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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이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쓴 ‘슬픈 노래’ - <피아노 소나타 8번 c단조 op.13 ‘비창’>
20대의 마지막 무렵에 느꼈을 법한 청년의 애상감
‘비창’(Pathetique)이라는 표제는 여러 이설(異說)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베토벤이 직접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피아노 소나타 32곡 중에서 베토벤이 직접 표제를 붙인 것은 8번 ‘비창’과 26번 ‘고별’밖에 없다고 하지요. 나머지는 다른 사람들, 예컨대 악보 출판업자나 후대의 시인 등이 붙인 ‘속칭’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어쨌든 베토벤이 직접 표제를 붙였다는 것은, 이 음악을 통해 베토벤이 뭔가 특별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음악에 어떤 ‘의미’를 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나는 베토벤과 영원히 함께 살아갈 것이다.” 피아니스트 알프레트 브렌델(82)이 40대 시절에 어떤 인터뷰에서 했던 말입니다. 당시의 브렌델은 이미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완주한 뒤였습니다. 그래서 음반회사와 하이든의 소나타를 차기작으로 녹음하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이 피아니스트에게 최고의 음악은 언제나 베토벤이었나 봅니다. 브렌델은 그냥 입에서 나오는 대로 대충 말하는 사람이 아니지요. 그는 같은 인터뷰에서 이런 말도 합니다. “나는 지금 40대이지만 아직도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무궁무진하다. (중략) 나는 언제나 베토벤의 작품에서 새로운 신비를 발견하며, 이러한 발견은 계속 이뤄져야 한다. 내가 만약 베토벤의 총체성을 성취했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처럼 슬픈 일도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베토벤의 작품들은 대단히 복잡하며, 그의 작품 속에 투여된 새로운 통찰들을 발견하는 일은 끝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나의 삶, 나의 음악』, 동문선, 2008년)
오늘부터 세 차례에 걸쳐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에 대해 쓸 생각입니다. 어쩌면 네 차례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첫 곡은 8번 c단조 ‘비창’입니다. 다음 곡은 아마도 14번 c샤프단조 ‘월광’이 될 듯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 곡은 아직 미정입니다. 차차 생각해볼 요량입니다. 아시다시피 베토벤이 남긴 피아노 소나타는 모두 32곡입니다. 그중에서 3곡 혹은 4곡을 골라낸다는 것이 쉬운 일 같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앞서 브렌델이 언급한 ‘베토벤 작품의 복잡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곡은 아마도 29번 B플랫장조 ‘함머클라비어’일 성싶습니다. 하지만 <내 인생의 클래식 101>은 가급적이면 많은 사람들이 즐겨 듣는 곡들을 선곡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비창’입니다.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 소나타는 아마도 ‘월광’이고, 그 다음 순서가 ‘비창’인 듯합니다. 인기검색 순위를 슬쩍 참조했습니다.
그래도 여러분은 32곡 전곡(全曲)을 꼭 들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베토벤이 스물여섯 살에 작곡한 1번부터 52세에 작곡한 마지막 32번까지. 가능하면 전집 음반을 하나 구입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별도로 한 장씩 사는 것보다 그 편이 더 경제적입니다.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피아니스트로는 아르투르 슈나벨(최초의 전곡 녹음), 빌헬름 박하우스, 빌헬름 켐프, 프리드리히 굴다 등이 있습니다. 물론 앞서 언급했던 브렌델도 전곡을 세 번이나 녹음했습니다. 전곡을 다 녹음하진 않았지만 에밀 길렐스의 연주도 놓치기 아깝지요. 이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는 1972년부터 1986년까지 DG 레이블에서 베토벤 소나타 전곡을 녹음할 계획이었습니다. 한데 아쉽게도 69세였던 1985년 10월 14일에 세상을 떠나지요. 그래서 그가 남긴 전집에는 1번, 9번, 22번, 24번, 32번이 빠져 있습니다.
