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완전히 반했어요.
“왜 나를 기억하지 못하니.” 그 절절한 대사로 기억하고 있는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충격을 받았다. 여운이 대단한 영화였다. 세상에 수많은 사랑이야기가 있지만, 가장 풋풋한 첫사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영화라면 지금까지도 나는 이 영화를 최고로 꼽고 싶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첫눈에 반하다’라는 말을 실감했으니까.
우산 속으로 뛰어들었던 그녀, 태희(이은주), 그녀에게 반해 제 어깨가 젖는 줄도 모르고 우산을 씌워주던 인우(이병헌). ‘당신에게 완전히 반했어요’라는 말 대신 신발 끈을 묶어주던 인우와 ‘저도요.’라는 대답 대신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린 태희의 모습은 그 둘의 설렘을 스크린 넘어 가슴 벅차게 다가왔다. 무조건 아는 척, 강한 척하는 인우의 어설픔은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대단한 사랑의 느낌을 고스란히 전달했다.
멜로 영화의 레전드로 꼽을 수 있는 이 영화가 뮤지컬 된다고 했을 때 그다지 기대하지 않았던 것도, 원작의 아성이 워낙 탄탄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는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스크린을 넘어서 무대 위로 살아있는 인우와 태희를 만나는 경험을 하게 해줬다. 아, 떨렸다.
첫사랑 느낌, 무대 위에 그대로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바늘 하나를 딱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 하나가 나풀나풀 떨어져서 이 바늘 위에 딱 꽂힐 확률. 그 계산도 안 되는 확률로 너희가 지금 이곳에서 만난 거다. 너희 옆에, 너희 앞에 앉은 친구들도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른다. 인연이란 거, 좀 징글징글하지?”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에는 영화 속 명대사와 명장면이 압축되어 녹아있다. 교사가 된 인우가 아이들 앞에서 인연을 설명하는 멋진 대사를 뮤지컬 무대에서도 들을 수 있다. 첫 장면에서 인우 역을 맡은 배우 강필석은 칠판에 분필로 크게 인연의 줄을 그리는데, 이 연줄은 공연 끝날 때까지 무대 위에 걸쳐져 있다. 마치 이 무대와 그 앞에 마주앉은 관객의 놀라운 인연을 내내 상기시키듯 말이다.
결국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 징글징글한 인연에 관한 이야기다. 1980년대 감성을 고스란히 담은 무대 속에서 주인공 인우는 대학시절(1980)과 현재(2000)의 시간을 오가며 태희와의 ‘인연’을 이어나간다. 두산 아트센터의 무대를 책임지는 여신동 무대디자이너가 구성한 80년대 풍의 배경과 원형 턴테이블 무대는 현재와 과거를 자연스럽고 짜임새 있게 이어주며 제 몫을 다한다.
극적인 분위기를 살리면서도 감성 넘치는 OST도 소문대로 감미롭다.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의 관람이 아련하고 설레는 경험이 될 수 있게 하는 데에는 이런 배경과 좋은 뮤지컬 넘버가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본다. 노래 한 소절만으로, 은은한 무대 분위기만으로 관객들을 단숨에 몰입시키기 때문이다.
원작 그림자 지우고 개성 있는 인우 그려낸 강필석
거기에 다른 인우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완벽한 인우를 그려낸 강필석의 연기도 대단했다. 사랑이라곤 한 번도 못해본 양 서툴기 짝이 없는 인우의 모습 속에서 (이병헌의 모습은 떠올릴 수 없을 만큼!) 개성 있고 매력적인 강필석만의 인우를 연기했다. 태희와 닮은 모습으로 인우를 당혹스럽게 하는 학생 현빈 역의 이재균 역시 탄탄한 노래 실력과 설득력 있는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다만, 영화 속에서는 현빈의 속마음을 추측할 수밖에 없어 더욱 인우의 사랑이 애절했다면, 뮤지컬에서는 현빈의 입장으로 부르는 노래가 있어 현빈과 인우의 내면 상태가 확실한 대신 긴장감이 떨어지는 점도 있다. 그럼에도 같은 장면, 같은 대사를 연기하는 데 있어서 원작 영화의 아우라를 거둬낸 데에는 배우들의 힘이 컸다. 강필석, 이재균 외에도 성두섭, 윤소호, 전미도, 김지현 등이 주연으로 열연한다. 인우의 친구로 등장하는 임기홍, 진상현은 극 중간중간에 코미디 부분을 확실한 책임진다.
만약 누군가 올가을에 볼만한 뮤지컬을 추천해달라고 한다면, 망설임 없이 이 작품을 권하고 싶다. 가을바람이 거세질 11월 17일까지 두산 아트센터 연강홀에서 인우의 첫사랑 앓이는 계속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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