스의 종착지인 히로시마 원폭 기념 공원을-바르셀로나에서처럼 누워 쉬지도 않고-태극기를 들고, 몇 바퀴를 돌았다. 태극기가 유난히 펄럭거렸다. 팔랑거리는 우리들의 심정처럼.


2. 도하의 기적, 도하의 운명


우리 스포츠는 일본과 밀고 당기기를 끝없이 반복하면서 발전했다. 사랑이라 부르기에는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일본 없이는 조금 허전한 게 사실이다. 특히 축구의 경우가 그렇다. 90년대가 되기 전까지, 우리 축구가 일본에게 진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일본에 J리그라는 축구 선진국 시스템의 프로리그가 생기고, 여러 투자로 실력이 부쩍 늘었음을 우리는 간과했다. 당시 우리는 그것 말고도 일본에 대해 아는 것이 참 없었다. 대중문화는 정식 수입 허과가 나지 않았고, 그때 젊은이들은 일본 애니메이션이나 가요 등을 어둠의 경로로 어렵게 입수하고는 했다. 위성방송에서는 나미에 아무로가 춤을 추었고, 책상 밑에는 만화책 오 나의 여신님의 페이지가 넘어갔다. 일본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이, 축구만큼은 확실하게 이겨야 했다.




도하에서 미우라 가즈요시(놀랍게도 아직 현역이다)에게 결승 득점을 헌납했을 때, 이 땅의 많은 아버지들의 애꿎은 리모컨을 배가 불룩 나온 브라운관으로 던져버렸다. 이윽고 지역예선 마지막 게임, 우리는 무조건 이기고 일본은 져야 하는 상황, 기적이 일어났다. 이라크가 경기 종료 1분을 남기고 결승골을 넣은 것이다. 1993년 어느 날, 그 1분으로 한국은 월드컵에 나갔고, 일본은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다. 짧은 한순간이 많은 일을 결정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순간은 더 짧은 순간의 결정이 모여 구성된 것이고, 그것을 우리는 운명이라 부른다. 도하에서의 운명은 그런 운명이었다. 우리는 1994년 월드컵에 나갈 운명이었다.


3. 자네에게 영광의 시절은 언제였나.


80년대가 시의 시대라면 90년대는 농구의 시대였다. 드라마는 <마지막 승부>를 보고, 만화책은 <슬램덩크>를 펼쳤다. 청춘스타는 이상민이었고, 국민 천재는 허재였다. 세기의 라이벌전은 연세대와 고려대의 농구 시합이었다. 흑인의 그것에 비해서 조금 밋밋했던 정재근의 덩크슛에 우리는 열광했다. 강동희의 긴팔원숭이 같은 능글능글한 패스에 감복했다. 이름도 정겨운 ‘농구대잔치’에 오빠 부대는 기록적인 데시벨의 높은음을 기록하면서 응원에 열성이었다. 남자들은 농구를 잘 해야 진정한 남자로 각인될 수 있었으며, 그래서 아직 남자라 부르기에는 모자란 중고등학생들은 헐렁한 바지와 치수가 큰 농구화를 신고 농구공을 퉁퉁 튀겨가며 길거리를 활보했다. 동네마다 설치된 농구대에는 3~4개의 농구공이 동시에 림을 향해 달려들었으며, 즉석에서 시합이 마련되기도 했다.




90년대 우리는 농구처럼 통통 튀었고, 농구공처럼 오렌지색이었으며, 농구 선수처럼 키가 컸다. 하지만 키는 언젠가 멈추게 마련이고, 오렌지색은 빛을 발할 것이고, 공의 튀는 높이는 서서히 낮아지게 되어 있다. 90년대 중반은 그렇게 납득되지 않은 성급함으로 지나가고야 말았다. 우리에게 빛나는 한 시절이 있었다면, 나는 농구공이 하늘을 뒤덮던 그때라고 대답하고 싶다.


4. 댈러스의 깡패들


독일을 전차군단이라 불렀다. 클린스만은 환상적인 슛을 보여줬고 축구공은 우리 골대 속으로 어려움 없이 진입했다. 그 뒤로 댈러스 사막 위에서 나 홀로 얼어버린 골키퍼가 두 골을 연거푸 헌납했고 3:0의 스코어를 유지한 채 후반전이 되었다. 앞선 스페인과의 경기는 전반 초반 상대방 수비수가 퇴장당하는 유리함 속에서 2:2로 비겼다. 스페인과 비기다니, 그때 당시에는 몰랐지만 대 이변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볼리비아와이 경기에서는 8년 뒤 한국 부산에서 열릴 폴란드와의 경기에서 골을 넣기 위해 힘을 비축하고 있었던 스트라이커, 황선홍의 부진 등의 이유로 0:0 무승부를 이룬다. 그리고 지금은 3:0. 세계최강 독일과 변방의 소국 대한민국의 축구경기에 어쩌면 어울리는 스코어였는지도 모른다. 하필 그 경기가 혹서기의 댈러스에서 열렸는지 이유는 알 수 없다. 위대한 게르만 청년들은 미 서부의 더위에 급격하게 지쳐갔다. 하지만 태극전사라 불리는 변방의 축구선수들은 달랐다. 그들은 오랜 합숙과 위계질서로 구축된 축구부 생활, 초등학교에서부터 흙 밭을 구르면서 키어온 강인한 정신력이 있었다. 한글자로 줄이면 ‘깡’이라고 할 수 있다.

