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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강암 바닥 위에서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op.57 ‘열정’>
‘운명’의 격렬함을 함께 연상하라!
“나는 이보다 훌륭한 음악을 모릅니다. 매일 들어도 좋을 거요. 인간이 이런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미래는 공포의 교향곡이 아닙니다. 미래는… 베토벤입니다. 투쟁과 시련을 넘어 환희로! 미래는 자유 투쟁의 불꽃입니다.”
“나는 이보다 훌륭한 음악을 모릅니다. 매일 들어도 좋을 거요. 인간이 이런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미래는 공포의 교향곡이 아닙니다. 미래는… 베토벤입니다. 투쟁과 시련을 넘어 환희로! 미래는 자유 투쟁의 불꽃입니다.” 누가 한 말일까요?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이 했던 말입니다. 물론 레닌이 실제로 이와 똑같이 말했는지는 확실치가 않습니다. 1963년의 소련 영화 <아파시오나타>에 등장하는, 영화 속 레닌의 대사입니다. 때는 1920년 가을, 레닌이 탄 차가 모스크바 밤거리를 달리다가 친구인 소설가 막심 고리키의 집 앞에서 멈춥니다. 그날 고리키의 집에는 피아니스트 이사이아 도브로베인도 있었습니다. 고리키가 도브로베인에게 베토벤의 ‘열정’을 연주해달라고 청하지요. 연주가 끝난 뒤 레닌이 앞에서 인용된 것처럼 말했다고 합니다. 영화 <아파나시오타>는 소설가 고리키의 회고에 의거해 그 대사를 영화 속에 삽입하고 있습니다.
레닌은 혁명을 향한 열정이 약해질까봐 음악을 일부러 멀리했다고 하지요. 그런 레닌마저도 유난히 좋아했던 피아노 소나타 23번 f단조 ‘열정’(Appassionate)은 1년쯤 앞서 작곡했던 소나타 21번 C장조 ‘발트슈타인’과 더불어 베토벤의 중기(中期), 이른바 ‘걸작의 숲’으로 불리는 시기를 대표하는 소나타라고 할 수 있지요.
‘열정’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에서도 가장 격렬하게 감정의 표출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베토벤의 생애』의 저자인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은 “화강암 바닥 위에서 타오르는 맹렬한 불길”이라고 묘사하기도 했지요. 물론 오늘날의 감성으로 보자면, 뭐 이 정도의 뜨거움을 ‘격렬함’이라고까지 표현할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여전히 ‘고전적 기풍’을 중시했던 당시의 오스트리아에서 이런 식의 음악적 표현은 ‘엄청난 박력’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1악장과 3악장에서 폭풍 같은 열정의 고조를 드러내고, 그 중간에 놓인 2악장은 내면적 침잠, 엄숙과 평안함을 보여줍니다. 매우 격렬한 열정을 품고 있으면서도 베토벤 특유의 엄격한 구조 속에서 음악이 흘러가는 것이지요. 그야말로 ‘베토벤적 리듬’이라고 특정할 만한, 쥐락펴락하면서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운동감이 곡의 전편에 가득합니다.
이 곡의 감상을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도움말’은 ‘운명’을 함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작곡한 교향곡 c단조, 바로 그 유명한 ‘운명’의 격렬함을 함께 연상할 필요가 있다는 얘깁니다. 교향곡의 역사에서 ‘교향곡 c단조’처럼 뜨겁게 문을 여는 음악이 없었던 것처럼, ‘열정’도 같은 맥락에서의 의미 부여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겨집니다. 게다가 ‘딴딴딴단’ 하는, 그 유명한 ‘운명의 동기’가 1악장에서 왼손으로 연주되는 장면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이 두 곡은 피아노 소나타와 교향곡으로 장르가 서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기에 태어난 ‘음악적 쌍생아’라는 측면이 있습니다.
‘열정’이라는 이름은 물론 베토벤의 작명이 아닙니다. 함부르크의 출판업자 크란츠가 붙인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데, 베토벤도 그 이름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작곡 시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베토벤의 ‘자칭’ 비서 역할을 했던 안톤 쉰틀러에 따르면, 베토벤은 ‘열정’을 후원자인 프란츠 폰 브룬스비크 백작의 집에서 1806년에 단숨에 써내려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설로 인정받고 있지는 못합니다. 그보다는 베토벤의 제자였던 페르디난트 리스(1784~1838)의 증언이 설득력 있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리스는 베토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쳤던 프란츠 안톤 리스의 아들인데,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연주해 피아니스트로 데뷔하기도 했던 인물이지요. 베토벤의 제자이자 악보필경사, 또 악보출판과 관련한 업무를 거들던 비서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함께 산책하던 베토벤이 어떤 악상을 입으로 흥얼거리다가 큰 소리로 외쳐대기도 했다는 회고를 남겨놓고 있는데, 그 시기가 1803년이거나 그 이듬해인 것으로 유추됩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열정’은 친구이자 후원자인 브룬스비크 백작에게 헌정한 곡이지요. 그렇습니다. 베토벤은 귀족의 후원을 받던 음악가였지만, 동시에 자신을 후원하던 귀족들과 우정 어린 친교를 맺기도 했습니다. 브룬스비크 백작뿐 아니라 루돌프 대공 같은 이도 있었지요. 루돌프 대공은 베토벤의 피아노 제자이기도 했습니다. 대공은 피아노 소나타 26번 ‘고별’, 또 피아노3중주 ‘대공 트리오’ 등을 베토벤으로부터 헌정받았던 인물이지요. 한데 대공(大公)이라 함은 ‘황제의 형제’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베토벤이 그런 이들과 주군과 신하의 관계를 뛰어넘어 친교를 맺을 수 있었다는 사실은 18세기 막바지부터 불어닥친 세상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대목입니다. 바야흐로 유럽사회에는 변화의 조짐들, 다시 말해 기존의 체제에 균열이 가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베토벤은 그런 시대의 한복판에서 ‘새로운 음악’의 길을 닦고 있었던 것이지요.
관련태그: 베토벤, 열정, 피아노 소나타 23번, 브룬스비크 백작, 아파나시오타, 베토벤의 생애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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