베토벤은 작곡가였을 뿐 아니라 당대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그의 피아노 실력은 모차르트에 견줄 만한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베토벤의 초기 음악은 주로 피아노 분야에 집중돼 있습니다. 아울러 베토벤이 음악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도 바로 그 빼어난 피아노 연주 실력에 기인합니다. 실제로 베토벤, 아니 어린 루트비히는 여덟 살이던 1778년에 독일 쾰른 선제후(막시밀리안 프란츠)의 궁정에서 선보인 피아노 연주로 단박에 주목을 받았지요. 그것은 베토벤이 처음 가졌던 연주회로 기록돼 있습니다. 여덟 살 꼬마의 능란한 테크닉과 즉흥연주가 보는 이들의 넋을 거의 빼놓다시피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려져 있다시피 어린 베토벤의 뛰어난 연주 실력 이면에는 평탄치 않았던 가족사가 깔려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 요한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쾰른 궁정의 테너가수였지요. 피아노와 바이올린도 연주했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 그러니까 베토벤의 할아버지인 루트비히(베토벤과 이름이 같습니다)도 궁정의 악장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할아버지 루트비히가 아버지 요한보다 더 잘 나가던 음악가였지요. 그런데 베토벤의 할아버지는 직업이 두 가지였습니다. 궁정 악장으로 일하면서 양조장을 함께 운영했다고 하지요. 한데 그것이 바로 화근이었습니다. 양조장집 아들이었던 요한은 어릴 때부터 ‘술맛’에 깊숙이 빠져듭니다. 그래서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되고 말지요.
어린 베토벤은 술 냄새 풍기는 아버지한테 매를 맞으면서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습니다. 어땠을까요? 당연히 심각한 트라우마를 입었겠지요. 일곱 형제들 가운데 셋만 살아남았는데, 그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폭력은 거의 일상적인 공포였을 겁니다. 그런 아버지에게 시달리던 어머니 마리아는 서른여덟 살에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나지요. 베토벤이 열일곱 살 때입니다. 훗날의 베토벤이 보여줬던 괴팍함의 밑바닥에는 그런 상흔이 자리해 있습니다.
어쨌든 여덟 살 때부터 신동 피아니스트로 이름을 얻은 베토벤은 쾰른 선제후 궁정의 오르간 연주자로 채용되지요. 1784년, 그러니까 베토벤이 열네 살 때였습니다. 이때부터 베토벤은 술 취해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돈벌이에 나서야 했습니다. 알려져 있다시피 3년 뒤에는 선제후의 허락을 받고 빈으로 떠나 모차르트에게 피아노를 사사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사제 관계로까지 이어지진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사망 때문에 곧바로 쾰른으로 귀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베토벤은 어머니마저 떠난 집안을 고스란히 떠맡아야 하는 처지가 됩니다. 할 수 없이 그는 선제후에게 봉급 인상을 간절하게 청원하지만 거절당하고 말지요. 당시의 베토벤은 그 거절에 실망하고 분노했던 것 같습니다. 1789년의 궁정 연주회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베토벤이 “악기 상태가 안 좋다”며 연주를 거절해 버린 것이지요. 프랑스에서 발발한 혁명의 기운이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가부장적 권력(아버지, 선제후)에 억눌려 살아온 베토벤이 처음으로 시도한 반항이었을 겁니다.
Portrait of Ludwig van Beethoven(1801) [출처: 위키피디아] |
관련태그: 베토벤, 비창, Pathetique, 알프레트 브렌델, 빌헬름 켐프
1961년 강원도 묵호에서 태어났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소위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서양음악을 처음 접했다. 청년시절에는 음악을 멀리 한 적도 있다. 서양음악의 쳇바퀴가 어딘지 모르게 답답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구 부르주아 예술에 탐닉한다는 주변의 빈정거림도 한몫을 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부터 음악에 대한 불필요한 부담을 다소나마 털어버렸고, 클래식은 물론이고 재즈에도 한동안 빠졌다. 하지만 몸도 마음도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재즈에 대한 애호는 점차 사라졌다. 특히 좋아하는 장르는 대편성의 관현악이거나 피아노 독주다. 약간 극과 극의 취향이다. 경향신문에서 문화부장을 두차례 지냈고, 지금은 다시 취재 현장으로 돌아와 음악담당 선임기자로 일하고 있다.
2013년 2월 철학적 클래식 읽기의 세계로 초대하는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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