황선홍이 따라붙는 골을 터트리고 스스로를 자책하는 박치기 세리모니를 보여줬다. 얼마 있지 않아, 잠시 애국가 자료화면으로 쓰이던 유명한 세리모니를 우리는 목도한다. 서정원의 어퍼컷이 그것이다. 3:2가 되고, 우리 선수들은 악으로 깡으로 독일을 몰아붙였지만 그대로 경기는 끝났다. ‘하면 된다.’ 정신은 그렇게 저물어가고 있었다.


5. 1994년 이종범


1994년 이종범은 프로 2년차였다. 그는 그해 한국야구의 패러다임을 바꾸어놓았다. 1994년 그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타율 3할9푼3리, 안타 196개, 홈런 19개, 도루 84개. 홈런을 제외하고 지금까지 위의 기록은 단일 시즌 최고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는 단순히 기록으로 남는 선수가 아니었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고, 세분화된 기록으로 선수를 평가하고 연봉이 산정되지만, 이종범에게는 숫자로는 다 말할 수 없는 뭔가 특별한 게 있었다.




안타를 치고 1루에 나가고, 도루를 한다. 도루를 하지 않아도 이미 상대 투수는 이종범의 움직임에 심리적으로 흔들린다. 그는 기어코 도루를 하고, 실책을 유도하며, 갖가지 경우의 수를 동원하여 홈으로 들어온다. 멋진 수비를 해내며, 여러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고, 장타가 필요할 때는 장타를 친다. 팬들을 환호하게 하는 방법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본능적 재능에 끊임없는 노력으로 선수생활을 지속하던 그는 2012년 은퇴했다. 그의 퇴장을 지켜보며, 조용히 속으로, 야구장에서 직접 그를 보았다는 사실에 무한한 감사를 보냈다. 90년대가 끝난 것이다. 한 선배는 청춘이 다 지나간 게 실감난다고 하였다.

90년대를 정복했던 스타는 이제 눈가에 주름이 가득한 아저씨가 되었고,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90년대 머리를 노랗게 염색하고 젤과 무스로 멋을 내며 CD로 음악을 듣고 PC통신으로 최신 유행을 감지하던 세대는 이제 기성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었다. 청춘에서 은퇴하려는데, 아직까지 아픈 이유가 무언가? 이종범은 은퇴발표 기자회견에서 결국 눈물을 보였다. 아픔은 청춘을 초월해서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몸소 보여주듯.


1994년. 좋아했던 건 오락실 게임, 학원에서 만나던 여자애들, 새로 산 CD 앨범재킷에 실린 가수의 사진. 싫어했던 건 담임선생님, 수학선생님, 학생부장 선생님.

좋은 것과 싫은 것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못했다. 울퉁불퉁했고 좌충우돌했다. 모든 스포츠는 균형이 관건이다. 몸과 마음의 균형을 누가 더 잘 잡느냐의 싸움이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제대로 균형 잡지 못한다. 그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길 반복한다. 비틀비틀한 시간이 지금까지 굴러왔다. 이제 체벌과 투쟁은 과연 끝났을까. 1994년, 어느 소도시의 주공아파트에서, 까까머리였던 내가 2012년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다. 균형을 잃는다. 다시, 균형을, 잡는다. 그것을 보여줄 사람이 너무나 많다.





이 글을 쓴 서효인님은…


시인이다. 같은 이름의 야구인이 있다. 물론 동명이인이다. 1981년 목포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야구선수가 되고 싶었으나 따라주지 않는 몸뚱이 때문에 실패했다. 야구캐스터가 되고 싶었으나 스펙 때문에 좌절했다. 야구기자가 되고 싶었으나 재빠르지 못했다. 결국 시를 짓고 글을 쓰며 가난한 시간을 그럴싸하게 보내게 되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사회인야구를 하면서 뻣뻣한 몸을 혹사한다. 거의 지고 아주 가끔 이긴다. 아직 제구력은 어설프지만, 책상에 앉아 그립을 단단히 쥐고 주로 직구를 던진다. 그렇게 해서 시집 『소년 파르티잔 행동 지침』을 세상에 던진 적 있다. 지금은 『이게 다 야구 때문이다』를 던지기 위해 글러브로 입을 가린 채 당신을 바라보고 있다.

2006년 《시인세계》로 등단했으며 현재 ‘작란(作亂)’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제30회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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