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열정적 논쟁의 역사-<위대한 개츠비>
그가 위대한 이유
이미 수차례 완독을 실패 한 탓에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알 수 없는 허무감에 젖었다. 말하자면, ‘이게 진정 『위대한 개츠비』란 말인가’ 하는 허탈감이었다. 물론 문장이 뿜어내는 분위기, 남자와 여자의 본성을 뚫어보는 심리묘사와 캐릭터, 미국을 상징하는 개츠비와 같은 인물은 좋았지만, 몇 몇 설정과 서사의 결점이 ‘어째서 이게 고전이란 말인가!’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고백하자면, 나는 열독자다. 일반적으로 열독이라 하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책을 열심히 읽어 내거나(熱讀), 책이나 문서 따위를 죽 훑어 읽어내는 것(閱讀). 두 번째 의미를 좀 더 확장하자면 책을 별 막힘없이 술술 읽어내는 것도 그 의미에 포함될 수 있다. 어느 쪽이 됐건 일단 열독이라 함은 ‘책을 열성적으로 큰 어려움 없이 잘 읽어내는 행위’를 뜻한다. 그런데, 뭐 그런 걸 굳이 고백이라고까지 할 수 있느냐면, 나는 정 반대의 열독자이기 때문이다. 즉, 우성인자의 반대개념인 열성인자를 가진 열독자(劣讀者)인 것이다.
나는 책을 읽는 속도가 굉장히 더디다. 인문서적이나 사회과학 서적은 그런대로 쓱쓱 읽어내지만, 소설이라면 어딘가에 설계된 미로 속에서 헤매거나 알 수 없는 덫에 걸려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버리기 십상이다. “이봐. 최작가. 소설가라면 이 정도는 읽어줘야지. 기본이라고. 기본.” 이런 유의 추천을 수없이 받아서 읽어보면, 대부분 어느 순간 방대한 묘사와 문장의 밀림에 갇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이 때문에 나는 직업이 소설가이지만, 소설을 읽을 때마다 끙끙대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
따라서 내 소설을 읽을 때만이라도 독자들이 이 고통을 느끼지 않기 위해 쉽고 막힘없이 읽히도록 노력한다. 간혹 ‘최민석의 소설은 너무 쉽게 읽혀 남는 게 없잖아’라고 하는 말이 나올지라도, 일단은 포기하지 않고 한 번은 읽히게 하는 것이 나의 목표다. 물론 적당한 가독성이 보장되고, 다시 읽을 때 또 다른 재미가 있으면 금상첨화지만 일단은 나 같은 독자를 위해서라도 ‘읽는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는 게’ 첫 번째 목표인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나를 상당히 괴롭힌 작품은 『위대한 개츠비』다. 소설가가 되기 전부터 “이봐. 소설이라면 『위대한 개츠비』라구! 이걸 안 읽고 문학을 입에 올린 순 없단 말이야”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술자리에서도, 토론 자리에서도, 동아리모임에서도, 뭔가 좀 읽는다는 사람이라면 무조건 『위대한 개츠비』를 언급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하나같이 이 말을 빼놓지 않았다. “그런데 번역이 이상해. 나는 참고 참다 결국 원서로 읽었어.” 그 때문인지 내가 가지고 있는 『위대한 개츠비』의 판본은 총 세 권이다. 잃어버린 것까지 포함하면 아마 다섯 권 정도는 산 것 같다. 이유는 부끄럽게도, 일독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문장과 번역의 덫에 걸려 “이게 진정 위대한 문학이란 말인가!”라고 허공에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원서는 서점에서 서서 읽다가 ‘에이. 이렇게까지 해야 되나’ 싶어 그만둬버렸다. 그러다 작년에 새로운 번역이 나왔다기에 그제야 작정하고 일독을 끝냈다. 그제야 나는 기나긴 『위대한 개츠비』 구입의 역사를 끝낼 수 있었다.
여하튼, 이미 수차례 완독을 실패한 탓에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다 읽고 난 뒤에 나는 알 수 없는 허무감에 젖었다. 말하자면, ‘이게 진정 『위대한 개츠비』란 말인가’ 하는 허탈감이었다. 물론 문장이 뿜어내는 분위기, 남자와 여자의 본성을 뚫어보는 심리묘사, 미국을 상징하는 개츠비와 같은 인물은 좋았지만, 몇 몇 설정과 서사의 논리적 결점이 ‘어째서 이게 고전이란 말인가!’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에 애정을 가지는 것을 보며, 나는 하나의 본질을 파악했다. 대개 오래 살아남는 작품은 논쟁적이라는 것을.
모두가 좋아하고 괜찮아 하는 작품은 일제히 ‘이야. 이 작품 당연히 좋지’하며 전부 찬성하고 잊혀져버린다. 그런데 누군가는 열성적으로 좋아하지만 누군가는 시큰둥 해한다면, 그 열성파들이 그 작품의 매력을 끊임없이 외치고 다닌다. 마치 나의 동아리 선배와 토론 배석자들과 술자리의 친구들처럼 말이다. 물론, “근데 번역이 이상해. 나는 원서로 읽었어”라는 유보조항도 달면서 말이다. 즉, 이 논쟁의 불씨가 하나의 미완성된 작품을 더욱 완성시키는 것이다. 말하자면 철저하게 외면 받거나, 완벽하게 칭송받는 작품이라면 걷지 않을 오랜 세월의 논쟁 속에서 이런 작품들은 끈질긴 생명력을 유지하며 살아간다. 무수한 사석과 무대와 스크린을 배경으로 이런 작품들은 자신의 옷을 계속 갈아입으며 살아남게 된다.
따지고 보면 ‘바즈 루어만 감독’도 결국 나의 동아리 선배와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바즈 형!). 『위대한 개츠비』를 무수히 추천한 무라카미 하루키도 비슷한 심정이었을지 모르고, 직접 번역까지 한 소설가 김영하도 유사한 마음을 품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어쩌면, 그들의 몸을 던지는 추천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그래. 이 작품에는 여전히 무언가 있어’ 하며 다섯 번에 걸쳐 책을 구입했는지도 모른다.
며칠 전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역시 같은 심정으로 극장에 갔다. 이번에 개츠비는 스크린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만난 개츠비는 아직도 자신의 집 건너편의 푸른 불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분홍 양복도 입고, 노란 클래식 카도 타고 다녔다.
아니, 그래서? 결론은 어땠냐고?
좋았다. 매우 괜찮았다. 심야영화를 보고 새벽 한 시에 돌아와서, 다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펼쳤으니까. 맞다. 나는 때때로 『위대한 개츠비』를 다시 들춰본다. 그 논쟁적 요소에도 불구하고, 그때마다 밑줄 그어진 소설 속 문장과 묘사들은 아직도 내게 외친다.
“어이. 풋내기 소설가. 나 그런대로 괜찮은 놈이라고! 거참…….”
* 그나저나, 밑줄은 제가 그은 겁니다. 저도 볼 때마다 깜짝 놀랍니다.
관련태그: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바즈 루어만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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